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리플란] Love Story
2차/적왕사2020. 9. 13. 01:09
- 행복이 님과 함께 한 사망 소재 합작입니다.
- 모든 것 날조 주의
- '뒤돌아 보면 항상 네가 있었으면 좋겠다고'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합작이었는데 당신으로 수정.
뒤돌아 보면 항상 당신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그런 오만에 가까운 바람을 가졌던 적이 있다.
*
달빛이 온 사방에 고루 내리깔리는 밤이었다. 플란츠는 한 손으로 책장을 넘기며 다른 손으로는 규칙적으로 탁자를 두드렸다. 자신도 모르는 새에 누군가로부터 옮은 버릇은 자꾸만 부정적인 쪽으로 번져가려는 생각을 덜어내는 데는 별 도움이 되지 않았지만 초조한 마음을 가라앉히는 데는 그럭저럭 도움이 되고 있었다. 손끝이 탁자를 한번 두드릴 때마다 시린 물 같은 달빛이 탁자의 끄트머리로 흘러내렸다.
아까부터 종이 위의 활자를 건성으로 읽어 내리며 탁자 위에 곱게 놓아둔 수정판을 힐끗힐끗 보았지만 수정판이 반짝일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투명한 판 위에 드리워진 완벽한 적요에 짧지만 무거운 한숨이 책장 위로 떨어져 내렸다. 붙들고 있는 책장의 마지막 문단에 시선이 가닿음과 동시에 다음 장을 넘기려던 손길이 그대로 멎었다. 마음이 소란했던 탓에 도무지 내용이 눈에 들어오지 않아 관성적으로 읽어 내려가고 있었다고는 하나, 이제는 단순한 획의 조합인 활자조차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종이에 쓰인 카이리스의 언어가 겪어보지도 못한 고대 세크리티아의 언어처럼 난해하고 해괴하게만 느껴졌다. 결국 플란츠는 가름끈으로 표시조차 하지 않고 보고 있던 책을 그대로 덮으며 수정판을 주시했다. 여전히 수정판 위로는 물그림자 엇비슷한 것조차 어른거리지 않고 있었다.
자신의 생일 날 칼리안에게 선물 받은 것을 다시 칼리안에게 선물해 주었더니, 칼리안은 일주일 남짓한 여정에 오르면서 수정판을 넘기고 갔다. 가깝지만 먼 타국이 그리울 때 한 번씩 들여다보라고 돌려준 물건을 왜 다시 제게 주냐고 눈으로만 물었더니 칼리안은 화사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제가 선물해 드리고 형님께서 돌려주신 거랑은 다른 겁니다. 제가 없는 동안 적잖이 외로워하실 것 같아서요. 마침 얼마 전에 새로이 수정판을 얻을 기회가 있어서 다행이지요. 이처럼 제가 멀리 가더라도 형님께서 제 얼굴을 보실 수 있으니.
과연 짖기 좋은 기회만 있다 싶으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잘도 짖으시는 아우님이었다. 플란츠는 고운 미간을 사정없이 찡그리며 썩 꺼지라는 뜻을 표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저 없는 동안 울지 마시고요. 마지막까지 온 힘을 다해 짖은 칼리안은 그 말을 남기고 레이븐의 등에 올라타 훌쩍 왕성을 나섰다.
그렇게 말했으면 연락을 하던가.
엄밀히 말하자면 연락이 아주 없었던 건 아니다. 칼리안은 처음 며칠간은 착실하게도 수정판에 얼굴을 내비쳤다. 한가로이 루시와 안네의 털을 쓰다듬으며 시간을 보내던 중에 불쑥 수정판에 나타난 얼굴에 기겁하니 들려오는 말이라는 게 가관이었다. 왜 그렇게 놀라세요. 제가 말씀드렸잖습니까. 제 얼굴을 못 보시면 적잖이 외로워 하실 것 같아서 드렸다니까요. 그거. 그걸 시작으로 칼리안은 아침이고 점심이고 저녁이고 가리지 않고 멍멍 짖는 데 여념이 없었다. 듣다 못한 플란츠가 그만 좀 짖으라고 한마디를 해보았지만 칼리안은 짖는 걸 멈추지 않았다.
말씀은 그렇게 하시나, 걱정하시리라는 걸 압니다.
칼리안의 입에서 나온 문장에는 일종의 확신이 깃들어 있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플란츠는 그토록 내보이고 싶지 않던 치부를 들킨 기분에 아무런 답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러자 칼리안은 모양 좋은 입매를 유려하게 휘며 말했다.
제 얼굴이 보고 싶으셔도, 형님께서는 말씀하시지 않을 분임을 알기도 하고요. 구실을 만들어 드리는 겁니다, 저. 그러니 그냥 모르는 척 이용하세요.
그런데 그토록 열심히도 짖어대던 놈이 사흘 전부터는 갑자기 연락이 되지 않았다. 이제 조금 있으면 지그프리드령을 지나 시스파니안의 둥지에 도착한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칼리안으로부터의 연락은 전무했다. 처음에는 둥지에 도착해서 그런 모양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만 하루가 다 가도록 기별이 없자 불안함이 그 부피를 키워갔다. 심장을 내걸고 맺은 인이 아직 건재하다는 걸 알면서도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닌가 싶었다. 명석한 두뇌는 칼리안에게 일어났음직한 일들을 끊임없이 상상하고 재구성하며 불길한 상상을 그물망처럼 넓혀 나갔다. 루시나 안네의 털을 쓰다듬거나 그들과 놀면서 의식적으로 생각을 흩뜨리려 해도, 다른 생각이 일절 들지 않게끔 고의적으로 제 몸을 혹사하며 불길한 상상을 무위로 돌리려 해도 별 소용이 없었다.
그러기를 벌써 나흘이었다. 속은 타들어가는 촛불의 심지처럼 다 타다 못해 재가 된 지 오래였지만 칼리안이 닷새가 되도록 자신에게서 기별이 없으면 그때 움직여 달라고 말했으므로 섣불리 움직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대체 어디서 뭘…….”
부지불식간에 그런 말이 새어나온 순간이었다. 아마도 테라스 쪽에서 불어온 것만 같은 가느다란 바람이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플란츠는 그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테라스로 향했다. 고작 열 걸음 남짓한 거리를 가로질러 테라스로 가기까지 가슴이 미친 듯이 뛰었다. 심장이 꼭 귀에서 박동하는 듯했다.
플란츠는 무섭도록 뛰는 가슴을 진정시킬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테라스를 내다보았다. 그 즉시 안도와 허탈함을 반반 섞은 숨이 새어나왔다. 플란츠의 예상대로, 그리고 실로 다행이게도 난간에 새카만 머리통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플란츠는 한쪽 눈썹을 찡그리며 팔짱을 꼈다. 요 며칠 간 그의 속을 새까맣게 태워 낸 아우님의 멋들어진 귀환이었다.
“뭐야.”
“화나셨어요.”
“아니.”
“제가 그래도 이렇게 왔잖아요.”
역시 거짓말은 못 하지만 남 거짓말 하는 거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눈치 채는 아우님이었다. 화가 나지 않았다면 솔직히 거짓말일 테다. 화를 낼 만한 계제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무언가 사정이 있으리라고 짐작했으면서도 울컥한 순간이 없다고 한다면 거짓말이었다. 사람이 화를 내서는 안 되는 상황에서 불합리하게 화를 낸다는 건 그 밑에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한 공포가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플란츠는 칼리안이 없는 동안 불쑥불쑥 고개를 치켜 들었던 공포를 침 하나 삼키는 것으로 내리 누르며 고개를 까딱했다. 난간에 매달려 대롱거리는 놈이 위태로워 보인 탓이다. 칼리안은 그제야 얼굴을 활짝 펴며 난간 너머로 가볍게 몸을 날렸다. 그렇게 위태로운 자세로 난간을 붙들고 서서는 허락을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플란츠는 말없이 테라스 옆의 벽에 기대 섰다. 폴짝하는 소리가 날 만큼 가볍게 난간을 뛰어 넘어 4층으로 올라 온 칼리안이 새실새실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저 안 보고 싶으셨어요?”
물을 머금은 루비처럼 영롱한 두 눈이 도르륵 굴러 플란츠를 향했다. 플란츠는 자신을 빤히 보는 그 두 눈을 힐끗 쳐다 보았다가, 작게 숨을 내쉬었다. 보고 싶지 않았느냐고.
“차라리 그랬다면.”
좋았겠지. 속삭이는 듯한 음성이 조도를 한껏 낮춘 실내 사이로 안개처럼 흩어졌다. 보고 싶지 않았다면 좋았을 것이다. 빌헬름 관에서 업무를 볼 때마다 마주쳐야 하는 미친 따까리로부터 건강에 이상이라도 생기신 거 아니냐는 헛소리를 들을 일도 없을 테고, 르메인으로부터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걱정 된다는 말을 들을 일도 없었을 테니까. 어디 그뿐일까. 핏물처럼 꾸덕하게 말라 붙는 불길한 예감에 속을 한가득 태워 낼 일도 없었을 테다. 한숨처럼 흩어진 말에 칼리안은 머쓱한 얼굴로 웃으며 플란츠의 곁에 섰다.
“약속 드린 것보다 일찍 돌아오려고 했는데, 일이 생겨서요.”
“일?”
칼리안이 시스파니안의 둥지를 찾아간 것은 최근 각지에 나타나기 시작한 파편 때문이었다. 몇 년 전, 세크리티아의 바다에서 파편이 발견되었을 때 아르나이젤은 그걸 시스파니안에게 전해주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칼리안은 아르나이젤의 부탁을 따라 카이리스에 돌아오자마자 시스파니안의 둥지부터 찾았다. 무척 슬픈 눈을 하더군요. 지고의 고룡이. 칼리안은 씁쓸한 얼굴로 그리 말했다. 그는 지극히 사려 깊은 존재였으므로 자신이 만들었던 것이 후대에도 막대한 영향을 끼치는 것을 지켜 볼 수 없었던 것이리라.
고작 한 사람의 몸으로 짊어지기에는 그 무게가 너무 무겁구나.
파편을 건네 받으며 시스파니안은 그리 말했고 칼리안은 그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자신 외에는 달리 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앞으로도 무언가 일이 생기면 지금처럼 찾아오겠다는 말을 할 수 있었을 따름이었다.
그 일이 있고 대륙은 한동안은 잠잠했다. 그런데 갑자기 카이리스나 세크리티아에서 파편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우연이라기보다는 무언가의 징조라고 보는 편이 옳았다. 그래서 칼리안은 지체없이 둥지를 찾았다. 혹여 뭔가 조언을 얻을 수 있을까 해서. 그런데.
“만나지 못했거든요. 시스파니안을.”
