[칼리플란] 그 왕세자가 왕자를 유혹하는 서른두 가지 방법

2차/적왕사2020. 10. 1. 23:32

 

 

  발칸의 부군단장이자 언젠가는 다시 왕자님이 될지도 모를 왕세자 저하께서 어딘가 이상하다.

 

  칼리안의 미친 따까리를 자처하는 아르센의 머릿속에 그런 불경한 문장이 눌어붙은 자국처럼 남기 시작한 건 정확히 이 주 전부터였다.

 

  이 주 전, 아르센을 위시한 발칸의 전 대원은 수도에서 거나하게 술판을 벌이고 새벽녘에 궁으로 돌아왔다. 6서클이 되기 전에는 석 잔 이상 맥주를 마시기만 해봐라 마셨다가는 아주 한 달 간 손 잡는 것도 금지라는 코코 아빠의 지엄하신 어명이 있었던 탓에, 그날 아르센은 맥주를 딱 두 잔까지만 마신 참이었다.

 

  그래, 더도 덜도 말고 정확히 두 잔.

 

  한마디로 기분 좋은 취기가 전신을 감싸면서 눈앞이 가물거리고 머리가 알딸딸해질 정도로만 마셨다는 얘기다. 그건 곧 이 주 전 '그 말'을 들을 당시 아르센의 정신이 지극히 정상이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날 회식을 마치고 돌아온 발칸은 무척 신이 나 있었다. 가만히만 있어도 머리가 비상한 쪽으로 팽팽 도는 덕분에, 마법사들은 모두 돌았다는 말을 듣기에 부족함이 없는 그들이었는데 하물며 취기가 오른 상태에서야 평상시보다 더 돌면 돌았지 결코 덜 돌 리가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체르밀 궁에서 훤히 내다보이는 인공호수를 보자마자 너나할 것 없이 한가지 생각을 머리에 떠올렸다.

 

  오늘에야말로 이 인공호수에 가득 담긴 물을 인공분수의 물줄기처럼 위로 솟구치게 하다못해 하늘을 수놓는 불꽃처럼 만들리라.

 

  그런 쓸데없는 야망이 삽시간에 돌아버린 마법사들의 머리를 꽉 메웠다. 만일 발칸이 목숨보다 끔찍이 여기는 어린 왕세자가 이 야심 찬 계획을 알게 된다면 당장 아이처럼 환하게 웃으며 연병장 뺑이를 시키겠지만, 그거야 들키지만 않으면 그만 아니던가. 더군다나 사위가 고요히 잠든 새벽녘에 고귀하신 왕세자 저하께서 이 먼 인공호수까지 친히 행차하실 일이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술에 취한 마법사들은 술에 취해 흐물흐물해진 정신머리로 나름의 논리적인 사고를 거친 끝에 호수 쪽으로 스멀스멀 몸을 움직였다. 이 위대하고도 원대한 계획을 성공적으로 실현 시키려면 물에 색을 입히는 마법이 필요했고, 고요히 고여 있는 물을 중력을 무시해가면서 모조리 위로 끌어 올리는 마법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렇게 허공으로 솟구친 물을 삽시간에 얼린 다음 유리조각처럼 잘게 부숴서 흩뿌리는 마법이 필요함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아르센이 코코 아빠를 떠올리면서 잠깐 한눈을 판 사이 마법사들은 일사천리로 역할 분담에 나섰다. 돌아도 단단히 돌아버린 마법사들이 술김에 또 뭔가 기상천외한 일을 벌이고자 한다는 걸 아르센이 눈치챘을 때는 잔잔하게 고여 있던 물이 중력을 무시하고 모조리 위로 솟구친 뒤였다.

 

  마법사들이 벌인 기행을 목격하고야 만 아르센은 크게 기함하며 손짓 한번으로 물을 얼렸다. 그러자 돌아버린 마법사들 사이에서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눈부신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역시 부군단장님이야! 빌헬름 관에 부군단장님 동상을 세워도 되겠습니까? 얼음 마법의 최고 권위자 아르센 헤르츠를 찬양하라! 듣기만 해도 낯부끄러운 말이 분수대의 물줄기처럼 한가득 쏟아져 내린 순간, 그 시간대에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될 파릇파릇한 머리통이 아르센의 시야에 걸렸다.

 

  플란츠였다. 그가 인공호수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무언가를 얼리고 얼린 것을 산산이 조각내는 건 아르센의 특기였다. 거대한 기둥을 만들며 하늘로 솟구쳐 오르는 호수의 물을 손짓 한 번으로 얼리는 건 아르센에게는 일도 아니었다. 냉동 마법은 눈을 감은 상태에서도 구사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마법이었고, 불의의 타를 얻어맞고 목숨이 끊기지만 않는다면 그렇게 얼린 상태를 무한하게 유지할 수도 있었다.

 

  그러니 얼어붙었던 호수의 물이 한순간에 녹아내리면서 왕세자 저하의 파릇한 머리통을 푸르죽죽하게 적시게 된 건, 순전히 그곳에서 맞닥뜨리리라고 미처 생각지도 못한 왕세자의 모습을 보는 바람에 아르센이 당황했기 때문이었다. 알딸딸하게 취기가 오른 머리는 얼어붙은 물기둥을 뻔뻔하게 유지하며 연병장 뺑이를 각오해야 할지, 아니면 지금이라도 마법을 풀어서 물기둥을 액체 상태로 만들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양 플란츠에게 웃어 보여야 할지를 기민하게 판단하지 못했다.

 

  그리고 아르센이 갈팡질팡하는 사이 호수 지척까지 다가 온 플란츠는 인상만 가만히 찡그렸다. 아, 그러니까 이게. 아르센이 잽싸게 운을 떼며 변명을 늘어놓을 준비를 마친 순간 마법사 여럿이 만들어 낸 화염구가 물기둥을 강타했다. 가뜩이나 유지해야 할지 말지를 망설이느라 냉동 마법이 불안정하게 유지되고 있던 차에 거대한 불똥까지 처맞고 나니 얼어붙은 물기둥이 녹아내리는 건 당연지사였다.

 

 

  "……마법사. 너희."

 

 

  다음 순간 촥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플란츠의 몸 위로 호수의 물이 모조리 쏟아져 내렸다. 집채만 한 파도가 무서울 정도로 범람하여 사람을 집어삼키는 것만 같은 광경이었다. 돌아버린 마법사들은 술이 확 깨는 걸 느끼며 다급하게 실드 마법을 구사했다. 한 발 늦게 구사된 마법이 물에 쫄딱 젖은 플란츠의 몸을 겹겹이 감쌌다.

