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어나는 꿈

2차/적왕사2020. 10. 4. 12:29

 

 

  카이리스의 북서부에서 이상한 숲이 발견되었다는 보고가 올라온 건 일주일 전의 일이었다. 처음 그 숲을 발견하고 곧바로 아르피아 궁에 보고를 올린 남작이 이상하다는 수식어를 붙인 건, 타국보다 겨울이 길고 몹시 추운 카이리스의 북서부에서 좀처럼 볼 수 없는 활엽수가 군락을 이루고 있어서였다. 과연 불가해한 현상이었다. 남작은 감히 그 깊이를 가늠할 수조차 없는 해구를 내다 보듯 치를 떨며 왕실의 도움을 구했다. 치를 떨었다는 건 곧 두려워했다는 뜻이다.

 

  아르피아 궁에 상달된 남작의 보고서는 발칸의 흥미를 끌었다. 본디 미지란 세계의 이치를 낱낱이 알고자 하는 마법사들에게는 무척 매혹적인 제안으로 다가오게 마련이었으므로. 그러니 플란츠의 정보 조직 겸 군대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는 발칸의 마법사 중 한명이 용감하게 그 숲을 조사하겠노라 자원하고 나선 것도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아르피아 궁에서 업무를 보고 있던 플란츠는 마법사의 출궁을 선선이 허락했다. 그게 플란츠가 생을 통틀어 두 번째로 내린 오판이라는 걸 알아차리는 데는 딱 하루면 충분했다. 명색이 6서클씩이나 되는 자가 꼬박 하루가 다 가도록 돌아오지 않았던 것이다.

 

  표면적으로 놓고 보자면 실로 불경한 일이었다. 발칸은 왕의 군대이자 왕의 수족이길 자처한 집단이었다. 왕궁에서 그 사실을 모르는 이는 누구도 없었다. 그런데 그런 발칸이 왕의 허락을 받고 궁을 나가 멋대로 돌아오지 않다니? 궁에는 그 어디에나 귀와 눈이 있었기에 돌아오지 않는 마법사에 대한 이야기는 금세 깃털처럼 둥실둥실 궁을 떠돌았다.

 

  사람들은 너나할 것 없이 의아해했다. 하지만 그러한 의문은 그들이 어째서 왕의 수족인지, 그 정확한 이유를 알지 못하는 자들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었다. 발칸이 왕의 수족을 자처하고 나서는 건 왕이 죽으라면 죽어야 하는 위치여서가 아니었다. 플란츠는 그들에게 자신을 위해 목숨을 내걸라고 종용한 적이 없었을 뿐더러, 그들이 자신을 위해 목숨을 내거는 걸 바라지도 않았다. 플란츠가 발칸에게 요구한 건 딱 하나였다. 마법사답게 싸우고, 마법사답게 싸우지 않을 것. 각개격파를 해야 할 상황이라면 마법사답게 한 명 한 명을 거꾸러트리고, 그래서는 안 되는 상황이라면 기사처럼 응집하여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라는 뜻이었다. 플란츠의 요구사항은 그것뿐이었다.

  

  사사로운 정을 결부시키지 않은 명령은 실로 군대에게 적합한 어명이었다. 정은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절망 속에서 사람을 건져내기도 하지만, 때로는 사람을 물귀신처럼 끌어 들여 같은 수렁에 처박곤 했기에. 플란츠는 개인의 비극이 집단의 비극으로 나아가길 원하지 않았다.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자는 스러질 때도 혼자 스러져야만 하는 의무가 있었다. 그 대상이 수많은 피를 밟고 올라선 자라면 더더욱.

 

  그러므로 그들이 스스로를 수족이라 일컫는 건 무척 단순하고 순수하게도 그들이 그것을 바라서였다. 그들은 팔과 다리, 어느 한부분이 썩기 시작하면서 끝내 몸 전체로 퍼지는 죽음을 막고자 환부를 도려내듯 플란츠를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자신들을 잘라 낼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게 곧 플란츠를 향한 맹목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마법사의 신의는 기사의 충의와는 다르다. 그들은 따지고 보자면 무척 개인주의자였고, 플란츠와는 사사로운 정으로 얽힌 관계가 아니었기에 만일 자신들의 신의에 반한다면 언제든 플란츠의 명을 거부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플란츠는 브리센과 결탁한 예순 여섯 가문을 가지 치기 하듯 은밀하게 쳐내는 일에 환멸을 느낀 나머지 그 마법사가 이 틈을 타 도망을 친 거라면 그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여겼다. 그리고 돌아오지 않는 마법사를 대신하여 숲에는 자신이 직접 가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빠르면 빠를 수록 좋다고 여기면서도 곧바로 실행에 옮기지 못한 건 그 즈음하여 대사막 인근에서 수상한 동향이 포착된 탓이었다.