정작 그렇게 찾아간 둥지에서 칼리안은 시스파니안을 만나지 못했다. 시스파니안의 검은색 머리카락 하나 손에 쥘 수 없었다. 지극히 위대한 그가 칼리안이 둥지로 왔다는 것을, 둥지로 오리라는 것을 몰랐을 리가 없다. 그런데도 시스파니안은 모습을 내비치지 않았다. 심지어 그의 의지조차도. 시간의 흐름이 무의미하게 여겨지는 공간에서 기다리다 보면 나비라도 찾아올까 싶었으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나타나지 않는 시스파니안을 하염없이 기다리던 칼리안은 별 수 없이 발길을 돌려야만 했다. 헌데 이상한 일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그것뿐만이 아니에요. 일순간이지만 제 몸을 구성하고 있던 서클이 희미해지는 걸 느꼈습니다.”
“희미해지다니.”
“아주 한 순간이었지만, 심장에 겹겹이 쌓인 고리가 다시 오러로 화하는 듯한 기분을……. 받았다고 하면 믿으시겠습니까.”
그래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수정판에 마력을 불어 넣어보려 했는데 역시나 되지 않았다고 했다. 다행히 둥지에서 나왔을 때는 다시 마력이 돌아온 듯했지만, 수정판은 제 기능을 상실한 것 같았어요. 그러며 칼리안은 검게 탄 수정판을 플란츠의 앞에 내밀었다.
“연락을 드리지 못한 건, 이 때문입니다. 죄송해요.”
“……둥지에서 바로 돌아왔다고 했는데.”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둥지에서 바로 돌아온 것치고는 시간이 너무 걸리지 않았던가. 지그프리드령에 이동마법진을 설치해 두었으니 둥지에서 바로 돌아왔다는 말이 사실이라면 일찍이 도착하고도 남을 거리였다. 플란츠가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 알아 챈 칼리안이 내놓았던 수정판을 주머니에 집어 넣으며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작동하지 않았습니다.”
“뭐?”
믿을 수 없는 얘기였지만 믿는 수밖에 별 도리가 없었다. 플란츠는 침음하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 시스파니안이 사라졌다. 심장에 겹겹이 쌓인 고리가 다시 오러로 화하는 듯한 기분을 받았다. 이동마법진이 작동하지 않았다. 일련의 일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가늠해보려 했지만 무언가 사고를 꽉 틀어막고 있는 듯했다. 플란츠는 감았던 눈을 떴다. 그의 마음을 다 안다는 듯 칼리안이 흐트러진 카디건을 매만지며 조근조근 말했다.
“너무 심려치 마세요.”
“…….”
“무슨 일이 일어나건, 제가 어련히 알아서 형님을 살려드리려고요.”
칼리안은 농을 치듯 가벼운 투로 말했다. 그건 칼리안 나름의 불안을 덜어내주려는 배려였고 다정함이었다. 오지 않는 칼리안만 하염없이 생각하느라 옷 매무시를 정돈할 정신조차 없었다는 사실을 여실히 드러내듯, 여기저기 루시와 안네의 털이 달라붙은 채 잔뜩 흐트러진 카디건을 정돈해주던 칼리안의 손길이 목덜미에 닿았다.
그러고 보면 얼굴이 지나치게 가까웠다. 플란츠는 순간적으로 얼마 전의 일을 떠올렸다. 칼리안이 난데없이 소원 하나만 들어주면 안 되겠냐고 한 적이 있었다. 플란츠는 인상을 찡그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사냥 내기에서 이겨서 들어달라고 했던 소원은 분명 하나였을 텐데. 그 소원이라면 이미 말하지 않았나. 이런 뜻이었다. 실로 사려깊은 아우님이 말한 소원은 나의 형님 당신께서 르메인이 보낸 편지를 열어 보았으면 한다는 것이었고 플란츠는 그 말을 따랐다. 그러니 네가 말했던 소원은 그때 그걸로 끝 아니냐고, 그렇게 생각하는 머릿속을 읽은 모양인지 칼리안이 눈꼬리를 둥그스름하게 만들며 입을 열었다.
무거운 소원 말고 가벼운 소원이요. 무거운 소원 하나 들어 주셨으니 가벼운 소원 정도는 형님 된 도리로 들어주실 수도 있는 거 아닙니까.
다분히 억지스러운 얘기였고 개소리였지만 플란츠는 짖지 말라고 일갈하는 대신 파릇파릇한 식물의 잎사귀 같은 눈을 나른하게 뜨며 턱짓했다. 어디 한 번 말해보라는 뜻이었다. 칼리안의 말대로 무거운 소원 하나 들어줬으니 가벼운 소원쯤이야 형님 된 도리로 들어주지 못할 것도 없었다. 비록 아직도 칼리안은 플란츠의 소원을 들어주기 전이었지만(플란츠가 아우님도 아우님 답게 살라는 말을 했을 때 그건 형님 저하 당신을 위한 소원이 아니라며 기각한 바 있다), 그래도 자신이 형이었으니까. 그까짓 소원 하나쯤이야 조금 밑지고 손해보는 기분을 감수하고서라도 형님 된 도리로 너그럽게 들어주지 못할 것도 없었다. 그래서 허락했다.
제게 한 번만 입술을 빌려주실 생각 없으십니까?
그랬더니 칼리안은 그런 말을 하며 또 짖었다. 지나치게 가까운 거리에 급작스레 그날의 일이 떠오른 나머지 플란츠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 행동에 아, 하고 뭔가 알겠다는 것처럼 말을 뱉은 칼리안이 뒤로 몸을 물리며 플란츠에게서 떨어졌다.
“제가 실례했습니다.”
“됐어.”
“일단 오늘은 밤이 늦었으니, 이만 주무세요.”
플란츠는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첼과 함께 리베른으로 떠났던 앨런이 내일 중으로 돌아오겠다 했으니 일단 그가 돌아온 뒤에 무엇이든 얘기를 나눠보는 게 좋았다. 앨런은 워프를 쓸 수 있으니 카이리스까지 눈 깜박할 사이에 도착할 것이다. 칼리안도 같은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플란츠는 불길한 마음이 덤불처럼 스멀스멀 자라나려는 걸 억지로 잘라내며 난간 너머로 훌쩍 몸을 넘기는 칼리안을 오래도록 바라보다 등을 돌렸다.
*
“제게 한 번만 입술을 빌려주실 생각 없으십니까?”
“뭐?”
“……제가, 명확하게 하고 싶은 게 있어서요.”
이건 정진정명 개소리였다. 플란츠가 들었던 개소리 중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개소리였다. 플란츠는 그 왈왈 짖는 개소리에서 칼리안이 말하지 않았던 것까지 기민하게 짚어냈다.
제가 형님을 좋아하는 거 같긴 한데 아직 마음에 확신이 없습니다. 그런데 입을 맞춰 보면 알 것도 같아서요. 그러니까 제가 한 번만 입을 맞춰 봐도 되겠습니까?
고백이라기엔 무례했고 소원이라기엔 터무니없었다. 플란츠는 눈을 세모꼴로 떴다. 그러고는 작작 짖으라고 했더니 이제는 사람의 언어로 말하는 법도 잊은 모양이라고 한마디 하려 했는데 그럴 수가 없었다. 칼리안이 꼭 남의 손을 타다 내쫓긴 강아지처럼 울망거리는 눈으로 플란츠를 본 탓이다. 한겨울 북풍보다 매서운 음성으로 휘감기려 했던 말은 그 순간 갈 곳을 잃고 목구멍 안쪽으로 고이 침잠했다. 플란츠는 여전히 못마땅한 얼굴이긴 했으되 조금 누그러진 표정으로 칼리안을 보았다가 한참 뒤에 가라앉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 해.”
플란츠는 본디 곱게 휘어지는 버들처럼 유순한 성정을 가지고 있었으며 칼리안에 한해서는 한없이 물러지는 경향이 있었다. 그런데 원하는 대답을 얻었으면 짖기나 할 것이지 칼리안은 떠름한 표정으로 자신의 입매만 매만지다가 운을 뗐다.
“형님, 제가 저번에도 말씀드린 거 같은데……. 저에게는 싫으면 싫다고 하셔도 됩니다. 싫으면 싫다, 마음에 안 드는 건 마음에 안 든다, 개소리면 개소리다, 이렇게 말씀하셔도 된다고요. 아니면 모르는 사람이 이런 부탁을 해도 지금처럼 아무렇지 않게 들어주실 생각이셨습니까?”
플란츠는 소파에 몸을 깊숙이 파묻으며 다리를 꼬았다.
“일어나지도 않는 일, 가정하는 취미는 없어서.”
하지만 적어도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칼리안이 아닌 다른 사람이 이런 허무맹랑한 부탁을 했다면 그 즉시 면상에 주먹을 날리거나 검집으로 턱주가리를 날려 버렸으리라. 그러나 거기까지 말해 줄 의무는 플란츠에게 없었다.
“형님.”
“계속 짖을 거면.”
“……실례하겠습니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칼리안이 몸을 일으켜 제 쪽으로 다가오는 걸 보며 플란츠는 눈을 느리게 감았다. 곧 소파에 한 사람분의 무게가 더 실리는 게 느껴졌다. 얼굴에 닿는 숨결이 무척 가까웠다. 당장 입술에 따듯한 기운이 돌 거라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자 플란츠는 그사이 감았던 눈을 슬며시 떴다. 칼리안이 한쪽 무릎을 소파에 대고 몸을 이쪽으로 기울인 채 눈조차 깜빡이지 않고 있었다. 그 어느날처럼 칼리안의 그림자가 온 몸을 가득 덮은 가운데 새빨간 눈이 플란츠를 빈틈없이 직시했다.
형님, 눈을 감으셔야죠.
내뱉는 숨이 그대로 엉킬 것처럼 가까운 거리에서 칼리안이 속삭였다. 피부 위로 따듯한 숨이 무게감 없는 천처럼 올라 붙었다. 익숙지 않은 느낌에 플란츠는 자신도 모르게 제 쪽으로 다가붙는 칼리안의 옷깃을 꾹 쥐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다른 사람과 입술을 겹쳐 본 경험 따위가 있을 리 없었다. 칼리안의 입술은 무척 느리게 내리 앉았다. 숨과 숨이 맞닿은 순간 뱉어내지 못한 말이 안쪽에서 헛돌았다.
“이제 됐습니다.”
입맞춤은 짧았다. 칼리안은 건조한 목소리로 끝을 알렸다. 플란츠는 기나긴 꿈에 잠겨 있던 사람이 그제야 깨어난 것처럼 흠칫 놀라며 저도 모르게 붙들고 있던 옷깃을 놓았다.
“……그래서, 어떠셨는지.”