 

  난데없이 물세례를 맞게 된 플란츠는 온몸에서 물을 뚝뚝 떨어트리며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 고요는 폭풍이 들이닥치기 전의 불길한 침묵과도 닮아 있었다.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샴페인과 폭죽을 터트린 것처럼 왁자지껄했던 분위기는 플란츠의 몸 위로 쏟아진 물과 함께 쓸려나간 지 오래였다.

 

  발칸의 마법사들은 숨을 쉬는 것조차 잊고 플란츠를 주시했다. 어머니, 아버지, 안녕히계세요. 불초 소생은 오늘 자진하여 세뉴 강에 안네루시아를 띄우러 갑니다. 각자의 머릿속에 저마다의 안네루시아가 세뉴 강을 수놓는 모습이 떠오를 무렵, 플란츠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돌았다 돌았다 했더니……. 정녕 돌았지."

 

 

  즐겨 입는 카디건과 셔츠가 쫄딱 젖은 탓에 유약을 구워 바른 도자기처럼 매끈하고 흰 속살이 모두의 눈앞에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었다. 감히 왕세자 저하의 적나라한 모습을 이 두 눈에 담는 불경을 저지를 수는 없다는 생각에 발칸의 신입은 허겁지겁 제 두 눈을 가렸고 니들렌은 눈을 크게 떴으며 아르센은 눈을 흐리게 떴다.

 

  투명한 압생트 빛 눈이 무언가를 생각하는 양 가늘어졌다. 뭔가 심상찮은 기운을 감지한 신입이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세자 저하, 그러니까 그게... 다들 입을 모아 말하기를 몹시도 순한 세자 저하라고는 하나, 새벽녘에 호수 주변을 산책하다 봉변을 당한 상황에서도 그 순함이 유지되는 건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왕족들의 성미가 대개 괴팍하다는 걸 고려해 보았을 때는 더더욱 그랬다. 따라서 저 조막만 한 입술에서 그 어떤 불호령이 떨어지기 전에 대강이나마 배수진을 쳐야겠다는 일념으로 황급히 입을 여는 신입에게 플란츠의 나른한 시선이 가닿았다.

 

 

  "됐어."

  "네?"

 

 

  됐다니 뭐가 됐단 말인가. 아, 역시 내 목숨은 오늘 중으로 되었으니 더는 말을 들어 볼 필요도 없다는 말인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며 멍청하게 묻는 신입을 향해 플란츠가 눈을 깜박였다.

 

 

  "됐다고. 생각해보니, 이거면 될 거 같아서."

  "……네?"

 

 

  갓 따낸 푸성귀처럼 파릇하기만 한 어린 세자 저하의 말이 지극히 짧다는 건 발칸의 전 대원이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이처럼 알아먹기 힘들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플란츠의 말을 알아듣지 못해 답답해하는 발칸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플란츠는 영 알 수 없는 소리만 돌려 줄 따름이었다.

 

  마법사들은 기본적으로 돌아 있는 생물이었다. 그 말인즉슨, 불가해한 수식을 맞닥뜨리면 적당히 우회할 줄도 알아야 하는데 우회라는 말은 악신과 함께 잠재운 것처럼 일방통행 직진밖에 할 줄 모른다는 얘기기도 했다. 당최 알아먹을 수 없는 왕세자의 말을 헤아리고자 사단장인 니들렌을 포함하여 아르센의 휘하에 있는 발칸의 모든 대원은 아르센을 구원처럼 바라보았다. 목자를 따르는 양처럼 몹시도 간절한 눈빛이었다.

 

  결국 갸륵한 얼굴로 자신을 보는 마법사들을 무시하는 데 실패한 아르센은 자진해서 총대를 메고 나섰다. 쫄지 말자. 코코 엄마. 왕세자 작위 떼고 붙으면 이쪽도 저쪽도 부군단장이니 꿀릴 건 없다. 알코올이 가져다준 용기에 힘입어 아르센은 모두가 궁금해했으되 모두가 묻지 못했던 문장을 용감하게 입에 올려놓았다.

 

 

  "그……. 실례지만 됐다는 건 대체……?"

 

 

  물을 머금고 늘어진 잎사귀처럼 나른하게 풀려 있던 눈매가 한순간에 날카롭게 좁혀 들었다. 역시 조금 쫄아야 했던 걸지도 몰랐다. 헤이시아 궁이 무너진 뒤로는 무척 오랜만에 마주하는 것만 같은 눈매에 아르센은 잠깐 집 나갔던 겁대가리를 곱게 주워들었다.

 

 

  "아니, 아닙니다. 제가 아무래도 괜한 것을 물은 거 같은데 대답해주기 싫으시면 말씀……."

  "젖어야 할 일이 있었는데 마침 잘 됐다고."

 

 

  누덕누덕 기운 옷처럼 볼품없이 이어지던 말의 한중간을 서슴없이 잘라낸 플란츠가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원체 태생이 잘난 탓인지는 몰라도 고작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는 별것 아닌 행동마저 한 편의 명화처럼 우아하기만 했다. 파르스름한 새벽빛이 조각조각 떨어지는 풍경 속에서 홀로 고고하게 존재하시는 왕세자 저하를 넋 나간 얼굴로 쳐다보던 아르센이 한참 후에 눈을 깜빡이며 얼빠진 소리를 흘렸다.

 

 

  "예……?"

 

 

  됐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만 알아내면 정말 될 거 같았는데, 젖어야 할 일이 있었다는 건 또 뭐란 말인가. 영 뜬구름을 잡는 것만 같은 소리에 플란츠를 제외하고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이들의 머릿속에 의아함만 뭉게뭉게 피어오를 즈음이었다. 무언가 말하고 싶은 게 있는데 겨우겨우 참아내는 듯한 얼굴을 보고 자신의 말이 충분한 설명이 되지 못했음을 깨달은 플란츠가 짧게 한숨을 뱉었다. 그러고는 몹시도 순한 왕세자답게 친히 말을 덧붙였다.

 

 

  "내가, 젖은 옷을 입고 아우님을 만나야 할 일이 있어서."

 

 

  플란츠는 그 말을 남기고 이제 더는 볼 일이 없다는 양 체르밀로 자연스레 발걸음을 옮겼다. 세자 위를 얻은 지 꽤 되었음에도 플란츠의 처소는 여전히 체르밀 4층이었다. 플란츠가 카밀론으로 가기를 원치 않았고 내색하지는 않았으나 칼리안 역시 그러했으며 최종적으로 르메인이 플란츠의 뜻을 존중한 결과였다.