 

  돌아오지 않았던 마법사가 돌아온 건 그로부터 일주일 뒤였다. 그는 숲에서 부모님을 뵈었다고 했다. 플란츠는 그가 다섯 살이 되던 해 부모님이 곰에 물려 숨졌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틀림없는 부모님을 만났고 심지어 그들과 칠면조를 뜯어 먹으며 화기애애한 시간을 보냈다고 했다.

 

  그래, 마치 예전처럼.

 

  플란츠는 그날 아르센을 불러 명을 내렸다. 양신전쟁 이전의 일화가 기록된 책을 모두 찾아오도록. 마법사. 아르센은 자신이 모르는 곳에서 플란츠가 죽음을 맞이했을 때와 같은 얼굴을 하며 미간을 찡그렸다. 영 내키지 않아 했고 무척이나 꺼림칙하게 여겼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아르센은 하기 싫은 일은 죽어라 하지 않는 마법사였기에 플란츠의 명을 받들었다. 명색이 하얀 악마들의 군단장인 아르센과 그 휘하의 사단장들은 실로 모양 빠지게도 사흘 밤낮이나 자신들의 몸을 갈아가며 시스테라 대륙 전역에 퍼진 고금도서를 수집했다. 플란츠가 남작의 보고를 듣고 막연하게 세웠던 가설은 그들이 수집 한 책을 본 순간 현실이 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악신이 깨어나기 직전, 대륙 곳곳에서 시간과 공간이 뒤틀린 장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플란츠는 얼마 전부터 꾸기 시작한 흐릿한 꿈을 떠올렸다. 이 세상을 거대한 해일처럼 뒤덮는 거대한 악의. 세상을 지키기 위해서는 완전무결해야 하는 신이었기에, 세렌티가 태초에 잘라 낸 자신의 반쪽이자 대륙의 절반을 죽음으로 몰아간 원흉. 그리고 그런 종말을 당당하게 마주 보고 선 별빛처럼 빛나는 자의 모습. 플란츠는 자신이 갑자기 꾸기 시작한 꿈과 갑자기 나타난 이상한 숲이 악신의 재림을 알리는 하나의 지표라 여겼다. 그래서 플란츠는 아르센만을 대동하고 숲으로 향했다. 지고의 자리에 있었음에도 모두가 그의 죽음을 축복처럼 바라고 있었기에 한밤중에 궁을 빠져나가는 미친왕의 걸음을 제지하는 자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숲은 과연 남작이 말한 대로 카이리스의 북서부에서는 볼 수 없는 행색을 하고 있었다. 숲의 어귀에서, 아르센은 이 안에 무엇이 있을지 모르니 부디 몸을 조심하시라 말했지만 그가 입을 떼었을 때 플란츠는 이미 안쪽으로 성큼 걸음을 옮긴 뒤였다. 플란츠의 모습은 아르센이 붙잡을 틈도 없이 숲에 녹아들었고 아르센은 황급히 그를 뒤쫓았다. 그러나 아르센이 안쪽으로 발을 들이자마자 그를 반긴 건 플란츠가 아닌 살아 숨쉬는 것처럼 너울거리는 울창한 숲이었다. 그 어디에서도 미친 왕의 모습은 찾아 볼 수 없었다.

 

  보석과 유리를 곱게 갈아 어지러이 흩뿌린 듯한 햇살 아래 완벽한 정적과 고요만이 아르센을 반겼다. 이내 아르센은 자신의 마법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결계가 쳐졌음을 알았다. 그렇다면 숲이 플란츠를 부른 것일까. 어찌 되었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그가 돌아 나오기만을 기다리는 길뿐이었다. 운명은 실로 잔혹해서 살기를 바라는 자에게는 가차없는 죽음을 선사했고 내일 죽어도 상관없을 것처럼 위태로운 칼날을 맨발로 걷는 자에게는 놀라운 생을 부여했다. 아르센은 자신의 어린 주군이 살아 돌아오리라 확신했다.