물으며 상기했다. 필경 서느랗게 내리 앉아야 할 입술이 어째서인지 너무나도 따듯했다고. 그 사실에 누군가 날붙이로 흰 캔버스를 수직으로 찢어내듯 마음이 찢기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알았다. 자신이 이러한 때를 꿈에 그리듯이 바라고 있었다는걸. 칼리안은 거짓말을 못 하지만 거짓말 하는 것 하나만은 기가 막히게 알아차리는 아우님이었다. 언젠가부터 칼리안을 바라볼 때면 연둣빛 눈 위를 스치고 지나가는 열망을 그가 읽어내지 못했을까. 그럴 리는 없다고 플란츠는 생각했다. 칼리안이 웃고 있을 때 실은 그가 슬픔에 잠식당하고 있다는 걸 플란츠가 알아차리는 것만큼이나, 칼리안은 플란츠의 감정을 알아차리는 데 능했으니까.
그러니 이것은, 자신의 마음조차 꺼내놓기를 저어하며 제 마음을 외면하고 스스로를 속이려는 미련한 형님에게 아우님이 기회를 준 것과 다를 게 없다. 그는 언제나 플란츠에게 그럴싸한 계기와 구실을 만들어 주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플란츠는 한 번의 추억으로도 평생을 살 수 있는 사람이었다.
일평생 많은 것을 바란 적이 없는 사람은 이번에도 자신의 감정을 배반하고 익숙하게 등을 돌린다. 학습화 된 체념이 빚어낸 결말이 아니라 욕망한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플란츠는 칼리안에게 자신이라는 짐을 얹어주고 싶지 않았다. 칼리안이 아무렇지 않게 손을 내민다고 해도, 그 손을 맞잡아 주길 원하고 있다고 해도. 플란츠는 영원 따위를 믿지 않았고 내일을 장담할 수 없는 자들 간의 연애는 시작도 전에 끝이 완성된 이야기나 마찬가지였다. 달콤하고 꿈 같은 결말은 찾아올 가능성이 우스울 정도로 희박하다는 점에서 이러한 연애는 희극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인생은 언제나 희극과는 거리가 멀지 않았던가.
불확실한 미래 속에서 홀로 남겨지는 자신은 괜찮다. 하지만 언젠가의 앞날에 그가 홀로 남겨지게 되었을 때, 한때 연인이었던 자신을 추억하며 살길 원하지 않았다. 너는 다정한 사람이었으니까.
무언가 오가긴 했으되 누구도 이름을 붙일 수 없는 입맞춤이었다. 플란츠는 입고 있던 카디건의 소맷자락으로 입가를 슥슥 닦았다. 어느 샌가 몸을 바로 하고 처음처럼 맞은편에 가서 앉은 칼리안이 눈꼬리를 애매하게 늘어뜨리며 어설프게 웃었다.
“아무 느낌 없어서, 된 거 같습니다.”
해가 지기에는 아직 이른 시간이었는데도 칼리안의 얼굴에 노을빛이 가득했다. 아우님은 정말 거짓말을 못하시는군. 목구멍 위로 올라온 문장은 끝끝내 입 밖으로 튀어 나가지는 못하고 다만 혀뿌리만 무겁게 짓눌렀다. 플란츠는 점점 묵직하게 가라앉는 혓바닥을 숨기며 애꿎은 입술만 물었다 놓았다.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정오의 햇살 아래에서 빛무리 같은 먼지들이 부유했다. 플란츠는 풍성하게 자란 칼리안의 속눈썹이 팔락이면서 흰 뺨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는 것을 보았다. 이 순간에 영원히 붙들려 있어도 좋겠다 싶을 만큼 아름답고 평화로운 광경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플란츠의 바람을 배반하듯, 검게 칠한 캔버스 위에 흰색 물감으로 덧그린 것처럼 선명했던 장면은 삽시간에 그 위에 물을 쏟아 부은 듯이 흐릿해지더니 이내 파도에 휩쓸리는 것처럼 번지며 흩어졌다. 플란츠는 이제 사방이 검게 물든 가운데 혼자서만 형체를 유지하고 서 있었다.
그 언젠가 보았던 은빛의 장막조차 드리워지지 않은 온전한 어둠. 그 언젠가 보았던 참상과는 달리 빛조차 들어오지 않는 풍경은 책에서나 봤던 깊은 해구 같았다. 물 밑에 가라앉아 본 적은 한 번도 없으니 낯설어야 하는데 마냥 낯설지만은 않았다. 칼리안이 태양보다도 찬란하게 빛을 발하는 헤이시아 궁을 무너뜨리기 전까지 자신은 이와 같은 곳에서 두 무릎을 끌어안고 주저앉아 있지 않았던가. 명멸하는 빛처럼 깜박이던 연둣빛 눈동자에 어둠이 스민 순간이었다.
“형님.”
플란츠는 눈을 떴다. 칼리안이 앞에 있었다.
마지막으로 보았던 것과 별반 다를 것 없는 행색이었으나 칼리안에게서는 감추지 못하는 피냄새와 희미한 흙냄새 따위가 났다. 그 어디에도 흙이나 피 같은 건 묻어 있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몸을 일으키자 비도 오지 않았는데 누군가 머리 한 구석을 쑤석이는 것만 같은 두통이 불시에 온 몸을 엄습했다. 플란츠는 관자놀이를 손으로 짚으며 칼리안이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오늘은 며칠이며 자신이 얼마나 잠들어 있었냐고 묻는 것보다 칼리안의 입이 열리는 게 빨랐다.
“꼬박 일주일을, 미동조차 하지 않고 주무시더군요.”
“내가, 그랬다고.”
“네.”
많이 피로하셨던 거겠지요. 그렇게 말하는 칼리안의 목소리에는 피로함이 묵은 먼지처럼 묵직하게 묻어났다. 너는 내가 잠든 사이에 어디서 뭘 했냐고 플란츠는 묻지 않았다. 굳이 묻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만나고 온 모양인데. 어머니 나무.”
칼리안의 붉은 눈동자가 일순 크게 뜨였다. 그토록 열심히 클린으로 몸에 묻은 흔적을 지워댔는데 어떻게 알아 본 것이냐고 묻는 듯이. 정말이지 거짓말에는 서툰 아우님이었다. 플란츠는 화급히 제 몸을 돌아보는 칼리안에게 여상히 말했다.
“깨끗하니까 걱정하지 말고.”
“……그럼.”
“익숙한 냄새가 나서.”
피 냄새 말고. 사실 희미한 피 냄새 같은 것도 났지만 굳이 그건 아니라고 덧붙였다. 안 그러면 연약하고 어린 형님을 끔찍하게 생각하는 아우님께서 또 자신을 책할지도 몰랐으니까. 그 지긋지긋한 흙 냄새가 나잖아. 그렇게 덧붙이자 칼리안의 얼굴에 씁쓸함과 안도가 반씩 섞인 이상한 웃음이 떠올랐다.
“그랬군요.”
“그래서.”
“시스파니안은 다가올 날을 대비하기 위해 잠들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축복이 흐려졌다고.”
그런 말을 들었습니다. 칼리안은 무언가를 두려워하듯이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칼리안의 입에서 나온 말이 유리잔에 맺힌 물방울처럼 귓가에 맺혔다가 주륵 흘러내렸다. 플란츠가 어느 정도는 생각하던 일이기도 했고, 그럼에도 내심 사실이 아니길 바랐던 일이기도 했다. 시스파니안의 축복이 모든 걸 치유해주지는 않는다지만 그래도 그간 어느 정도 자잘한 몸의 이상 같은 건 적당한 선에서 치유해주곤 했다. 축복이 건재하다면 플란츠가 난데없이 과로로 쓰러지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런데 쓰러졌다. 그리고 칼리안은 시스파니안의 둥지에서 그를 만나지 못했다고 했다. 작동하지 않는 수정판과 이동 마법진. 그 모든 것은 시공간을 뛰어 넘는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다가올 날이라는 건, 종말을 말하는 건가.”
“……하지만 제가 기억하는 것보다 너무 가깝습니다.”
플란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전에 플란츠와 칼리안이 세크리티아에 갔을 때 체이스는 그 참극이 지금으로부터 약 10년 뒤에 일어났다고 말했다. 세크리티아 행으로부터 이제 고작 몇 년이 지났을 뿐이다. 칼리안의 말대로 모든 것이 지나치게 가까웠다. 급작스레 각지에서 나타나기 시작한 파편은 다가올 종말을 대비하라며 위대한 세렌티가 안배해둔 것이었나. 그렇다면 시스파니안이 눈을 감은 것은 다가올 종말을 대비하기 위한 세렌티의 의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실로 이해할 수 없었지만, 본디 한낱 인간은 위대한 신의 손짓조차 이해하기 어려운 법이 아니던가.
“……칼리안.”
플란츠는 눈을 한 번 감았다 떴다. 푸르른 신록을 머금은 눈이 눈두덩이 아래로 사라졌다가 다시 드러났다. 봄의 새순처럼 무르고 부드러운 시선이 아니라, 햇빛을 받아 은빛으로 반짝이는 여름철 잎사귀처럼 형형하고 예리한 시선이 칼리안을 향했다.
“그 자리, 올라도 되지 않나. 이젠.”
나른한 한숨 같은 음성이 침묵을 불러왔다. 칼리안이 카밀론에 입성한 순간부터 르메인이 차기 국왕의 재목으로 칼리안을 선정했다는 건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칼리안은 차일피일 왕위에 오르는 것을 미뤄왔다. 아직은 제가 감당치 못할 자리인 거 같습니다. 카밀론에서 조금 더 국왕 전하의 업무를 거들게 해주시지요. 하지만 남의 공치사를 기리는 데 인색한 귀족들조차 칼리안이 붉은 융단이 길게 깔린 길을 따라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를 만한 재목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었다.
플란츠는 칼리안이 그 자리에 앉는 것을 망설이고 또 주저하는 이유를 알았다. 시스파니안의 축복이 국왕과 그의 직계혈족을 따라 내려오는 신성한 힘인 탓에. 자신이 왕좌에 오르게 되면 자신의 형제인 플란츠에게서는 자연히 그 축복이 사라지리라는 걸 지나온 발자국을 되짚어 보듯 확신하고 있기 때문에. 고작 자신 때문에 붙들린 위대한 걸음이었으나 시스파니안이 잠든 지금은 더는 멈춰 서 있을 이유가 없었다. 다가올 종말을 대비해야 하는 입장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플란츠를 보는 붉은빛 눈동자에 전례 없는 침통함이 그림자처럼 깊게 스며들었다.
“……알고 계셨습니까.”