 

  순식간에 아득한 점처럼 멀어지는 왕세자의 뒷모습을 넋 놓고 바라보던 아르센은 그의 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 뒤에야 한 가지 사실을 퍼뜩 떠올리며 외마디 비명을 내질렀다. 물론, 속으로만. 가만. 그러고 보니 아까 왕세자 저하께서 걸어가시면서 셔츠 단추를 두 어 개 정도 풀지 않았던가? 혓바닥 위에 고였던 의문형의 문장은 이내 목구멍 아래로 얌전히 침잠했다. 발칸의 부군단장직을 역임하면서 비상할 정도로 늘어난 눈치가, 조금 전 목격한 장면은 무덤 끝까지 가져가야 할 비밀임을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그때가 처음이었다. 발칸의 부군단장이자 언젠가는 다시 왕자님이 될지도 모를 왕세자 저하께서 어딘가 이상하다고 생각하게 된 것은. 처음에는 그대로 뇌리를 스치고 지나갈 불경한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날 들었던 플란츠의 말은 머리 한구석에 꿰매어 붙인 것처럼 도시 가시지를 않았다. 아르센은 그날 새벽 플란츠의 말을 오래 곱씹으며 잠을 설쳤다. 그리고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왕세자 저하가 어딘가 이상하다는 생각에만 무게감이 실렸다.

 

  몇 시간 뒤 빌헬름 관에서 얼굴을 마주친 플란츠는 몇 시간 전에 자신이 한 말이 정확히 무슨 의미였는지는 끝끝내 말해주지 않았다. 아르센의 예상대로였다. 때문에 젖은 옷을 입고 아우님을 만나야 할 일이 있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르센은 끝끝내 알지 못했지만, 시일이 지나면서 그런 것쯤은 아르센 안에서 사소한 의문으로 격하되기에 이르렀다. 얼마 안 가 하루가 멀다하고 칼리안의 하소연 아닌 하소연을 듣게 된 탓이다.

 

  처음에는 으레 하던 푸념의 연장 선상인 줄로만 알았다. 이렇게나 어리고 연약하시면서 당최 뭘 믿고 그러시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동생 말을 듣지 않는 철없는 형님 때문에 내가 또 오십 년을 늙었다는 식의. 그래서 적당히 들어주며 고개를 끄덕이면 될 줄로만 알았다. 그게 아니라는 걸 깨닫는 데는 단 이틀이면 충분했다. 칼리안의 입에서 나온 하소연 아닌 하소연은 그간 들었던 것과는 미묘하게 궤를 달리하고 있었다.

 

 

  "헤르츠 경. 들어 보세요. 글쎄 어제는……."

 

 

  익숙한 서두가 흘러 나오자마자 아르센은 올 것이 왔다는 표정을 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헤르츠 경. 들어 보세요. 글쎄 어제는……. 으로 시작하는 불길한 얘기는 오늘을 포함하여 벌써 열흘째 계속되고 있었다. 윗사람의 푸념과 하소연을 듣는 것도 엄연한 감정 노동의 일환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아르센이었으나 계급 앞에서는 그 신념도 다 무의미했다. 까라면 까고 들으라면 들어야지 별수가 없다.

 

  속으로 코코 아빠와 코코를 죽어라 떠올리며 표정 관리를 위해 애쓰는 아르센의 귀에 꽃잎처럼 부드러운 미성이 한들한들 내리 앉았다. ……완두콩이 저번처럼 한쪽 허벅지를 이불 밖으로 드러내다 못해 이번에는 아주 가슴께까지 침의를 걷어 올린 낯부끄러운 행색으로 잠을 청하고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물론, 형님께서 어떤 모습으로 주무시건 내가 상관할 계제가 아니라는 건 압니다. 또한 예전에는 자주 그런 식으로 주무셨다는 것도 익히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말입니다. 더위도 추위도 많이 타시는 분께서 감기에 걸리려고 작정이라도 하셨는지…….

 

 

  "아무래도 뭘 잘못 드신 것 같은데."

 

 

  뜰채로 떠 올린 햇빛을 푸르른 바다에 듬성듬성 흩뿌리고 성의 없이 뭉갠 것처럼, 드문드문 주홍빛으로 물들기 시작한 하늘 아래 우렁찬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은접시처럼 쨍쨍하게 타오르던 해가 덜 익은 노른자처럼 풀어져 하늘로 스미는 시간임에도 빌헬름 관에서는 발칸의 마법사들이 플란츠의 선창에 맞추어 체력 단련을 하는 훈훈한 광경이 한창이었다. 그래서 무의식중에 듣지 못할 것이라 여겼나 보다. 옆에 있는 사람이 귀 밝기로 둘째 가라면 서러울 소드 마스터라는 점을 그만 간과하고.

 

 

  "응? 지금 뭐라고 했습니까, 헤르츠 경?"

 

 

  신의는 있어도 충의와는 거리가 먼 마법사들을 능숙하게 통솔하는 새파란 머리통을 흐뭇한 얼굴로 지켜보던 칼리안의 얼굴 위로 삽시간에 화사한 미소가 만개했다. 실로 꽃 같은 미소나 그 속에 날카로운 칼이 숨겨져 있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아르센은 뒤늦게 헙 하고 입을 다물었다가 큼큼하며 공연히 목을 가다듬었다. 하필이면 부지불식간에 그런 말이 새어나갈 게 뭐란 말인가. 하여튼 입이 원수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왕자님."

  "하기야, 아무리 돌아버린 마법사라고는 하나 암만 그래도 내 형님께서 뭔가 잘못 드신 것 같다는 그런 말을 내 앞에서 할 만큼 경이 미쳤을까."

 

 

  ……다 들으셨잖습니까. 지금이라도 준비할까요. 안네루시아. 매도 먼저 맞는 매가 낫다고 이참에 자진 납세해서 세뉴 강으로 가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방긋방긋 웃는 칼리안을 보며 아르센이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대강의 훈련을 끝낸 플란츠가 두 사람이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그러자마자 딸기처럼 물렁해진 붉은 눈이 플란츠의 모습을 위아래로 바삐 훑었다. 늘 핏기없이 창백하게 말라 있던 얼굴이 오찬을 들고 난 이래로 계속된 훈련 때문에 발그스레하게 상기되어 있었다. 이제야 조금 살아 있는 사람처럼 여겨지는 얼굴이었으나 칼리안의 미간은 여지없이 찌푸려졌다. 그 얼굴에 자잘한 생채기며 흙먼지가 가득했던 탓이다.

