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리플란] 평범한 인생

2차/적왕사2020. 10. 9. 09:21

 

 

  구석구석 향기 없는 라리시움이 만개한 날이었다. 플란츠의 생일을 맞아 눈송이처럼 흰 꽃들이 체르밀 궁에서부터 플란츠의 시선이 닿는 곳곳을 마법 등불처럼 눈이 부시게 밝혔다. 왕족의 탄신일에는 라프라니아로 궁을 장식한다는 법칙은 칼리안의 생일 때 깨진 지 오래였지만 아무리 그래도 파격적인 배치였다. 비록 종이로 만든 모조꽃이긴 했으나 그때도 궁 구석구석을 수놓은 건 피처럼 붉은 꽃잎이었다. 요컨대 생명을 상징하는 붉은빛을 안배해둠으로써 왕족의 장수와 무탈을 기원하는 식으로 그럭저럭 구색은 맞추었다는 얘기다. 그러니 플란츠의 탄신일에 자신의 얼굴을 알리고자 지그프리드 관을 방문한 귀족들 사이에서 말이 나오는 것도 당연했다.

 

 

  "전하께서 제2왕자에게 세자위를 내리시더니 이제는 홀대하시기로 마음을 먹은 거 아닙니까."

  "그렇다면 역시 일전에 세자 저하께서 발칸을 이끌고 후작 저로 가신 일을 마음에 두신……."

  "하지만 꽤 된 일일 뿐더러 그때 엘라자르를 몸소 보내시지 않았습니까?"

  "그게 꼭 왕세자의 위신을 생각해서라고는 볼 수 없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보다는……."

 

 

  지그프리드 관에 모인 모든 이들이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상석에서 플란츠는 짧은 숨을 뱉었다. 플란츠의 곁에 선 키리에가 플란츠 쪽으로 고개를 숙이고 귀족들 사이에서 오가는 말을 소근소근 전했을 때였다. 소란스럽고 왁자지껄하며 금세라도 뭔가 일이 터질 것처럼 유쾌한 분위기도 무도한 소리를 완벽하게 가리는 장막이 되지는 못했다. 분위기에 취해 제 이야기를 늘어 놓기에 여념이 없는 다른 귀족들에게라면 또 모르겠으나 칼리안의 충직한 따까리에게는 그랬다.

 

  사교계는 비열하고 얄팍한 의심을 통해 누군가를 배제하고 그 과정에서 자신들의 입지를 공고히 하는 방식으로 계승되어 온 사회였다. 그것을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익히 알고 있었음에도 이따금 숨이 막히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눈에 익을 만큼 본 광경이라고 생각했는데도 문득 목께까지 꽉 채운 단추가 갑갑하게 여겨졌다. 플란츠는 무의식중에 목덜미에 손을 갖다대려다 말고 앞에 놓인 잔을 움켜쥐었다. 피처럼 붉은 석류 주스가 가볍게 찰랑였다.

 

  얘기를 하던 중 뒤늦게 아차 싶었는지 한차례 소리가 잦아 들었다. 몇몇 이들이 눈치를 살피듯 플란츠가 앉은 쪽을 곁눈질 했다. 플란츠는 그 시선을 알면서도 짐짓 모르는 체하며 석류 주스만 가만히 목구멍으로 넘겼다. 그러자 불 위에 모래를 끼얹었을 때처럼 잦아 들었던 소리가 다시금 그 크기를 은근하게 키웠다. 눈치를 보던 이들이 조금 더 대담하게 이야기를 전개시켜 나갔다. 르메인이 세자를 홀대하기로 마음을 먹은 게 아니냐는 터무니없는 속삭임은 공상에 공상을 더해 급기야는 제3왕자의 세자위 찬탈설로까지 이어졌다.

 

 

  "쉿, 말 조심 하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로하임 경."

  "허나 그게 아니고서야 칼리안 왕자님께서 왕세자 저하의 탄신일을 기념하고자 열린 연회 때 잠깐 얼굴만 비추고 돌아갈 리가 없지 않습니까. 그토록 우애가 좋다고 알려진 두 분이었는데요."

  "그것도 그렇습니다만……."

  "더군다나 잠깐 얼굴을 내비치셨을 때 마치 들으라는 듯이 '드릴 게 없어 죄송합니다. 저하.'라는 말까지 하지 않았습니까. 게다가 전하께서는 어떠한 질책도 하지 않으셨고요. 이건 역시……."

  "그러고 보면 브리센 남작의 그 일이……."

 

 

  한 백작이 애매하게 말 끝을 흐렸다. 생명을 상징하는 붉은 꽃 대신 향기 없는 라리시움을 안배한 이유가 무엇인지에서부터 칼리안의 세자위 찬탄설로 뻗어 나갔던 이야기가 급작스레 궤도를 수정하여 몇 달 전에 있었던 일로 이어졌다.