목소리가 빛 한 점 들지 않는 심해로 가라앉는 것들처럼 무겁게 침잠했다. 플란츠는 온갖 감정이 갈앉은 칼리안의 얼굴을 내다보다가 그리 놀라울 것도 없다는 투로 말했다. 아우님이 그토록 서툴게 변명하시는데, 모르는 게 이상한 거 아니겠나. 어느 한 중간에 붙들린 걸음에 담긴 마음을 안다. 입술을 겹쳤던 그 날 알게 되었던 그 마음이 지금도 유효하다는 것을 안다. 그 비이성적인 결정의 근간에 플란츠 룬 카이리스의 이름이 있다는 걸 안다.
그래서 플란츠는 말했다.
“더는 억지 써 가며 미루실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세자 저하.”
*
칼리안 레인 카이리스의 이름에 위대함을 뜻하는 루가 붙은 건 그 해 겨울의 일이었다. 칼리안은 날 때부터 위정자의 위치에 올라 선 사람처럼 거침없이 국정을 이끌어 나갔다. 시대의 변화를 읽지 못하고 날뛰는 세력들이 없었던 건 아니나 칼리안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근자근 그들의 세를 죽여 놓았다. 그 과정에서 카이리스의 제3왕자였을 시절부터 자신을 따르는 세력들을 착실히 불려온 게 적잖은 도움이 되었다.
동시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다가올 종말을 위한 대비를 착실히 진행해나갔다. 종말이 다가오면 비단 카이리스뿐만 아니라 시스테라 대륙 전체가 위험에 빠지리라는 건 자명한 사실이었다. 칼리안은 원래부터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던 세크리티아뿐만 아니라 역성혁명을 통해 새로 왕위에 오른 세르제인이 있는 텐실은 물론이고, 엘린느의 치세 아래 있는 리베른과도 외교적 합의를 통해 공존관계를 도모했다. 시스테라 대륙의 네 나라는 각자가 시간의 축에 관한 연구를 지속하면서 제온의 동향을 예의주시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나라와 대륙을 위해 부단히도 애를 쓰는 새로운 왕의 노고를 치하하듯 봄이 오자 풍요로운 햇살이 대지를 가득 내리비쳤다. 영지민들의 고충을 헤아려주십사 하는 울부짖음보다는 젊은 국왕의 선정에 감읍하는 얘기들이 미담처럼 거리를 떠돌았다. 제온은 그림자처럼 침묵했고 종말이 다가올지도 모른다는 점만 제외하면 모든 건 추수를 앞둔 들판처럼 완벽해 보였다. 이처럼 한동안 칼리안의 치세는 무사히 이어지는 듯싶었다.
하지만.
“텐실과 인접한 대사막에서부터 검은 기운이 몰려오고 있었다……, 라.”
칼리안은 텐실에서 보내 온 전서구에 매달린 편지를 톡톡 쳤다. 시스파니안이 잠든 이후로 시공간을 넘나들며 사람의 생활을 편리하게 해주었던 것들은 모조리 그 빛을 잃었다. 어째서 모든 마법이 아니라 시공간에 관련된 것들만 무의미해졌는지는 알지 못했으나 수정판도, 반지도, 팔찌도 쓸 수 없었다. 각국은 가장 원초적인 방법으로 서로의 의향과 정보를 전할 수밖에 없었고 거기에는 당연하게도 일정한 시간이 소요되었다. 지금쯤 텐실에서 관측했다는 그 검은 기운이 상당부분 대사막을 뒤덮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칼리안은 편지를 곱게 접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오렌지와 딸기를 비롯하여 각종 말린 과일들을 넣어 만든 초콜릿을 한 입 베어 문 앨런이 입을 열었다.
“선조의 이야기를 기록한 역사서에서 본 기억이 있습니다.”
앨런은 그의 기호에 맞춰 얀이 내어 온 다디단 차를 호록 소리가 나게 마시고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지나치게 빠르게 영그는 곡식과 비정상적인 생장 속도. 일견 신의 축복과도 같은 일이 대륙 전역에서 발생한 직후 사방에서 어둠이 파도처럼 몰려 왔다 했습니다. 그리고 그 어둠이야말로 악신의 징조라 하더군요.”
“다누가 말했던 종말…….”
앨런이 침묵으로 긍정했다. 각지에서 나타났던 파편들, 그것을 칼리안은 전부 회수하고자 했으나 그러지는 못했다. 칼리안이 그 장소에 도달하는 것보다도 더 빠르게 제온의 손길이 미쳤던 때도 있었고 나타났던 파편이 신기루처럼 사라졌던 때도 있었던 탓이다. 제온은 몇 개의 파편을 손에 넣었을까. 시간의 축에서 떨어져 나온 작은 파편 하나만 해도 주위의 시간을 멈추는 어마어마한 힘이 깃들어 있었다. 전부 회수하지는 못했을지언정, 회수한 파편에 깃든 그 막대한 힘을 어떻게든 이용해 불완전하게나마 악신의 봉인을 해제하는 데 성공한 것인가. 의아한 지점은 많았으나 악신의 징조가 스멀스멀 다가오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 하나하나 파헤치며 여유를 부릴 시간은 없었다.
“아버지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초월자들은 불분명한 암시를 주는 것을 좋아하더군요.”
칼리안은 무릎을 손끝으로 톡톡 치다 넌지시 입을 열었다.
“사실, 제가 본 종말과는 그 양상이 다릅니다.”
칼리안이 시스파니안의 부재를 확인하고 돌아온 다음 날, 플란츠는 빌헬름 관에서 업무를 보다 말고 의식을 잃었다. 칼리안은 그 얘기를 아르센으로부터 전해 들었다. 지나친 과로가 원인이 아닌가 싶습니다. 말을 맺으며 아르센은 칼리안의 눈치를 살폈다. 아르센의 말을 듣고 한달음에 체르밀로 달려 온 칼리안은 가급적이면 플란츠의 곁을 떠나지 않으려 했다. 언제나 그랬듯이 플란츠가 깨어날 때까지 그 곁을 지키고 앉아 있으려 했다. 혹시나 완두콩이 눈을 떴을 때 아무도 없는 막막한 어둠을 보고 삶아지면 큰일이었으니까. 그런데 그럴 수가 없었다. 해가 지기 전에는 꼭 돌아오겠다고 했던 앨런이 밤이 되도록 돌아오지 않은 탓이었다.
리베른에서 보낸 전서구가 도착한 건 그날 새벽의 일이다. 어찌된 영문인지는 모르겠으나, 8서클로 구현할 수 있는 마법에 제약이 걸린 것 같습니다. 전서구가 매달고 온 소식은 간략했고 동시에 무시무시했다. 칼리안은 내키지 않는 걸음을 옮겨 다누를 만나러 갔다. 천고가 가도 잊히지 않을 상처를 남겼으므로 칼리안에게 가진 감정이 빈말로라도 좋다고는 할 수 없었을 텐데 다누는 칼리안의 방문을 막지 않았다.
-존재가 빚어낸, 막지 못할 참상을 보라.
그리고 칼리안의 머릿속을 읽어내듯이, 칼리안이 묻지도 않았는데 시스파니안이 부재한 이유에 대해 말해주더니 당연한 수순이라는 양 칼리안에게 보여주었다. 종말을. 사방을 온전히 뒤덮는 암흑을. 그 암흑 속에서 칼리안은 비웃듯이 말했다. 이것이 종말입니까. 고작 이런 것을, 감히 막지 못하리라 확신하는 겁니까. 당신이. 보여주고자 했던 건 그것뿐이었는지 그렇다는 대답을 끝으로 눈이 부신 빛에 휩싸여 추방당했지만, 그때 보여준 광경과 지금의 광경은 확연히 달랐다. 대사막에서부터 어둠이 몰려오는 게 아니었다. 앨런이 말한 대로 사방에서 파도처럼 어둠이 몰아치고, 한순간에 모든 것을 뒤덮었다.
악신의 봉인이 진정 깨어진 게 아닐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제대로 된 종말이 다가오기 전에 제온의 장난으로 종말을 흉내낸 마지막이 다가온 걸지도 모른다는 소리였다. 앨런은 미미하게 웃었다. 긍정이었다.
“그렇지만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허면.”
“각국에 전서구를 보내겠습니다. 한시도 지체할 수 없으니, 이쪽이 먼저 채비를 하여 대사막으로 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전하의 형님께는.”
란델이 아니라 플란츠에게는 알리지 않을 것이냐는 뜻이었다. 앨런은 플란츠가 칼리안의 가장 큰 우방이자 정치적 동반자이자 이해자라는 것을 알았다. 거기까지만 알았다. 그 이상은 칼리안도 플란츠도 알리지 않으려 했기에 앨런은 알지 못했다. 그는 사려 깊은 아버지이자 이해자였지만 아들들이 감추려 드는 것까지 애써 알려 들지는 않는 사람이었다. 칼리안은 쉽사리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자신의 앞에 놓인 민트차로 시선을 떨구었다. 사사로운 감정에 휩싸여 갈피를 잡지 못하는 칼리안을 조롱하듯 민트차에 어른어른 플란츠의 얼굴이 떠올랐다.
칼리안은 미련처럼 어른거리는 그 얼굴을 애써 외면하며 마음 속으로 다짐했다. 플란츠에게 알리지 않고 은밀히 움직이기로. 그것이 무척 비합리적이고 말도 안 되는 얘기라는 건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오래 전부터 칼리안은 오직 플란츠에게만 기울어진 천칭이었다. 절대 무엇도 말하지 않으리라. 짧은 시간 안에 결심을 굳힌 칼리안은 앨런에게도 이러한 뜻을 전했다. 앨런은 말없이 차를 마시는 것으로 난색을 표했다. 그게 과연 그리 쉽게 되겠냐는 의미였다.
“대공은 전하의 곁을 지키려 할 텐데요.”
과연 그 말대로, 앨런과 얘기를 나누고 얼마 지나지 않아 플란츠가 독대를 청했다. 칼리안은 일찍이 얀에게 플란츠가 찾아올 경우 그 걸음을 물리라 언질을 준 적이 있었지만 얀은 플란츠의 걸음을 막지 못했다. 그가 전례없이 완고했고 완강했던 탓이다.
“제가 선택한 자리에 제가 서 있겠다는 것을, 아무리 국왕 전하라 하셔도 막으실 수는 없습니다.”