 

  기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오늘의 훈련 일정에는 마법사들과의 대련도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흙먼지는 그렇다 쳐도 자잘한 생채기쯤이야 시스파니안의 위대한 축복으로 몇 분 뒤면 감쪽같이 나을 터였다. 그럼에도 그 모습을 보자마자 클린 마법부터 외운 칼리안은 아르센이 보기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플란츠를 살뜰히 살피기 시작했다.

 

  여긴 누가 그랬습니까? 여기는요. 또 여기는……. 뺨에 난 생채기를 하나하나 더듬어나가는 눈꼴이 시린 광경 앞에서 아르센은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아무리 그래도 상사 앞에서 헛구역질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칼리안의 손이 움직이는 것에 맞춰 시시각각으로 새파랗게 질려가는 부군단장의 모습을 힐끗 본 플란츠가 한 손을 들어 칼리안의 행동을 제지했다.

 

 

  "그만."

  "그만은요. 형님 이거 여기서 조금만 삐끗했다가는 눈까지 다치실 뻔했습니다. 누굽니까?"

 

 

  자못 심각한 어조였으나 그리 말하는 칼리안의 손은 플란츠의 목덜미에 가닿아 있었다. 거기서 조금만 삐끗하면 눈까지 다칠 뻔했다니, 누가 봐도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지그프리드의 소가주가 리리에를 걱정하고 염려한 끝에 하는 행동보다도 더한 짓을 로젤리타까지 다녀온 형님에게 하는 이 우스꽝스러운 광경을, 만일 드미레아가 봤더라면 크게 혀를 찼을 게 분명했다. 큰 상처도 아니고 이까짓 생채기쯤이야 축복의 힘을 빌리면 금세 낫는다. 더군다나 대련 때마다 목덜미를 신나게 그어 댄 사람이 할 법한 말은 아니었다. 그걸 알면서도 지나치게 호들갑을 떠는 작태에 플란츠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작작 하지."

  "내 형님이 연약하셔서 이 아우가 걱정이 큽니다. 축복이 있으니 흉은 안 지시겠지만..."

  "……괜찮으니까. 그보다, 조금 더운데."

 

 

  그러며 플란츠는 자연스럽게 셔츠 단추를 풀려 했다. 하지만 단추 하나를 풀기가 무섭게 검은 장갑을 낀 손이 플란츠의 손목을 붙들었다. 뒤이어 물 흐르듯이 유려한 손길로 플란츠가 방금 푼 단추를 도로 잠가 낸 칼리안이 무시무시한 얼굴로 아르센을 돌아보았다. 헤르츠 경. 뭐 하고 있습니까. 내 형님 저하께서 덥다고 하시는데. 그러니 경의 특기인 얼음 마법으로 주변을 시원하게 만들든 아예 얼려버리든 아무튼 형님의 더위가 가시게끔 뭐라도 좀 해보라는 압박이자 명령이었다. 아르센은 미친 따까리답게 그 명령을 충실히 수행하려 했지만, 주문을 외우려던 입술은 자신을 서늘하게 일별한 연둣빛 시선에 곱게 다물렸다.

 

 

  "뭐 하고 있습니까?"

  "아니, 그게 말입니다."

  "……안 더워."

  "조금 전에는 덥다고 하셨잖아요."

  "잘못 말했어."

 

 

  플란츠는 그리 말하며 아르센을 향해 미미하게 턱짓을 했다. 그 순간 아르센은 플란츠의 눈에 불만이랄지 서운함이랄지 섭섭함이랄지 여하간 하나로 딱 정의 내릴 수 없는 복잡다단한 감정이 서린 걸 보았다. 그 감정이 플란츠의 하나뿐인 동생에게서 기인했음은 너무나도 자명했다. 왕세자 저하께서 왕자님 때문에 그런 감정을 가지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좌우지간 이럴 때는 잠자코 플란츠의 지시를 따라 자리를 피하는 게 상책이었다. 아르센은 칼리안과 플란츠에게 번갈아 묵례한 뒤 잽싸게 그 자리를 벗어났다.

 

  눈치 빠른 파란 머리 마법사가 바람처럼 사라지고 나니 이제 남은 건 저만치 멀리에 옹기종기 모여서 또 정신 나간 짓을 벌일 준비를 하고 있는 발칸의 마법사들과 두 명의 왕족뿐이었다. 그러나 멀리 있는 마법사들은 그들이 좋아하는 정신 나간 짓 외에는 안중에도 없었으니 실상 이 장소에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차근차근 따져본 끝에 이곳에 단둘만 있다는 걸 확신한 플란츠의 입이 조심스레 열렸다.

 

 

  "돌아갈 건데."

  "아, 체르밀로 가시게요?"

  "응. 그런데……."

 

 

  플란츠는 칼리안을 힐끗 쳐다보았다가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걷기가 좀 힘든데."

  "어떤 놈입니까."

  "아니라고. 그런 거."

 

 

  당장이라도 발칸 전원을 집합시키다 못해 붉은 오러에 피어를 더해 무시무시한 검을 만들어 낼 기세인 칼리안을 재빨리 막아서며 플란츠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럼요."

  "그냥, 좀. 그래서 아우님이……."

 

 

  그래서 아우님이 부축해줬으면 좋겠는데. 플란츠는 그런 말을 하려 했지만 말은 채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플란츠가 말을 맺기도 전에 칼리안이 빌헬름 관을 지키고 있는 시종을 불러 마차를 부르고 나선 것이다.

 

 

  "제가 말해뒀으니 조금 있으면 마차가 도착할 겁니다. 그러니 그거 타고 돌아가셨다가, 오늘은 푹 쉬세요. 무리하시면 안 됩니다."

  "……."

  "형님?"

 

 

  연분홍빛 입술이 몇 번인가 달싹였다. 포동포동 살이 오른 루시의 앞발이 고단한 잠을 청하고 있는 몸을 사정없이 꾹꾹 눌렀을 때처럼 불편한 얼굴을 하는 플란츠를 보며 칼리안은 고개를 갸웃했다. 형님 표정이 뭔가 마뜩잖아 보이시는데. 혹시 몸이 많이 불편하신가? 걱정과 다정과 애정이 여름철의 햇빛처럼 진득하게 녹아 흐르는 눈앞에서 플란츠는 애꿎은 입술만 꾹꾹 깨물었다. 그렇게 감추고 싶은 심정은 귀신같이 알아채는 주제에 왜 이런 쪽으로는 한없이 무디기만 한 건지.

 

  야심만만하게 준비한 계획이 실패한 게 이번으로 벌써 몇 번째더라. 될 수 있으면 어물쩍 넘어가는 게 좋을 부분에서마저도 영민한 머리는 눈이 부실 정도의 성과를 자랑했다. 자그마치 보름 간 연이어 온 민망한 실패의 나날이 하나도 빠짐없이 덧그린 것처럼 떠올랐다.