 

  아르센은 드높은 하늘까지 그 가지를 뻗고 있는 거대한 나무에 등을 기대 앉았다. 숲은 다른 곳보다 이르게 어둠을 흡수하는 성질이 있었다. 그가 몸을 기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둠이 녹인 설탕처럼 대지에 끈적하게 스며 들었다. 어찌된 영문인지 오늘은 달조차 구름 사이로 그 모습을 감추어 보이지 않았기에 짙은 어둠이 사방을 장막처럼 내리 덮었다. 불현듯 아르센은 플란츠를 떠올렸다. 그 어둠을 제 몸처럼 두르고 눈을 뜨고 있음에도 뜨지 못한 자처럼 위태롭게 걷는 어린 왕을 떠올렸다. 퍽 유쾌한 생각은 아니었다. 따라서 아르센은 쓸데없는 생각을 떨치고자 생각의 가지를 다른 쪽으로 뻗어나갔지만 공교롭게도 생각은 플란츠를 구심점으로 하여 이어질 따름이었다.

 

  원치 않게 이어진 생각은 끝내 미친 왕을 처음 대면한 날에까지 가닿았다. 물 한 점 스며들 여지 없는 불모의 땅처럼 한없이 삭막했던 눈을 떠올리고 나니 오래 전에 죽은 제3왕자가 당연한 수순처럼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죽은 자가 살아 오기를 바라며 세뉴 강에 안네루시아를 띄우는 날이었다. 아르센은 짐승의 아가리처럼 그 입을 벌리고 있는 어두운 숲을 노려 보았다. 오래 전에 부모님을 잃은 발칸의 대원은 자신이 숲에서 돌아가신 부모님을 뵈었다고 했다.

 

  아르센은 확신했다. 숲은 처음부터 플란츠를 부르고 있었다.

 

 

 

*

 

 

 

  홀로 걷는 일에 익숙했던 왕은 한참이 지난 뒤에야 파란머리 마법사가 보이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나 난데없는 일행의 실종에도 왕은 당황하지 않았다. 어차피 누구도 제 곁을 평생토록 지키고 서 있으리란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던 탓이다. 플란츠는 내일의 새로움을 기대하기보다 다가 올 상실을 준비하는 데 익숙한 사람이었다. 손에 쥐기는커녕 가까스로 손에 닿았던 것들마저 당연한 장례처럼 떠나보내는 삶이 그의 인생이었다. 아르센은 플란츠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오래 그의 곁을 지키고 있는 축에 속했다.

 

  동시에 플란츠는 자신이 죽기 전에는 이 숲을 빠져 나가지 못할 것이란 생각도, 영겁토록 이 숲에 갇혀 있을 것이란 생각도 하지 없었다. 그의 삶에는 부채가 너무나도 많았고 그 부채로 말미암아 그는 살아남아야만 했다. 이름도 모르는 수많은 타인의 목숨을 값으로 지불하여 유예시킨 자신의 생이 이런 데서 끝이 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자신의 삶은 아주 공정하게 재단된 끝에 정확한 값을 치르는 방식으로 끝이 나야만 했다.

 

  플란츠는 신중하게 걸음을 옮겼다. 희끄무레한 어둠이 물안개처럼 퍼져 있었던 숲은 중심부로 들어갈수록 어째서인지 점점 밝아지고 있었다. 사위가 마치 눈이 뒤덮인 평원처럼, 아니 그보다는 온 세상에 어둠이 두루 내리깔린 시간에 별빛이 폭포수처럼 쏟아지듯이 희게 빛났다. 그 풍경은 플란츠에게 마음 한 구석이 서늘하게 베이는 듯한 기분을 선사했다. 그토록 명민한 머리로도 어째서 그런 기분이 드는지는 알지 못했으나 계시처럼 알게 된 게 하나 있었다. 그의 삶은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해서 나아가는 의무의 연속이었다는걸. 이 앞으로 나아가야만 한다는걸. 플란츠는 불가사의한 힘에 떠밀리듯이 발걸음을 옮겼다. 태어난 이후로 줄곧 해온 일이었기에 어렵지 않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플란츠가 숲의 중심부에 이르렀을 때, 그의 앞에 펼쳐진 건 아주 드넓은 공터였다. 플란츠는 두어 번 눈을 깜박였다.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로 밝혀둔 것처럼 눈이 부시도록 환하게 타오르는 광경 속에 이런 자리에는 어울리지 않는 탁자가 놓여 있었다. 심지어 그 탁자 위에는 체르밀 궁에서 자주 보곤 했던 티포트와 찻잔까지 옹기종기 놓인 채였다. 플란츠는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하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런 안일한 생각을 하기엔 그 위에 놓인 찻잔과 티포트가 너무나도 눈에 익었으므로. 플란츠는 다만 생각했다. 실로 질 나쁜 장난이군. 그때 그런 그의 마음을 알았다는 듯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형님!"