나른한 음성이 초침 똑딱이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응접실을 가득 메웠다. 칼리안이 플란츠의 앞에 놓인 차에 잠시 시선을 두었다. 칼리안의 부탁으로 시종장인 얀이 향 없는 차를 내왔을 때 플란츠는 기호가 바뀌었으니 죄송하지만 다른 차를 부탁드려도 되겠느냐고 칼리안에게 물었다. 칼리안은 선선이 허락했다. 그 정도는 부탁 축에도 못 낀다고 할 수 있었을 뿐더러, 그 정도의 부탁이 허용되지 않는 사이도 아니었으니까. 플란츠는 조금의 동요도 없는 얼굴로 말했다. 가향차가 좋겠습니다, 라고.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칼리안은 모르지 않았다. 플란츠가 알게 모르게 조금씩 마신 덕분에 어느 새 투명한 바닥이 훤히 보이는 찻잔에서 시선을 거둔 칼리안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 뜨며 입을 열었다.
“그 앞에 뭐가 있는 줄 알고 이리 함부로 걸음을 옮기려 하십니까.”
“그러는 전하께서는.”
칼리안은 짐짓 화가 난 듯해보였으나 플란츠는 예리하게 세공된 루비처럼 날카로운 시선의 기저에서 희미한 두려움을 읽어낼 수 있었다. 자신의 앞에 놓인 찻잔의 테두리를 느슨하게 쓸어내린 플란츠가 이윽고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말을 이었다.
“그 앞에 뭐가 있으리라 확신하시기에 제 걸음을 막아서시는 겁니까.”
“형님, 저는.”
“칼리안.”
플란츠는 칼리안의 말허리를 자르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무언가 말하려던 칼리안의 입술이 다물린다.
“네가 기른 사람은, 그렇게 형편없는 존재인지.”
“형님.”
“날개 접고 고이 숨만 쉬는 취미는 없다고 했을 텐데.”
칼리안이 주먹을 말아 쥐었다.
“축복도 없으신 분께서……!”
“네 곁에 있는 이들과 나의 처지가, 무엇이 다르지.”
“…….”
“경솔히 굴지 마시지요. 괜찮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객기나 만용으로 칭해질 수도 있는 발언과 행동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아니, 객기를 부리거나 만용을 부린다는 말이 더 적합한 상황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칼리안이 자신을 살리는 행위를 통해 살아나가고 있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그것을 알고 있었기에 삶아지고 절여지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것을 알고 있었기에 가능하면 그 꿈만은 늦게 꾸도록 노력했다. 꾸게 된다면, 현존하지는 않으나 분명히 살아 있는 죄가 자신을 안에서부터 찢어 발기리라는 걸 알아서.
이 걸음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는 모른다. 칼리안이 막아 설 만큼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만 어렴풋이 짐작할 따름이었다. 그럼에도 플란츠는 결심했다. 그의 곁에 서기로.
“……알겠습니다.”
먹먹한 얼굴로 플란츠를 바라 보던 칼리안이 한참 뒤에 피로한 얼굴로 백기를 들었다. 기실 플란츠의 말이 맞았다. 시스파니안이 잠든 이후부터 축복 같은 건 하등 상관없는 일이 되지 않았던가. 또한 축복이 없는 것은 자신도 마찬가지였으며 자신과 뜻을 함께 하고자 하는 이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플란츠만 축복이 없다 하여 예외 취급을 받아야 할 이유도, 그럴 권리도 없다.
“……대신, 제 앞으로 나서지 마세요. 그리고, 또 혼자 다니시다 제 곁에서 멀어지시지 말고요.”
“알았어.”
“……그리고 하나 더요.”
“또 뭔데.”
돌아올 때는, 꼭 지금과 같을 거라고 약속해주세요. 칼리안은 간절한 기원을 돌에 새기듯이 말했다. 그것은 어려울 것 없는 일이었다. 그럴 수만 있다면, 플란츠는 단 한 순간도 자신의 생을 무가치하게 내던지고 싶었던 적이 없었다. 자신의 죽음이 브리센의 악행에 쓰일까봐 베개 밑에 작은 칼을 숨기고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울 때조차 그랬다. 그는 살고 싶었다. 남들이 이기적이라고 욕해도 할 말이 없을 만큼 아주 간절히 살아 나가고 싶었다. 제 앞에 펼쳐진 길이 엉망으로 깨진 유리를 가득 흩뿌린 가시덤불뿐이라 할지라도, 그 길을 맨발로 걸은 끝에 발이 피투성이가 된다 할지라도, 그렇게 피를 흘리며 살아 나가고 싶었다. 죽고 싶었던 적도, 면죄부로서의 죽음을 구하고 싶었던 적도 없었다.
무모하다 여겨질 수 있는 지금의 발언 또한 그랬다. 언제부터인가 플란츠는 칼리안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죽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지만, 이건 그런 생각을 기저에 깔고 하는 말이 아니었다. 자신을 소모품처럼 내던져가며 죽음을 불사하고자 하는 행동이 아니었고, 죽고 싶어 동행하는 걸음이 아니었으므로 그러했다. 플란츠는 지키고 싶었다. 살아 있는 자들이 살아갈 수 있도록.
그리고 살아가고 싶었다. 칼리안과 살아나가고 싶었다. 그뿐이었다. 그래서 플란츠는 반드시 그렇게 되리라는 예언을 말하듯 힘주어 대답했다. 칼리안이 4층에 오면 숨을 쉴 수 있다고 했던 그 말이 무엇인지 이제는 명확히 알았으니까. 사람이 화분을 기르고 키우면서 마음의 안정을 얻듯이 그가 푸르죽죽한 완두콩을 파릇파릇하게 키워내는 행위를 통해 숨을 쉰다는 걸 알았으니까. 존재 자체가 누군가의 호흡이 되기도 한다는 걸, 이제는 분명하게 알고 있으니까.
“약속하지. 아우님께.”
지키지 못할 약속이었다.
*
칼리안과 그 일행이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도착한 대사막은 이미 검은 기운에 잠식당한 듯했다. 본래도 생명 하나 움트지 않는 불모의 땅이라지만 그래도 온통 검은빛으로 뒤덮인 광경은 기이하기 짝이 없었다.
쉴 새 없이 꾸물거리며 마수를 뻗쳐 오는 어둠의 한 중간에서 불길한 모래시계가 돌고 있음을 발견한 드미레아가 칼리안을 돌아보았다. 기억에 있는 것과 같냐는 뜻이었다. 저만치 앞에 있는 것을 보다 뚜렷하게 보기 위해 가느스름해졌던 칼리안의 눈이 이내 크게 뜨였다.
그럴 리가 없다.
하지만 드미레아가 손을 들어 가리킨 방향에 있는 모래시계는 분명 자신이 마지막 순간에 보았던 시간의 축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더 믿을 수가 없었다. 파편을 전부 회수하지는 못했을지언정 그래도 일부나마 회수했으니 설사 제온에서 시간의 축을 손에 넣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엉성한 모습을 띠고 있어야 했다.
그런데 어찌하여.
핏빛 돌을 사용하여 생장과 회복을 주관하는 신의 영역에까지 손을 뻗친 제온이었다. 그게 설령 시간의 축이라 불리는 위대한 신물이라 할지라도 그 일부인 파편의 모조품을 만드는 것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칼리안은 여러 겹의 띠로 된 거대한 구 속에서 느리게 회전하는 모래시계를 노려보았다. 갑자기 대륙 곳곳에 나타나기 시작한 파편, 눈을 감고 잠든 시스파니안과 다누가 보여주었던 종말. 미세하게 어긋났던 축들이 지금 비로소 온전하게 맞춰지는 듯했다.
시스파니안은 세렌티의 의지로 잠든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잠든 것이었나. 다누가 보여주었던 종말과 지금의 종말이 다른 양상을 띠는 것은, 대륙을 뒤덮을 종말을 조금이나마 뒤로 늦춰보기 위해 시스파니안이 자신의 온 힘을 쏟아 부은 끝에 잠든 결과였으리라. 일련의 생각이 가지를 뻗어나가던 중 칼리안보다 약간 뒤에 있던 플란츠가 말없이 칼리안을 쳐다보았다. 바라보는 시선에서, 칼리안은 플란츠 역시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고 동일한 결론을 도출해냈음을 알았다.
시간의 축은 본디 악신을 상대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으나 결과적으로는 악신을 봉인하는 데 쓰였다고 했다. 동시에 악신 전쟁 때 시스파니안은 시간의 축을 돌리지 않았다고 했다. 시간의 축은 파편 하나하나에 시간을 멈추는 방대한 힘이 깃든 신물이었다. 곧 축 자체에 시간의 흐름을 끊어내는 힘이 담겨져 있다는 뜻이었다.
축을 갈라내어 그 힘을 억지로 해방시킨다면, 대륙을 향해 들이닥치는 종말을 온전히 막을 수 있지 않을까. 시간의 축을 돌린다는 선택지는 애초에 배제하고 생각을 끝마친 칼리안이 몸을 돌려 자신의 뒤에 도열한 이들을 바라보았다. 이 앞에 무엇이 있는지조차 알지 못하면서, 그 앞으로 나아가는 것만이 자신의 신념을 배반하지 않는 유일한 길이 되므로 칼리안과 동행한 이들이 칼리안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말했던 것처럼, 키리에는 히나가 돌을 제거할 수 있는 틈을 만들어 줘. 무슨 일이 있어도 히나의 곁에서…….”
칼리안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검게 물든 사막이 마치 바다처럼 요동쳤다. 검은 모래들이 내내 감추고 있던 사나운 본성을 드러낸 것처럼 정신없이 출렁이며 칼리안과 일행을 향해 맹수 같은 이를 드러냈다. 아무도 없던 사막에 제온으로 보이는 치들이 모습을 드러낸 건 그 순간이었다.
*
플란츠는 검을 고쳐 쥐었다. 벌써 몇 명을 베어냈는지 이제는 셀 수조차 없었다. 이편을 향해 달려드는 검사들을 무차별적으로 베어내는 도중에 독에 당한 모양인지, 어깨에서부터 옆구리를 타고 베인 상처가 불에 타는 것처럼 뜨거웠다.
아우님이 화 낼 텐데.
희게 드러난 목덜미를 노리고 달려드는 검격을 오른손에 든 검으로 막고, 그 틈을 노려 옆구리를 노리고 달려드는 공격은 몸을 슬쩍 비껴 피하며 그런 생각을 했다. 막은 손에 힘을 주어 검을 밀쳐 올리자 맞닿은 검신에서 불꽃이 튀며 놈이 들고 있던 검이 저 멀리 날아간다.
무기를 잃은 검사는 언제든 사냥할 수 있었다. 플란츠는 자신의 옆구리를 노리고 달려들었다 목표물을 잃고 아차 하는 놈을 향해 왼손에 쥔 시나스타를 휘둘렀다. 바람을 가르는 듯했던 검이 급격하게 꺾이면서 섣부른 공격을 가하려 했던 검사의 몸을 아래에서 위로 갈라낸다. 피가 분수처럼 튀며 플란츠의 몸을 적셨다. 심장에 단단히 박혀 있던 돌은 방금의 일격으로 깨졌을 것이다. 플란츠는 망설이지 않고 몸을 돌렸다. 무기를 잃고 도망가려 했던 검사의 등에 주저없이 검을 꽂아 넣는다. 숨을 들이 삼키며 검을 뽑아내자 본디 희어야 할 검신을 타고 피가 주륵 흘렀다.