 

  최초의 기억은 연병장에서부터 시작했다. 여느 때처럼 키리에와 연병장에서 대련을 마친 플란츠는 그날도 키리에와 자신의 대련을 보기 위해 연병장에 와 있었던 칼리안을 힐끗힐끗 보며 평소보다 배는 가쁜 호흡을 했다. 다분히 어른의 의도를 양껏 담은 행동이었다. 그런데 칼리안은 눈만 크게 떴을 뿐 얼굴을 붉히지는 않았다. 키리에와 쉴 틈 없이 검을 맞대느라 발그스레하게 물든 얼굴을 하고, 민망하기 짝이 없는 호흡을 하고 있음에도 그랬다.

 

  칼리안은 얼굴을 붉히기는커녕 그 꽃다운 얼굴이 파랗게 질려선 걱정을 주렁주렁 매달고 플란츠에게 다가왔다. 그 얼굴을 보고 자신이 공연한 짓을 하여 아우님께 근심 하나를 더했다는 생각에 플란츠는 급히 호흡을 갈무리했다. 그런 게 아니라는 뜻을 전하기 위해서. 그러나 칼리안은 "어디 아프세요? 열이 있으신 건 아닙니까?” 하며 플란츠가 입을 열기도 전에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붓더니 손에 끼고 있던 검은 장갑을 빼고 맨손으로 플란츠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이마에 닿은 손은 속이 녹아내릴 만큼 뜨끈했고 좋았지만 딱 거기까지만이었다.

 

  칼리안은 그 이상을 해주지 않았고 "열은 없으신 것 같아 다행입니다."라며 떨어지는 손을 붙들어다 제 뺨에 대고 비빌 용기는 플란츠에게는 아직 없었다. 설사 있다 하더라도 그 짓을 칼리안의 충직한 따까리가 지켜보는 앞에서 자행할 정도의 용기는 나지 않았다. 그 따까리가 당신이 뭘 의도한 건지 내 왕자님은 모를지언정 적어도 나는 다 알겠다는 눈을 했다가 조용히 고개를 모로 돌리는 상황에서는 더더욱.

 

  쟤도 아는 걸 너는 왜 몰라.

 

  오갈 곳 없는 억울함이 울컥 솟구친 건 그 한 번으로 끝이 아니었다. 분명 자신보다 연세가 더 많으신 아우님께서는 어찌 된 영문인지 플란츠의 언행에 묻어나는 성적 뉘앙스를 번번이 알아차리지 못했다.

 

  큰마음 먹고 대담하게 "나 오늘 한가한데."라는 말을 했을 때는 "그럼 이참에 푹 쉬세요. 매번 잔업 처리하시느라 얼굴 밑이 까맣게 죽어 가는 꼴 보는 제 심정도 좀 생각해주시고요. 듣자 하니 적당히 다디단 차가 숙면에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라는 말을 돌려주질 않나, 이건 안 되겠다 싶어 일부러 허벅지까지 다 드러내 가며 자는 척을 했더니 세상 다 산 늙은이처럼 폭삭 삭아가는 한숨을 내쉬며 이불을 덮어주질 않나, 달큰하게 조린 잼이 가득 든 디저트를 먹으며 다분히 의도적으로 손에 잼을 뚝뚝 흘리고 흘린 잼을 혀로 핥았을 때는 "리리에도 아니고 다 흘려가며 드시네. 아니, 혹시 어디 편찮으신 건 아니죠? 제가 먹여드릴까요? 아니다. 제가 먹여드릴게요. 자, 아 해보세요. 아……." 하는 낯간지러운 장면을 연출하기에 이르렀다. 플란츠는 됐으니 집어치우라는 말로 헛다리를 짚어도 한참 잘못 짚은 아우님의 행동을 사양하려 했으나 그럴 틈도 없이 칼리안이 설탕에 조린 귤로 만든 파이를 집어 들었다.

 

  결국 그날은 못 볼 걸 보았다는 양 얼굴을 구기는 드미레아와 어쩐지 웃음을 애써 눌러 참는 듯한 히나를 앞에 두고 식사를 마쳐야만 했다. 아주 환상적으로 끝내주는 실패였다.

 

  그래서 이것도 저것도 다 아니고 좀 부족한가 싶어 여봐란듯이 젖은 옷을 입고 가슴팍을 다 풀어 헤친 채로 새벽녘에 칼리안을 만나러 갔다. 만나러 갔더니 이번에는 "감기 걸리신다니까요. 축복이 있으시다고는 하나, 그래도 몸은 챙기셔야 할 거 아닙니까. 이러다 크게 앓아누우시면 어쩌려고 이러십니까."로 시작되는 장장 한 시간짜리 연설을 들어야만 했다.

 

  아니 보통 그런 상황에서는 다른 생각부터 하지 않냐고. 그게 아니면 너 고자냐고. 생전 써보지 않았고 들어보지도 않았으며 책에서나 딱 한 번 보고 말았던 험악한 말이 목 끝까지 치달은 게 벌써 몇 번째인지 이제는 셀 수도 없었다.

 

  이제 그만 포기할까. 그러나 잠든 신에 맹세코 일평생을 통틀어 이처럼 강렬하게 무언가를 원한 적은 없었다. 게다가 자신의 하나뿐인 아우님도 그런 말을 하지 않았던가. 이제는 무언가를 내려놓고 흘려보내는 삶보다 원하는 걸 바라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고. 그러니 포기라니 말도 안 될 일이다.

 

 

  "아, 벌써 도착했네요. 제 말 꼭 명심하셔야 합니다. 아셨죠, 형님."

 

 

  어느샌가 도착한 마차가 플란츠와 칼리안의 앞에 얌전히 멈추어 섰다.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마차 문을 열어 주는 동생과 원망스러운 마차를 번갈아 보다가 플란츠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그럴 필요까진 없는데도 구태여 손을 잡아 주겠다 나서는 동생의 손을 붙들고 마차에 오르자 야속한 문이 잘도 닫혔다. 플란츠는 붉게 물들어 가는 하늘 아래에서 안네의 발톱처럼 작아지는 칼리안을 오래도록 보며 바삐 머리를 굴렸다. 덥다는 핑계로 은근슬쩍 옷을 벗어서 칼리안의 마음이 동하게끔 하려던 계획도 실패, 체르밀까지 부축해달라는 말로 은근하게 스킨십을 유도해 보려던 계획도 실패라면, 다음에는 어떤 방법을 쓰면 좋을지에 대해.