 

 

  플란츠는 소리가 들린 쪽으로 삐걱대는 목을 돌렸다. 체르밀에서 가장 어린 아이가, 일찍이 별이 되었다고 믿었던 아이가 그곳에 있었다. 플란츠는 주저앉지 않았다. 왕은 그가 밟고 올라 선 사람을 생각해서라도 함부로 무릎을 꿇을 수 없는 위치에 있었다. 그저 잿더미처럼 무너지는 숨이 발치로 무겁게 떨어질 따름이었다. 다섯 살이 되던 해에 부모님을 잃은 마법사는 숲에서 부모님을 보았다고 했다. 르니에리 향기에 단 한번도 잠식되지 않은 머리는 오늘이 어떤 날인지를 떠올렸다. 플란츠는 오래 전에 거스러미가 인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가 피를 토해내는 심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 어디에서도…."

 

 

  죽은 자는 살아 돌아오지 못하는 법이거늘. 플란츠는 그렇게 말하려 했다. 그래, 그 어디에서도 죽은 자는 살아 돌아오지 못한다. 만약 그게 가능했다면 지극히 위대한 고룡이 자신의 반려를 잃는 일도 없었을 것이고, 세크리티아 대왕이 네리아드를 살리지 못한 슬픔에 하늘을 찢어 낼 듯한 비통을 터트리며 울부짖을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죽은 자가 살아 돌아오는 날이 있기를 바랐다. 단 하루라도 좋으니 자신이 사랑했고 떠나 보내야만 했던 이를 만나기를 바랐다. 그런 바람이 모이고 모여 카이리스에서는 암암리에 10월의 마지막 일을 기리는 풍습이 생겼다. 본래는 망자를 떠나 보낼 때 세뉴 강에 올리는 안네루시아를, 이 날 하루만이라도 망자를 다시 만나길 바라는 바람을 담아 강 위에 띄우는 것이다. 이때 만약 안네루시아가 강의 흐름을 역류하여 오면 죽은 자가 살아 돌아 왔음을 뜻한다.

 

  사람들은 안네루시아가 강의 흐름을 거슬러 자신에게 되돌아 온다면 그 즉시 사랑하는 이에게 하루의 유예를 선사한 세렌티를 찬미하며 집으로 돌아가고자 했다. 지금까지 그런 사례가 목격된 바는 없었지만 죽은 이와의 재회를 간절히 염원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사그라들 줄을 몰랐다.

 

  사람들은 죽음이 생에 관여하는 모순을 기적처럼 바랐다. 하지만 플란츠는 단 한 번도 그런 것 따위를 바란 적이 없었다. 그러니 이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네가 살아 돌아왔을 리 없다. 플란츠는 눈앞에 있는 칼리안을 닮은 무언가에게 그런 말을 하려 했다. 할 수 없었다.

 

  길게 자라 내린 앞머리 사이로 드러나는 그 눈이 기억에 있는 것과 똑같아서, 물을 머금은 시나스타가 그 두 눈에 영롱히 박혀 있는 것만 같아서, 웃을 때 볼우물이 깊게 파이는 게 이 순간을 박제해두고 싶을 만큼 사무쳐서, 안네루시아보다는 라프라니아의 빛을 닮았다 여기고 싶었던 붉은 입술이 자아내는 자신의 이름이, 그 이름이 온몸을 난도질하는 고통조차 달가워서, 그래서 플란츠는 하려던 말을 목구멍 아래로 수장시켰다. 성에라도 언 것처럼 파르라니 질렸던 분홍빛 입술이 몇 번이고 떨렸다. 플란츠는 욕지기처럼 치미는 것들을 참아 내며 가까스로 말을 이었다.

 

 

  "이렇게 밝은 빛은. 보지 못했는데."

 

 

  그래서 이렇게 밝았나. 별이 되었던 네가 땅에 내려왔기에. 작게 벌어진 입술에서 새어나온 문장은 추운 겨울 날 서리서리 엉켜 하늘로 올라가는 숨처럼 희끄무레한 꼬리를 늘어뜨리며 공중으로 올라갔다. 어느 틈엔가 준비해 둔 다과 테이블 앞에 야무지게 착석한 칼리안이 플란츠를 보며 예쁘장하게 입꼬리를 당겼다. 망막에 접붙인 것처럼 한시도 잊을 수 없었던 웃음. 그럼에도 잊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던 웃음. 감히 기억하는 건 어린 동생의 죽음을 모욕하는 일이라 여기며 하루에도 수십번씩 무엇도 잊지 못하는 뇌를 짓이기는 상상을 하게끔 만들었던 웃음. 그 웃음이 따스한 선물처럼 오래 전에 죽은 눈 위에 내리앉았다.