도무지 끝이 나질 않는 싸움이었다. 곳곳에서 그 어떤 언어도 필요치 않은 상황이 바삐 전개되고 있었다. 사막에 퍼진 검은 기운을 피하며 제온을 상대해야 했기에 필연적인 난전이 될 수밖에 없었다. 서로가 서로의 안위를 보장해주지 못하고 각자 생존을 도모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칼리안은 한사코 플란츠의 곁에 서서 그를 지키려 했고 플란츠는 그런 칼리안을 밀쳐 냈다. 도저히 그럴 만한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저 멀리서 아델리아와 앨런이 사이좋게 공방을 주고받는 모습이 보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의 모습이 보인 건 아니었다. 다만 솟구치는 대지와 하늘에서부터 쏟아지는 불의 비를 보고 그들이 서로를 향해 맹렬한 공격을 퍼붓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시스파니안이 잠들었으니 대륙을 불태울 기세로 마법 공세를 퍼붓는 두 마법사를 말릴 이는 어디에도 없었다.
-재밌을 거 같지 않아? 종말이라는 거.
개전 직전 아델리아가 했던 말이 아직도 머릿속에서 웅웅 울렸다. 마법사란 족속들은 하나같이 다 미쳐 있지만 미쳐 있기로는 저기 있는 백발의 마법사가 최고일 거라는 생각을 했다. 종말 같은 건 원하지 않는다. 그런 끝은 어떻게든 막아내고 싶다. 아델리아와 앨런으로부터 급하게 시선을 거둔 플란츠는 뛰어가면 닿을 만한 거리에서 격전을 펼치고 있는 칼리안을 보았다.
다수의 제온은 일찌감치 칼리안을 목표 삼아 맹공을 퍼붓고 있었다. 희고 푸르고 붉은 빛이 터져 나왔다가 비정상적으로 빨려 들어간다고 여긴 순간, 거대한 회오리가 그 부근을 휘감는다. 플란츠는 눈을 한번 깜박였다. 회오리가 가신 광경 속에서 칼리안의 등 뒤로 그 형체가 급격하게 변하는 붉은 검들이 떠오르더니 그를 둘러싼 이들을 향해 무시무시한 속도로 쇄도하기 시작했다. 얼핏 보기에는 압도적으로 우위를 점하고 있는 듯했으나, 지속적으로 마력과 오러를 소모하고 있는 탓에 그 낯빛이 창백했다.
세크리티아의 바닷가에서 제온을 상대했던 날이 떠올랐다. 자신에게 참극을 보여주었다는 이유로 다누에게 천고가 지나도 잊히지 않을 상처를 남기고 아무렇지 않은 양 굴다가 종내 쓰러진 날이 떠올랐다. 지나온 과거가 예지처럼 눈앞에 펼쳐지려는 것을 플란츠는 머리카락을 흩뜨리며 흩어내고는 시선을 거두었다. 이내 흉흉한 기운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했던 탓이다. 플란츠는 검게 탄 별의 잔재와 눈이 시릴 정도로 흰 빛을 내는 별의 잔재를 각각 한 손에 쥔 채 자세를 가다듬었다.
비릿한 냄새가 자신의 입에서 나는 건지 상처에서 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세크리티아의 왕궁에서 이름 모를 기사들을 상대했던 때보다도 더 숨이 가빴다. 플란츠는 밭은 숨을 내쉬며 상황을 살폈다. 얼마 가지 않아 빠듯하게 차오르는 숨을 그럭저럭 가다듬기도 전에 다수의 적이 주위를 에워쌌다. 한두 명으로 상대할 만한 인물이 아니라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플란츠는 한 손에 쥐고 있던 검을 한 데 모아 창을 만들고 휘둘렀다. 곁을 에워싼 제온을 일시에 소거하기에는 부족한 행동이었지만 적어도 그들의 공격을 분산시키는 데는 이만 한 게 없었다.
이제는 창이 된 검을 휘두르며 플란츠는 힐끔힐끔 칼리안을 보았다. 싸우는 도중에는 한눈 팔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어쩔 수가 없었다. 시선이 닿는 곳에서, 오러로 만든 검이 누군가의 목덜미를 꿰뚫는다. 꿰뚫은 검이 방향을 선회하여 뒤에서 달려드는 적을 불시에 베어낸다. 상처를 헤집는 바람이 누군가의 살갗을 갈가리 찢어낸다. 칼리안은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적들을 효율적으로 상대하고 있었다.
그러니 지금 남 걱정하실 때입니까. 형님.
그런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린 순간이었다. 칼리안의 몸이 한순간 휘청댔다. 환상 따위가 아니었다. 이내 한쪽 무릎이 풀썩 꺾일 뻔한 걸 목격한 연둣빛 눈이 세차게 일렁였다. 플란츠는 피 냄새가 밴 입술을 깨물었다. 다급하게 주변을 살폈지만 칼리안에게 마땅히 도움을 줄 수 있을 만한 이들이 보이지 않았다.
자신이 껴도 되는 곳과 끼면 안 되는 곳을 구분하여 발을 물리는 법을 안다. 그의 아우님이 자신을 걱정한다는 것 또한 안다. 하지만.
하지만 지금 칼리안이.
창을 휘둘러 한번 진형을 흩뜨려 놓았더니 다시 슬금슬금 몰려드는 놈들을 노려보며 플란츠는 어금니를 악물었다. 돌아올 때는 꼭 지금과 같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둘 중 누구도 홀로 돌아오는 일은 없을 거라고, 약속했다. 그가 처음부터 자신을 위해 예비해 둔 곳에 자연스레 서서, 그와 호흡을 맞추고, 걸음을 맞추고, 그렇게 살아 나가기로 약속했다. 그러니 지금은 걸음을 물려야 할 때라는 걸 알고 있었다. 여기서 나아간다면, 죽음이 자신의 손을 맞잡으리라는 걸 오래전에 완성된 이야기처럼 예상할 수 있었다.
알고 있었지만.
머리로 결정을 내리기도 전에 몸이 먼저 움직였다. 플란츠는 자신의 앞을 가로 막아 서는 놈의 팔을 베어내고 길을 열어 칼리안 쪽으로 뛰어 들었다. 자신의 아우님이 참 유능하고 능력도 출중한 소드마스터이자 마법사라고는 하지만 지치지도 않고 쇄도하는 제온의 공격을 모조리 막아내기는 아무래도 힘에 부친 듯하여.
“……플란츠!!”
플란츠는 칼리안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무수히 많은 검과 마법이 피로 물든 몸을 과녁 삼아 날아든 건 그 순간이었다.
운, 좋네.
세렌티라거나 운 같은 건 믿어본 적이 없었지만 지금만큼은 일평생을 통틀어 처음으로 그렇게 여겼다. 운이 좋다는 말밖에는 할 수가 없었다. 사실 딱히 공격을 막으려던 건 아니었지만 어찌되었건 적시에 자신을 향해 공격이 퍼부어졌고 덕분에 칼리안이 다치지 않았으니 된 일 아닌가.
“왜 이런……. 왜, 왜요. 대체 왜.”
몸에 돌기 시작한 독 때문인지, 그게 아니라면 한 사람의 몸으로는 감당키 힘든 공격을 한꺼번에 맞은 덕분인지 온 몸이 갈기갈기 찢기다 못해 산산이 조각나 부서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입체적이어야 할 풍경이 하나도 빠짐없이 점과 선과 면으로 나뉘었다가 합쳐지고 다시 잘게 쪼개지며 불티처럼 비산하고 있었다. 눈앞이 짙고 빽빽한 안개가 낀 것처럼 온통 흐렸다. 물 속으로 가라앉는 듯이 아득하게 멀어져 가는 의식 속에서 플란츠는 칼리안의 분노나 슬픔과도 닮은 것들이 주변에 포진한 적들을 불시에 덮는 것을 보았다.
꿈에서 보았던 것처럼 슬프도록 시린 빛이라고, 입으로 피를 통하는 와중에도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
플란츠는 속눈썹 가득 피가 엉겨 붙어 좀처럼 떠지지 않는 눈을 간신히 뜨고는 더디게 눈을 깜박였다. 피로 물든 시야에 칼리안의 얼굴이 사라졌다, 나타났다, 사라졌다, 다시 나타나기를 반복했다. 핏물에 담갔다 빼낸 것처럼 붉게 물든 플란츠의 옷만큼이나, 칼리안이 입고 있던 검은 옷 역시 온통 피에 절어 본래의 색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플란츠는 힘겹게 시선을 위로 올려 칼리안의 어깨 너머를 보았다. 물 한 방울 나지 않는 불모의 사막을 붉은 꽃잎들이 화려하게 수놓고 있었다.
안네루시아를 올려 주셨네. 아우님께서.
“……화를 내도 된다고 해주세요.”
칼리안은 울음처럼 말했다. 슬픔은 높은 곳으로 올라갈수록 정갈하게 다듬어져야만 하는 법이었다. 내쉬는 숨 하나에도 의미가 부여되는 자리에 앉은 사람은 그 무엇보다도 절제된 언어로 슬픔을 표해야만 했다. 하지만 플란츠는 지금 이 순간 칼리안이 날 것 그대로의 언어를 토해낸다 해도 그를 책하거나 막을 수가 없었다.
얼굴을 일그러뜨려가며 울지 않기 위해 애를 쓰는 칼리안은, 플란츠가 보기에는 슬픔을 토해내는 것만으로 호흡할 수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추위도 더위도 타지 않는 아우님이었는데 제 몸을 붙들고 있는 팔이 사정없이 떨리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후두둑 눈물이 떨어질 것 같은 얼굴을 보며 플란츠는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화를 내도 될 만한 사람이었다. 자신이 그럴 만한 짓을 했으니까.
약속했는데, 지키지 못했다.
“……이리도 순하셔서, 어떡합니까……. 형님이 제게 화를 내셔야죠. 어련히 알아서 살려드리겠다 했는데, 그러지를 못했잖습니까. 제가.”
“아니, 야…….”
메마르고 갈라진 음성이 목구멍을 작살처럼 긁으며 올라왔다. 뒤이어 울컥하고 피가 솟구치는 느낌과 함께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목구멍을 타고 올라온 피가 쏟아져 내렸다. 꽃처럼 화사했던 얼굴이 또다시 피로 물든다. 그게 안타까워 미간을 살풋 찡그리자 피보다 더 붉은 눈이 슬픔과 비탄과 비통을 안고 일렁였다.