 

  그리고 완두콩만 한 머리를 데구르르 굴려 나온 각종 방안을 열심히 실행에 옮기는 플란츠의 눈물겨운 노력은 날이 가면 갈수록 칼리안을 곤혹스럽게 했다. 그 노력을 하나하나 열거하자면 끝이 없었으나 크게 놓고 보자면 플란츠는 이전과는 백팔십도로 달라진 몸가짐을 유지했다. 정확히는 원치 않았던 망나니 행세를 하던 시절로 돌아간 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방탕하고 경박하게 굴었다. 칼리안이 체르밀 4층에 들를 적마다 플란츠는 흐트러진 모습으로 칼리안을 맞기 일쑤였고, 묘하게 나른하거나 풀어진 눈매로 칼리안을 훑곤 했다. 그뿐만 아니라 이따금 휘청이긴 했어도 대체로 각이 잡혀 있었던 걸음걸이는 길을 지나가는 음험한 맹수에게 자신을 내던질 것처럼 무방비하기 짝이 없었다.

 

  이 완두콩이 대체 왜 이래.

 

  급기야 그 언젠가처럼 셔츠를 배꼽까지 풀어 헤치고, 체르밀 3층의 침대에 오도카니 앉아 있는 플란츠를 보았을 때 칼리안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물을 수밖에 없었다. 형님, 제게 뭐 불만 있으십니까? 하고. 플란츠는 내리뜨고 있던 눈만 위로 올려 칼리안을 보았다가 물음과는 상관없는 대답을 꺼내 놓았다.

 

 

  "……몸, 뜨거운 거 같아서."

  "계속 그렇게 다니시니 진짜 감기라도 걸리신 거 아닙니까……. 이리 와 보세요."

 

 

  환장하겠네. 그러니까 왜 이렇게 다 내놓고 다니냐고. 자신의 타들어 가는 속도 모르고 어여쁜 속살 훌훌 내까며 다니는 애증 하는 형님을 향해 칼리안은 손을 뻗었다. 다른 때 같았더라면 유순하게 휘어지는 풀잎처럼 순한 성정을 지닌 왕세자답게 그 손길에 고분고분 제 몸을 내맡겼을 플란츠였지만 이번엔 달랐다. 연분홍빛 입술만 지그시 깨물고는 빈정이 상했다는 듯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것이다.

 

  형님, 잠시만요. 지금 그 몰골로 어디 가시려고요. 제 망토라도 덮고……. 심지어 테라스가 아니라 문으로 걸어가는 모습에 칼리안이 황망히 제 망토를 덮어주려 했지만 플란츠는 그마저도 거절했다.

 

  형님……. 진짜 제게 뭐 서운한 거 있으신 건 아니죠? 드물게도 어리광을 부리는 것처럼 튀어나온 말이 문을 나서려던 플란츠의 발걸음을 잠시나마 붙들었다. 제가 말씀드렸잖습니까. 서운하신 것, 마음에 안 드시는 것, 마음에 드시는 것, 그게 무엇이건 간에 형님의 입으로 직접 듣고 싶다고. 그 말에 내내 정면을 보고 있던 플란츠가 고개를 살짝 틀었다. 연분홍빛 입술이 무언가 말할 것처럼 달싹였다. 그랬기에 칼리안은 플란츠가 이번에야말로 뭔가 말해주리라 일말의 기대를 했지만 그 입술은 칼리안의 기대를 배반하며 이내 다물렸다. 그렇게 누가 봐도 불만과 서운함과 섭섭함이 가득한 얼굴을 한 채 플란츠는 어떤 말도 하지 않고 칼리안의 침소를 떠났다.

 

  그게 바로 어제 일이다. 이렇다 보니 칼리안은 새삼 이런 생각을 하기까지에 이르렀다.

 

  아니. 이 완두콩 진짜 반항기 아냐? 그러나 가만 생각해보면 자신만 이렇게 여기는 것일 수도 있었다. 거듭 생각한 끝에 칼리안은 가장 만만한 사람 하나를 골라 의견을 묻기로 했다. 자고로 훌륭한 국왕의 재목이라면 타인의 의견도 한번쯤은 들어봐야 하는 법 아니던가.

 

 

  "내가 지금 이 자리에 경만 있어서 하는 얘긴데."

  "제가 왕자님께만 드리는 말씀인데 말입니다."

 

 

  두 사람은 동시에 말을 뱉고 동시에 말을 삼켰다. 설마하니 동시에 엇비슷한 말을 꺼내리라고는 두 사람 모두 생각지도 못했던지라, 어색한 침묵이 일순 장막처럼 사위를 덮었다. 살다 보니 이런 일이 다 있네요.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양 새하얀 침묵을 말끔하게 걷어낸 칼리안이 환하게 웃으며 넌지시 제안했다.

 

 

  "셋을 세면 동시에 말하도록 하죠. 헤르츠 경."

 

 

  아르센은 재빨리 손사래를 쳤다. 원하지는 않았지만 어느덧 하늘을 뚫을 기세로 자라난 그의 눈치가 이런 상황에서는 동시에 말해봤자 좋을 게 없다는 걸 경고문처럼 알려주고 있었다.

 

 

  "왕자님 먼저 말씀하십쇼."

  "그래요, 그럼. 내가 먼저 말해볼까."

 

 

  칼리안은 지난 보름간 있었던 일에 대해 아르센에게 낱낱이 털어놓았다. 대체로 아르센에게 하소연 조로 털어놓던 이야기에 몇 가지 사건을 첨가하여. 가끔 겁대가리 상실한 것처럼 굴며 맞먹으려 들긴 해도 대체로 이런 일을 발설하지 않으리라는 굳은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정정한다. 굳은 믿음과 오러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난 보름간 플란츠가 칼리안에게 어떤 행동을 했는지 소상히 듣게 된 아르센은 칼리안의 앞이라는 것도 잊고 입을 떡 벌렸다. 왕세자 저하께서 요즘 뭔가 이상하신 거 같은데 혹시 왕자님께서는 뭣 좀 아시는 거 없냐는 건방진 물음은 목구멍 안쪽으로 꾹꾹 집어넣은 채.

 

 

  "……그렇게까지……. 그런 것까지 하셨……. 다고요?"

  "네. 덕분에 내가 요새 걱정이 아주 많습니다."

  "그거……. 누가 봐도 유혹 아닙니까?"

 

 

  파란머리 마법사 너는 그걸 어떻게 아냐고, 그렇게 물으려던 붉은 입매가 잠잠해졌다. 유혹……. 유혹이라. 제2의 반항기를 맞이한 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도무지 이해하지 못할 완두콩의 온갖 행각에 유혹이라는 단어를 붙이니 그럭저럭 말이 되는 것 같기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에 완두콩과 유혹이라니 세상에 그것만큼 어울리지 않는 단어의 조합이 또 있으랴 싶었다.