 

 

  "딸기, 아직 좋아하세요?"

 

 

  칼리안이 자신의 맞은편을 가리키며 말했다. 플란츠는 허리에 무거운 닻을 매고 질질 끄는 것처럼 비척비척 걸어 칼리안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래."

  "다행이다!"

 

 

  칼리안은 정말 다행이라는 것처럼 활짝 웃으며 티포트에 담긴 차를 따랐다. 얇게 저민 딸기로 깊게 우린 딸기차의 향이 코끝을 파고 들었다.

 

 

  "싫어지셨으면 어쩌나 걱정했어요."

  ".그럴 리가."

 

  

  애초에 그 자신의 호오 같은 건 아무래도 좋은 것이었다. 플란츠는 칼리안이 건넨 찻잔을 말없이 받아 들었다. 그 날 물어 보았을 때 네 붉은 눈을 보고 떠오른 과일이 딸기였을 뿐, 사과가 떠올랐다면 사과를 좋아한다 했을 것이고 체리가 떠올랐다면 체리를 좋아한다고 했을 것이고, 이도저도 다 상관없이 네가 다른 걸 좋아한다고 말했다면, 그 역시 좋아한다고 했을 것이라는 말은 차마 하지 못한 채.

 

 

 

*

 

 

 

  왕은 몹시도 명민하였다. 차라리 한번쯤은 눈을 감고 모르는 체하는 게 나을 부분에서마저 그 명민한 머리는 왕을 내버려 두지 않았다. 그 때문에 왕은 자신이 걸어온 걸음걸음마다 놓인 꽃의 시체를 자신의 손이 닿지 않았다 하여 모르는 척 할 수 없었다. 브리센이 저지른 악업은 모조리 그의 죄로 이어졌다. 세렌티의 축복이라 불러도 좋을 만큼 영특한 두뇌는 그가 두 눈을 감고 스스로를 속이게 두지 않았다. 언제나 그러했다.

 

  그래서 왕은 알아차렸다. 갓 태어난 병아리처럼 삐약거리며 제 흥에 겨워 재잘재잘 말을 이어가던 아우가 "형님이 어쩔 수 없이 그러셨다는 거, 저는 알고 있어요. 전 형님을 원망하지 않아요. 용서했어요. 전부."라고 말했을 때에. 미처 피어보지도 못하고 꽃가지가 꺾이는 것처럼 죽어야만 했던 자신의 아우가, 단 하루만이라도 살아 돌아온 게 아니라는걸.

 

  다섯 살이 되던 해에 자신의 양친이 곰에 물려 숨졌다고 한 발칸의 대원은 숲에서 돌아가신 양친을 만나 칠면조를 뜯어 먹으며 화기애애한 시간을 보냈다고 했다. 그는 이전부터 딱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 부모님을 다시 만나 원없이 고기를 뜯어보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그게 유일한 꿈이라는 말은 덤이었다.

 

  그래, 그 어디에서도 죽은 자는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 왕은 오래 전에 지상으로 추락한 별의 잔재를 빼어 들었다. 결국 두 번이나 동생을 구하지 못한 이가 처음으로 바치는 시나스타였다.

 

 

 

*

 

 

 

  아르센이 다시 플란츠를 본 건 예리하게 깨진 사기 조각처럼 파르스름한 빛이 숲을 가득 뒤덮을 즈음이었다. 근 몇 시간이 지난 뒤에야 숲에서 빠져 나온 플란츠는 아르센이 표현하기에 실로 가관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르센 헤르츠는 플란츠 루 룬 카이리스의 곁에 서서 그의 종말을 무엇 하나 빼먹지 않고 지켜보기로 결심한 자였으나 그의 가장 인간적인 슬픔을 들여다 보고자 한 적은 없었다. 그럼에도 이번만큼은 물을 수밖에 없었다.

 

  일 년 뒤 자신이 모시는 자와 함께 타국을 침략하게 될 발칸의 군단장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뭘 보고 오셨습니까.

왕은 대답한다. 무엇도 비추지 못하는 무감한 눈으로.

 

 

  "깨어나야 할 꿈."

 

 

 

 

2019. 10. 31 할로윈 기념으로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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