붉은 입술이 미미하게 달싹였다. 그가 어쩐지 자신이 잘 알고 있는 시동어를 발음하려는 듯하여, 플란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남은 마력도 없을 텐데, 그러지 말라는 뜻이었다. 그런데도 망설이지 않고 아브턴던트를 발음한 칼리안이 이내 어린 아이에게 동화를 들려 주듯이 조근조근 말했다.
“……형님, 저는요.”
칼리안은 견딜 수 없는 것들을 견뎌내려는 사람처럼 아랫입술을 물었다 놓으며 말을 이었다. 저는, 어느 하나 잊지 않겠습니다.
어째서 그런 말을 해. 하지 말라는 뜻에서 손을 들어 입을 막아 보았으나 움직임은 더딜 수밖에 없었다. 너덜너덜해진 몸에 더는 힘이 들어가지 않은 탓이다. 될 수 있는 한 평소처럼 힘 있게 들어 올려 보려 했으나 힘없이 들어 올려진 손은 허공에서 얼마 머물지 못하고 아래로 추락했다. 그러나 그 손이 온전히 떨어지기 직전, 칼리안이 손을 붙들었다. 아우님은 정말……. 따듯하군. 무심결에 든 감상에 플란츠의 가슴이 무지근하게 내리앉으려던 찰나 칼리안은 붙든 손을 자신의 뺨에 비비며 속삭였다.
형님이 그러지 말라고 하셔도, 저는 잊지 않을 겁니다. 죽음이 맞잡은 손에 와 닿는 온기가 낯설었다. 플란츠는 애매하게 손끝을 오므렸다. 피에 젖은 연분홍빛 입술이 달싹이다 멎었다. 네가 먼저 그렇게 말하면 어떡하라고. 무엇도 기억하지 않고 아무것도 없었던 양 그렇게 살라는 말을 하려 했는데, 그것이 자신의 소원이라고, 이게 마지막 소원이니 이 소원만은 아무리 아우님이라 해도 들어주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말하려 했는데 칼리안은 그조차도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정말 빌어먹을 아우님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고 화를 낼 수는 없었다. 화를 낼 사람은 자신이 아니었으니까. 또한 울 수도 없었다. 마지막으로 보여 줄 얼굴이 슬픔으로 얼룩지길 바라지 않았을 뿐더러, 네가 나의 슬픔마저 다 끌어 안은 듯한 얼굴로 날 보고 있었으니까. 플란츠는 별 수 없이 웃었다. 아이처럼 말갛게 웃진 않고, 한쪽 입꼬리만 끌어 올려 웃었다. 이지러진 달 같은 웃음이었다.
“화를 내셔야죠. 아무튼 그렇게 웃으셔도 안 됩니다. 이것만큼은 아무리 형님이시라 할지라도 양보할 수 없어요.”
그 말에, 누군가 가슴을 쥐어짜고 숨통을 틀어막는 것만 같았다. 무수히 많은 유리 파편들이 온몸을 찌르는 듯했다. 그러지 말라는 말은, 이미 늦은 거겠지. 그럼 나는 어떤 말을 돌려주어야 하나. 칼리안이 걸어 준 마법 덕분에 고통은 가셨다지만 숨을 쉬는 것조차 이제는 고역이었다. 플란츠는 자신에게 말할 수 있는 기회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했다. 그 어떤 말도 섣불리 내뱉을 수 없었다. 칼리안의 곁에서 살아 숨 쉬는 동안 그 무엇보다도 풍성하게 자라난 녹음이 피로 젖은 속눈썹이 파르르 떨릴 때마다 온갖 감정을 안고 일렁였다.
“그러니 형님도 그러겠다고 해주세요.”
그제야 알았다. 너는 안네루시아가 아니라, 시나스타를 올려준 거였구나.
그러지 않길 바랐다. 시나스타가 아니라 안네루시아를 올려주길 바랐다. 안네루시아는 강물을 따라 하류로 흘러가다 그렇게 잊힐 테니까. 차마 사라지지 못하고 가슴 한 편에 갈앉은 추억과 해묵은 감정 따위가 뒤늦게 역류하여 칼리안을 도륙하는 날이 오지 않기를 바랐다. 생의 마지막 때에 간절히 바라는 건 그런 것뿐이었다. 그런데 칼리안은 그렇게는 못하겠다고 말한다. 잊지 않겠다고 말한다. 이 생을 안고 고스란히 살아가겠다고, 그렇게 말한다. 그래서 해줄 수 있는 말이 하나밖에는 없었다.
“……안, 잊을 테니, 까…….”
칼리안이 지금 한 말에 돌려주는 대답이긴 했으나 꼭 그런 것만도 아니었다. 아주 오래 전에 해주었어야 하는 몫까지 포함하여 돌려준 대답이었다. 진작 해줬어야 하는 말이라는 걸 알았으면서도 그때는 차마 하지 못했다. 그 말을 하게 되면 한 사람분의 생을 그 몸에 고스란히 얹어주는 길이 될 것만 같아서. 너와 내가 형님과 아우가 아닌 또 다른 사이로 엮일 것만 같아서.
칼리안은 한 평생 우는 법밖에 모르는 사람이 처음으로 웃는 것처럼 설익은 미소를 그 얼굴에 올리며 대답했다.
“네.”
“너, 웃어……. 자꾸…….”
“봐주세요. 짖는 것보다는 이게 낫지 않습니까.”
……그리고, 자꾸 말씀하려 하지 마세요. 기운도 없으신 분이. 보세요, 계속 억지 부려가시면서 말씀하려고 하시니까, 이렇게……. 눈이, 자꾸……. 자꾸만, 감기시잖아요. ……피곤하세요? 플란츠는 그 어느 때보다도 세차게 고개를 가로저으려 했다. 안 피곤한데 왜. 안 피곤해. 말 하는 것도 안 힘들어. 고개를 저음으로써 그런 말을 전하려 했다. 할 수 없었다. 자꾸만 속에서 핏물이 치밀어 올라서, 그렇지만 또 피를 토하면 네가 분명 슬퍼할 테니까, 치밀어 오르는 걸 어떻게든 참아내고자 입을 꾹 다물고 있는 데 모든 힘을 소모하는 것만으로도 한계였다.
칼리안, 칼리안……. 오래 전에 제 몸 곳곳에 뿌리를 내린, 그리고 아마도 다시는 부르지 못할 이름이 혓바닥 위를 미련처럼 맴돌았다. 마지막으로 이름 정도는 불러주고 싶은데, 그마저도 여의치가 않았다. 소리를 내보려 하자 목구멍이 난도질 당하는 듯했다. 그래도 플란츠는 기도와 연결된 기관이 모조리 잡아 뜯기는 듯한 고통을 감내하면서 고집스럽게 그 이름을 발음해 내었다.
“칼리, 안…….”
“네. 저 여기 있습니다. 형님.”
분명 힘을 줘서 눈꺼풀을 들어 올리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까부터 칼리안의 모습이 보였다 안 보였다 했다. 사람의 키가 순식간에 늘어났다 줄었다 할 리가 없을 텐데 눈에 들어오는 칼리안의 머리통이 자꾸만 위로 치솟았다가 아래로 푹 꺼졌다가 어둠 속으로 잠겨든다. 플란츠는 벌벌 떨리기 시작한 몸을 칼리안 쪽으로 기대며 그의 품에 얼굴을 파묻었다.
“거 봐요. 피곤하시잖습니까. ……주무세요, 이제. ……졸리시면서, 고집부리시네. 그러다 파릇파릇한 완두콩 노래집니다.”
칼리안의 손이 그늘처럼 플란츠의 얼굴을 덮었다. 마지막까지, 건방져……. 속으로 잦아드는 불평을 토해내지 못하고 플란츠는 눈을 감았다. 신록의 계절이 저무는 순간이었다.
“……편히 주무세요. 정말로.”
한 계절이 소리없이 닫힌다. 칼리안은 가슴에 단단히 맺혔던 인이 형해조차 남지 않고 바스라지는 걸 느꼈다. 그 어느 것보다 눈이 부시게 아름다웠던 녹음이 바늘과 실로 꿰매다 붙인 것처럼 아직도 눈앞에 선명한데, 이 모든 게 이젠 다만 환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가 없다. 마치 자신의 살점을 뜯어내듯, 플란츠의 얼굴에서 좀처럼 떨어지지 않던 시선을 겨우겨우 떼어낸 칼리안은 한 손에 플란츠를 안은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온이 완성한 시간의 축은 불완전하고 불안정한 것이었다. 그들은 그것을 통해 악신을 일깨우고자 했고 실제로 검은 기운을 불러내는 데까지는 성공했지만 그것도 이제 끝이다. 칼리안은 모래시계가 있는 곳으로 걸어 가 피로 젖은 시나스타를 들었다. 검붉은 피를 머금고 불길한 빛을 내고 있는 모래시계를 횡으로 베어내는 손길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시간을 되돌리기 위함이 아니라,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되는 존재를 있어야 할 곳으로 돌려보내는 움직임이었다. 찬란한 금빛과 어두운 핏빛이 한데 뒤섞여 흐르며 대지를 물들이기 시작했다. 밀물처럼 구석구석으로 빠르게 번져나가는 빛이 검은 기운을 몰아내는 것을 보며 칼리안은 그저 서 있었다.
미안하구나.
감정이 희석될 만큼의 세월을 살아왔으면서도, 누군가를 잃어본 적이 있기에 칼리안의 슬픔을 이해할 수밖에 없는 절대자의 음성이 들렸다. 스스로 잠드는 길을 택하면서까지 종말을 막아보려 했지만 막지 못한 것에 대한 미안함인지, 그 결과로 사랑하는 사람을 잃게 만든 것에 대한 미안함인지 칼리안은 굳이 구분하지 않았다. 그저 바랐다. 실로 사려깊은 시스파니안이 누군가를 영겁토록 추억하고 기리는 생에서 벗어나 잊히는 결말을 부여받기를.
빛을 잃은 대지에 신의 축복 같은 황금빛이 새로이 덧씌워진다. 더디지만 꾸준히 본래의 색을 되찾아 가는 사막 위에서, 너덜해진 몸을 부여잡은 이들이 뒤늦게 하나 둘 몸을 일으켰다.
“……전하.”
누군가 비명처럼 그 호칭을 불렀다. 칼리안은 자신을 보는 수많은 얼굴을 본다. 슬픔은 발화될 기회를 상실해야만 했다. 칼리안은 스러지는 것처럼 웃었다. 다 끝났습니다. 해냈어요. 우리가. 층층이 드리워진 구름 사이로 여리지만 분명한 빛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
그러고 보니 설마 처음이십니까?