 

  칼리안은 서명을 하기 위해 들었던 깃펜으로 책상을 톡톡 치며 생각에 빠졌다. 완두콩과 유혹이라니. 차라리 루시와 안네가 닭가슴살을 먹기 위해 플란츠를 유혹한다는 게 더 신빙성 있을 정도였다. 이리 생각하고 저리 생각해 보아도 제 머릿속에서 도무지 결합되지 않는 두 개의 단어 때문에 칼리안이 깊은 상념에 빠지려던 찰나, 아르센이 툭 던지듯이 말을 뱉었다.

 

 

  "두 분이 각별하신 사이라는 거, 웬만한 사람들이라면 다 알고 있습니다."

  "각별한 사이긴 하죠. 형님과 내……. 예?"

  "그러니 누가 봐도 유혹이라고 할걸요. 제이아 경도, 페일튼 경도.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는 베른 경이 그랬습니다. 두 분께서 서로에게 각별한 마음을 품고 계시는 것 같아 어쩐지 다행이라고. 사랑을 하게 되면 다들 달라진다는데 좋은 왕세자님이 자상한 왕자님을 참 많이 좋아하셔서 그분답지 않은 행동도 이렇게 하시는가 보다, 하고. 아무튼 그러자 집에 겁대가리 놓고 온 신입이 호들갑을 떨며 묻지 뭡니까. 그럼 지금 세자 저하께서 유혹……. 뭐 그런 걸 하고 계신 거냐고."

 

 

  대수롭잖게 이어지는 말에 붉은 눈이 휘둥그레 뜨였다. 이따금 돌아버린 마법사답게 헛소리를 늘어놓는 미친 따까리는 그렇다치고, 플란츠를 끔찍하게 여기는 앞의 두 사람도 그렇다치고, 우리 히나가 하는 말이 틀릴 리가 없다는 굳은 믿음을 가진 사람의 눈이 빠르게 깜박였다.

 

  그래. 우리 히나가 하는 말이 틀릴 리가 없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고 보기만 해도 빛이요 진리요 생명인 히나의 입에서 하는 말이 틀렸다는 게 말이 안 된다. 그렇다면 정말 나와 형님이 각별한 사이라는 걸 모두가 알고 있다는 뜻일 텐데, 대체 언제 들켰는가에 대한 생각은 곱이 접어 날려버린 칼리안이 한철에 피는 꽃처럼 섬뜩한 아름다움을 그 얼굴에 매달며 웃었다.

 

 

  "그런데 경은 어떻게 유혹이라고 확신합니까? 혹시 경에게도 그랬습니까? '내' 형님 저하가?"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아도 그 머리 파릇파릇한 왕세자 저하께서 여기 계시는 왕자님의 형님이시라는 건 제가 알고 세렌티가 알고 위대한 시스파니안께서 익히 아시는 사실인데도요……. 그리고 세자 저하께서 미쳤다고 제게 그러실 리가 없지 않습니까. 아니거든요. 그러신 적 없거든요.

 

  그러니까 그 불길하게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검붉은 오러 좀 거두어주십사 청해보려 했던 아르센은 몇 마디 말을 뱉기는커녕 입을 꾹 다물었다. 보름 전에 목격했던 어느 광경이 재수 없게도 머릿속에 퍼뜩 떠오른 탓이었다. 호수에서 한가득 쏟아진 물을 맞아 촉촉하게 젖은 얼굴을 하고 있었던……. 검붉은 오러가 예리한 칼날이 되어 목전까지 들이닥치는 환상 속에서 아르센은 재빨리 머리를 저어 그 끔찍한 상상을 훌훌 털어내었다. 그리고 발칸의 부군단장직을 역임하면서 눈칫밥을 먹는 데는 이 골이 난 사람답게 잽싸게 세 치 혀를 놀렸다.

 

 

  "세자 저하께서 귀애하시는 건 왕자님뿐이시잖습니까."

 

 

  그리고 전 집에 코코 아빠 있습니다.

 

 

 

*

 

 

 

  "형님께서 하신 모든 행동을 일컬어 유혹이라 하던데요. 헤르츠 경이."

  "……."

  "혹 사실입니까?"

 

 

  사실이라면, 아우님은 어쩔 건데. 플란츠는 입을 꾹 다물었다. 급작스레 예고도 없이 들이닥친다 싶었더니 대뜸 하는 말이란 게 저거였다. 마음을 고백한 지 반 년이 지났건만 칼리안은 여전히 손을 잡고 입을 맞추는 것에만 만족하는 형국이었다. 그렇지만 칼리안이 만족했을지언정, 혹은 만족하지는 못했으나 소드 마스터이자 연세 지긋하신 아우님의 눈으로 보기에는 마냥 어리고 연약하기만 한 나의 형님 저하를 생각하여 자신의 욕망을 꾹꾹 내리누르고 있었을지언정, 어찌되었건 간에 플란츠는 만족하지 못했다. 그래서 속된 말로 밥상은 내가 차려 놓을 테니 너는 안심하고 먹기나 하라는 뜻에서 이런저런 낯간지러운 행동을 일삼았던 것이건만.

 

 

  "형님께서 이토록 아무 말씀도 없으신 걸 보니, 아무래도 헤르츠 경이 한 말이 진짜였나 보네요."

 

 

  나의, 형님께서……. 풉, 큭, 하하, 아하하하……. 웃음을 겨우겨우 눌러 참는 모양새였던 칼리안은 급기야 배를 움켜쥐고 허리를 꺾어가며 말 그대로 숨이 넘어갈 듯이 웃기 시작했다. 화사한 얼굴에 습관처럼 웃음을 매달곤 하는 칼리안이 이처럼 포복절도하는 경우는 대체로 머리끝까지 화가 났을 때뿐이었다. 그 때문에 혹여나 제 저의를 드디어 알게 된 칼리안이 화가 난 건 아닌가 싶어 플란츠가 입술을 열려던 순간, 칼리안이 하도 웃어 눈꼬리에 맺힌 눈물을 손가락으로 닦아내며 입을 열었다.

 

 

  "나만 몰랐네요.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다들 아는데, 나만 몰랐어. 심지어 형님께서 날 속이려고 한 것도 아니었는데……."

  "……다 웃었으면, 그만 웃지."

  "아직이요. 조금만 더요."

  "……나가."

  "화내지 마세요."

  "아우님이 여기 있을 거면, 내가 나가지."