무겁게 내리쬐는 정오의 햇빛처럼 숨이 막히는 침묵을 걷어 낸 건 칼리안의 말이었다. 너 말고 누가 있겠어. 고개를 갸웃하는 칼리안에게 그렇게 말하는 대신 플란츠는 공연히 옷깃을 매만지며 대답했다.
그럴 리가.
거짓말은 아니었다. 플란츠는 그 왕성하고 방대한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다양한 부류의 서적들을 읽고 또 각양각색의 지식을 섭렵한 바 있었다. 세크리티아의 바다에서 칼리안이 물에 빠졌을 때 건져낼 수 있었던 것도 그렇게 습득한 지식의 도움을 받은 것이었다. 물론, 개중에는 그처럼 써먹을 수 있는 것뿐만 아니라 차마 연세 많으신 아우님에게 대놓고 말하기 민망한 것들도 다수 있었다. 지금처럼.
어쨌든 책에서 배웠으니 이런 일이 처음은 아니다. 제 안에서 억지논리를 펼친 끝에 나온 플란츠의 대답에 칼리안의 붉은 입매가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잊으세요. 그건.
왜.
어차피 책에서 접한 게 전부이실 거 아닙니까.
건방진 새끼.
대신, 지금 이 순간은 잊지 마세요.
…….
플란츠는 입을 다물었다. 칼리안은 모든 걸 이해한다는 사람처럼 약간 서글프게 웃으며 말했다.
……적어도, 제가 방금 가르쳐 드린 것만이라도요.
*
“그래서, 제온이라는 잔악무도한 놈들이 불러 온 종말을 막아 내신 위대하신 국왕 전하와 영웅 분들 덕분에 우리가 이렇게 이 땅 위에 두 발을 딛고 서 있을 수가 있는 거란다.”
“그 이후에 국왕 전하는 어떻게 되셨어요?”
고소한 빵내음이 가득한 거리 사이로 아이들이 재잘거리는 소리가 소란스레 오갔다. 아이들을 주변에 앉혀 놓고 이야기를 해주고 있던 남자가 옹기종기 모여 있던 아이들 사이에서 불쑥 튀어나온 질문에 곤란한 얼굴로 뺨을 긁었다.
“그 이후에 어떻게 되었냐면…….”
“국왕 전하께서는 평생 왕비를 들이지 않으셨다는데 그게 사실이에요?”
“나 알아! 사실 손위형제를 사랑해서 그러셨대!”
“플란츠 룬 카이리스 대공 말이야?”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가 어딨냐, 욘석들!”
말도 안 되는 소리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 검은 머리카락에 붉은 눈을 가진 사람은 그 곁을 유령처럼 스치며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종말을 막아 냈던 그 날, 다누는 칼리안을 자신의 영역으로 불러 들였고 자신의 예지가 틀렸다며 칼리안의 앞에 고개 숙이지 않았다. 칼리안도 미래를 읽어내는 당신이 감히 내게 막아내지 못하리라는 말을 했냐며 그를 비웃지 않았다. 그 날, 한 사람의 세계는 분명히 종말을 맞이했으므로.
다누는 말했다. 세렌티의 힘은 거의 다했다고. 또한 너는 얼마든지 선택할 수 있다고. 칼리안은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쉬이 알아차렸다. 시스파니안이 했던 미안하다는 말이 무엇을 두고 한 말이었는지도 알아차렸다. 고작 한 사람의 몸으로 짊어지기에는 그 무게가 너무 무겁다고 했던 말이 불현듯 떠올랐다. 그는 실로 사려 깊은 시스파니안이었으므로 이런 불합리하고 부당하며 가혹하기까지 한 미래를 상정하고 한 말은 아닐 테다. 그렇지만 너무나 적확하고 정확한 말이지 않은가.
선택이 필요한 문제입니까. 내가 왜 그래야 합니까. 어째서 그래야 합니까. 이토록 의미 없는 세계를 위해, 내가 왜.
세렌티의 힘이 거의 다 했으니 이제 네가 세렌티를 대신하여 세계를 떠받드는 축이 되는 것이 좋겠으나, 원한다면 선택할 수 있다고 하는 다누의 말에 그런 분노가 욕지기처럼 치밀었다. 한때 자신을 분지르고 깎아 내고 마모시켜 가면서까지 누군가를 지키는 생을 추구해온 자가 터트릴 법한 감정은 아니었다. 가장 사랑했던 존재가 결여된 세계라 할지라도 저 먼 바다와 카이리스에는 아직 그가 사랑하는 이들이 분명하게 존재했다. 칼리안은 당장에라도 목구멍을 찢어내고 뛰쳐 나올 것처럼 제 속에서 날뛰는 모순적인 말을 끝내 뱉어내지는 못하고 핏덩이를 삼키듯 삼켜내었다. 동시에 생각했다. 플란츠 역시 지키고자 했다는 것을.
그래, 플란츠는 지키고자 했다. 루시와 안네, 히나, 발칸의 대원들, 레릭, 리리에, 카이리스, 그리고……. 말로 다 하기도 벅찰 만큼 무수한 이들과 무수한 것들을 지키고자 했다. 그들이 발 딛고 선 세계를 지키고자 했다. 불모의 땅에도 생명은 피어나듯이, 플란츠는 폐허 같은 환경 속에서 태어났음에도 다른 이들을 사랑하고 또 사랑하는 이들을 지켜내고자 하는 사람으로 자라났다. 그런 사람이 사랑한 것들과 지키려고 한 것들을 알아서, 그래서…….
“잘나신 형님 덕분에 고생입니다. 이 아우가.”
그래서 대답했다. 알겠다고. 그날 이래로 죽은 사람을 통해 지켜져 온 불사의 삶이었다. 끝이 나지 않는 삶 속에서 명화처럼 아름다웠던 풍경은 금세 빛을 잃었다. 그간 많은 시간을 함께 했던 이들도 물살처럼 곁을 스치고 지나가니 오직 자신만이 홀로 불변한 채 존재했다.
시간의 흐름과 함께 많은 것이 바뀌었다지만 칼리안은 그 모든 변화를 실감할 수 없었다. 분명하게 흐르고 있음에도 영원히 얼어 붙은 것처럼 여겨지는 시간은 머지 않아 한 사람에게서 인간적인 면모를 서서히 앗아가기 시작했다. 사람이 지녀야 할 다채로운 감정은 어느덧 종이 위의 활자처럼 낯선 것이 되었다. 칼리안은 액자 너머의 그림을 들여다 볼 때와 별반 다르지 않게 타인의 삶을 감상했다. 그들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었다.
새롭고 흥미로운 풍경을 맞닥뜨렸을 때 인간이 마땅히 느껴야 할 감흥으로부터도 완벽하게 유리된 삶이었다. 무엇을 보아도 똑같으니 걸음에는 이제 목적이 없었다. 그저 발 닿는 데로만 다닌 지도 벌써 몇 백 년이었다.
오늘도 다르지 않았다. 마을의 거리를 지나 외곽으로 이어지던 정처 없는 걸음이 이윽고 어느 숲 속의 파릇하고 푸릇한 새싹이 피어난 나무의 그루터기에 가 멎었다.
“파릇하네…….”
그 일이 있은 후로 앨런은 칼리안을 걱정하고 염려했다. 속에서부터 곪고 곪은 끝에 거꾸러질 것처럼 보여서였을까. 그 속을 다 파내고 마른 나무껍질 따위로 빈 속을 채운 인형처럼 공허해 보여서였을까. 칼리안은 좀처럼 갈무리 되지 않는 마음들을 힘겹게 그러모아 제 마음 한 편에 꾹꾹 눌러 담으며 말했다.
저 어디 안 가요. 아버지 곁에서 평생 아들 노릇 해야 한다니까요? 게다가, 보세요. 이처럼 파릇한 것들을 두고 제가 가긴 어딜 갑니까. 할 수 있는 것들을 할 만큼 한 뒤에는 다른 이에게 왕위를 넘기고 물러나겠지만, 아직은 아니에요.
한 세계와 무수히 많은 계절을 잃고도 칼리안은 죽은 듯이 살지는 않았다. 여전히 세상에는 칼리안 루 레인 카이리스를 사랑하는 이들이 많이 있었고 칼리안 루 레인 카이리스가 사랑하는 이들도 많이 있었다. 또한 단지 비참한 자기 위로에 불과할지도 몰랐으나 끔찍하게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 삶이 마냥 비극인 것만도 아니었다. 계절의 순환에 따라 푸르고 싱그럽게 피어난 것들을 볼 때면 매 순간 새롭게 사랑하게 되었으니까. 이 세계를. 그리하여 이곳을 지키려 했던 당신을.
“제 뒤에 계시라고 했더니,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이렇게 제 앞에 먼저 와 계시면 저는 어떡합니까.”
형님께서 언제나 제 등 뒤에 계시리라고 믿었던 적이 있는데 말입니다. 아니, 바람이었나. 어쨌든 오만한 바람이었다는 건 인정합니다만, 그래도요. 파릇하게 자라난 새싹을 손으로 매만지며 칼리안은 입을 비죽였다.
짖네.
바람결에 나뭇잎이 스치는 소리 사이로 그리운 음성이 파문처럼 일었다. 그것이 자신에게만 들리는 환청인지 아닌지 칼리안에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그 음성이 화석처럼 굳은 마음을 유일하게 움직이는 사랑하는 세계의 부름이라는 것뿐이었다. 형님 안 계시는 동안 더 잘 짖게 됐습니다, 저. 칼리안은 속으로 대답하며 슬며시 눈을 감았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어둠 너머, 언제든 여기에 있을 테니 되도록 늦게 오라고 하는 사람을 보기 위해. 자신을 살아가게 하는 그 얼굴을 그렇게나마 보기 위해. 인간이 지녀야 할 감정이 거세된 삭막한 얼굴 위로 설익은 미소가 떠올랐다.
칼리안은 감은 눈에 힘을 주며 느리게 숨을 내쉬었다. 이윽고 감은 눈 너머가 파릇한 빛으로 물들면서 추억이 해일처럼 온몸을 덮었다. 봄철의 아지랑이처럼 아른거리는 풍경 속에서 플란츠가 자신을 보고 서 있었다. 여름 나무처럼 울창하게 피어난 계절이, 영영 잊을 수 없는 사람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누군가는 망집 같은 과거라 할지언정 이것은 결코 그를 도륙하는 절망 따위가 아니었다. 유일한 안식이었다. 호흡이었다. 살아가게 하는 모든 것이었다. 숨이 다하는 날까지 사라지지 않을 사랑의 흔적이었다.
사랑이었다.
2019. 09.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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