 

 

  그런 뒤 플란츠는 정말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그대로 문밖을 빠져나갈 심산이었던 플란츠의 몸을 붙든 건 칼리안의 단단한 손이었다. 그간 자신이 벌인 모든 행적이 뒤늦게 무안함으로 다가오는 탓에 제대로 얼굴도 마주치지 못하는 플란츠를 순식간에 제 품에 가득 가둔 칼리안이 쏟아지는 별처럼 황홀한 음성으로 속삭였다.

 

 

  절 그렇게 원하셨습니까? 형님.

 

 

  플란츠는 연분홍빛 입술만 지그시 깨물었다. 고작 그 말 하나만으로도 뒷덜미에 홧홧하게 열이 오르는 듯했다. 빠져나가고자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든지 자신을 가둘 두 팔을 풀어 줄 동생이라는 걸 알면서도, 칼리안의 두 팔이 만들어 낸 달콤한 감옥에 기꺼이 자신을 파묻기로 한 플란츠가 한참 뒤에 고개를 끄덕였다.

 

 

  "……원했어."

  "저를요."

  "그래. 아우님을."

 

 

  좀체 자신의 바람을 날 것 그대로 소리 내지 못하는 사람의 입에서 새어 나온 지극히 사랑스러운 욕망이었다. 매끄러운 가죽으로 된 검은색 장갑을 낀 손이 플란츠의 뺨에서부터 쇄골을 거쳐 부끄러운 줄 모르고 풀어헤친 가슴팍 사이로 미끄러지듯이 기어들어 갔다. 자신의 손조차 닿아본 적 없는 가슴을 농치듯 건드리는 섬뜩한 감촉에 플란츠는 어깨를 움찔 떨며 가만히 주먹만 그러쥐었다. 그 반응을 달갑게 음미한 칼리안이 귓불을 자근자근 깨물며 물었다. 제가 이렇게 해드리기를 바라셨어요? 살갗 위에 불씨가 화르륵 올라붙는 것만 같은 목소리였다. 플란츠는 침을 꿀꺽 삼켰다가 이번에도 고개를 주억거렸다.

 

 

  "너무 늦게 형님의 바람을 알아차린 불민한 아우를 용서하세요."

  "읏, 잠깐……."

  "그 대신, 그간 미련한 아우를 기다리며 인내하셨던 시간이 서럽다 여기시지 않을 만큼 제가 충분히 사랑해드릴 테니까요."

 

 

  단단한 두 팔로 플란츠를 사뿐하게 안아 올린 칼리안이 한 걸음을 떼었다. 소리조차 나지 않는 발걸음이 향하는 행선지는 명확했다. 졸지에 칼리안의 품 안에 얌전히 안겨 침대까지 이동하게 된 플란츠였지만 새빨갛게 물이 든 입술이 불만을 토해내는 일은 없었다. 쓸데없는 말을 내뱉으며 시간을 낭비하기엔 지금부터 이어질 시간이 너무나도 소중했으므로.

 

  성큼성큼 걸어 한달음에 침대에 도착한 칼리안은 푹신한 이불 위에 플란츠를 고귀한 보석처럼 조심스레 누였다. 가느다란 머리카락이 버석한 이불 위로 소란하게 흩어지는 감각에 플란츠는 저도 모르게 몸을 굳혔다. 두려우세요? 그 어떤 슬픔마저도 모조리 어루만져 줄 것처럼 감미로운 음성에 색소가 옅은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플란츠의 눈앞에 선 칼리안의 등 위로 달빛이 소낙비처럼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눈이 부신 달빛 사이로 드러나는 화려한 얼굴에 미처 숨기지 못하는 정욕이 그림처럼 선명했다.

 

 

  "……아니."

 

 

  정말이지 두려울 건 없었다. 플란츠가 바라마지 않았던 것들이 지금 이루어지려 하고 있어서가 아니라, 처음부터 지금까지 칼리안이 플란츠에게 두려움의 표상으로 다가왔던 적은 한 번도 없기 때문이었다. 그는 늘 선명한 빛 같은 것이었다. 강인하고 아름다우나 어쩐지 쓸쓸하게도 여겨지는 분명한 빛이었다.

 

  플란츠는 칼리안을 향해 팔을 뻗었다. 그 언젠가 두 사람분의 목숨을 손에 들고 칼리안을 향해 손을 뻗었을 때처럼, 그러나 평온한 죽음을 바랐던 그때와 달리 숨이 막히는 애정을 원하며 뻗어 나간 손에 칼리안의 손이 빈틈없이 겹쳐졌다. 제가 어떻게 해드리기를 원하세요? 칼리안이 몸을 수그리자 플란츠가 알고 있는 것을 통틀어 그 무엇보다도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세계가 플란츠의 두 눈에 가득 들이찼다. 플란츠는 진득한 욕망이 붉게 스민 입꼬리를 자신만만하게 들어 올렸다. …사랑해줘. 내가 기다린 만큼. 뻔뻔하다 싶을 정도로 내뱉어진 적나라한 요구이자 고백에 칼리안이 플란츠의 콧잔등에 가볍게 입술을 대었다.

 

 

  "예. 나의 형님 저하께서 원하신다면, 원하시는 대로, 얼마든지."

 

 

  칠흑 같은 그림자가 플란츠의 몸을 가득 덮었다. 그러고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입술이 맞닿았다. 눈을 깜박이는 그 찰나에 서로의 얼굴을 보지 못하는 것조차 아까웠기에 두 사람은 눈조차 감지 않고 서로를 탐닉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곧게 뻗은 두 손이 칼리안의 등을 껴안고 그의 등을 사선으로 가로지르는 흉터를 애틋하게 더듬어 나갔다. 이것은 지키고자 하는 자를 지켜 낸 자의 긍지이며 동시에 사랑의 흔적임을, 그리하여 결코 검사의 수치 따위가 아님을 플란츠는 무척 잘 알고 있었다.

 

 

  "제 등을 너무 사랑하시는데요."

  "아까워서."

 

 

  입술을 가깝게 맞붙인 상태에서 태연하게 뱉은 말에 칼리안이 숨죽여 웃었다. 이윽고 약속처럼 숨과 숨을 빼앗고 마음과 마음을 나누는 입맞춤이 재개되었다. 목을 타고 넘어가는 타인의 타액마저 달게 느끼며 두 사람은 서로를 거세게 끌어안았다. 습기 찬 숨소리와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에 이어 서로의 다리가 난잡하게 얽히는 소리가 고즈넉했던 방안을 빈틈없이 메워나간다. 이제부터는 온전한 연인의 시간이었다.

 

 

 

2019.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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