 

  비밀은 감추어 내려고 하면 할수록 자신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성질이 있었다. 브리센 남작이 브리센 후작의 목을 치려 했다는 사실은 이제는 사교계에서 모르는 이가 없는 불명예스러운 일화였다. 그 누구보다도 자신의 명예를 중히 여겼던 그레이는 그의 아들이 제 목을 치려 한 사실을 엄중히 은폐하고자 하였으나, 그가 세간의 시선으로부터 감추어 내려 한 사실은 어느 틈엔가 공공연한 비밀이 되어 아스트리샤 거리를 휩쓸었다.

 

  라시드 브리센이 그레이 브리센을 내치려 했다는 이야기는 늘 타인의 치부를 갈급하는 귀족들의 목마름을 해갈해주었다. 그뿐만 아니라 자신의 하나뿐인 어머니를 제 손으로 내친 왕세자를 떠올리게끔 했다. 그것은 몹시도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새끼 늑대라는 이명이 붙은 게 벌써 언젯적 일인데도 몇몇 귀족들은 플란츠를 브리센의 피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이다. 브리센에는 배반과 약탈과 패륜의 피가 흐른다. 귀족들은 혀 끝에서 달콤하게 부서지는 아이싱 쿠키를 음미하듯 그 간결한 문장을 씹고 뜯고 맛보기를 즐겼다.

 

  그리고 사람에게는 자신이 생각하거나 보는 대로 타인의 속내를 짚어보는 오만한 경향이 있었다. 아스트리샤 거리를 휩쓴 브리센 부자의 이야기를 시종으로부터 전해들은 이들은 르메인이 전전긍긍해 하며 밤잠을 설친다고 생각했다. 왕세자가 발칸을 이끌고 브리센 후작저를 포위한 날부터 르메인은 줄곧 목덜미가 쌔한 기분 속에서 지낼 것이라 여겼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브리센에는 자신의 근본을 부정하고자 하는 피가 흐르고 있었고 마법사에게는 단 한 명만으로도 기사단을 궤멸시킬 수 있는 힘이 있었다.

 

  그 어마어마한 힘을 지닌 이들이 모여 만들어진 발칸이 왕세자의 명에 따라 국왕의 숨통을 움켜쥐는 날이 오지 않으리라고 그 누가 확신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므로 그들은 이렇게 결론을 내린 것이다. 그 날 국왕이 엘라자르를 보낸 것은 사실 왕세자에게 경고하기 위함이었으며, 국왕의 마음은 그날부터 차근차근 세자에게서 떠나기 시작했노라고. 그것을 기민하게 눈치 챈 3왕자가 이 틈을 타 세자위를 찬탈하려 든다고.

 

 

  "과연, 일리 있는 말씀입니다. 새끼 늑대라 하여도 근본은 변하지 않으니까요. 그러고보면 지금도 왕세자의 곁에 그 기사가 있지 않습니까. 이 역시 경고의 의미겠지요. 허면 이 라리시움은……."

  "제3 왕자님의 입김이 닿고 그것을 전하께서 수용하신 결과 아니겠습니까."

 

 

  이야기가 몇 번이고 돌고 돈 끝에 누군가 명쾌한 해답처럼 내놓은 그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아니고서야 하필 전 왕비가 애지중지하던 르니에리와 같은 빛깔을 띠면서, 향기라고는 하나 없는 라리시움을 안배해 둘 이유가 없어 보였다. 그러니 칼리안은 마땅히 그 향기를 지녀야 할 꽃이면서도 향기라고는 일절 없는 라리시움을 통해 플란츠에게 일종의 선전포고를 한 것이다. 자신이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든지 플란츠를 왕세자의 자리에서 끌어 내릴 수 있음을 암시한 것이다. 지금 플란츠가 손에 쥐고 있는 그 모든 것들을 어려움 없이 빼앗고, 한 순간에 플란츠를 향기없는 라리시움처럼 볼품없는 존재로 전락시킬 수 있음을 암시한 것이다.

 

  실리케의 최후가 그러했듯이.

 

 

  "그게 사실이라면, 실로 우아한 방식으로 자신의 야욕을 드러내신 셈이군요."

 

 

  한숨과 놀라움이 반반 섞여 마치 두려움처럼 뱉어진 말에 몇몇 귀족이 다시 심란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리고 키리에가 쉼없이 전해주는 말을 토대로 그들이 세자위 찬탈을 언급하는 이유를 추론해 낸 플란츠는 각자가 생각하고 보는 대로 모든 현상을 파악하고자 하는 그 우스운 꼴을 내버려 두었다. 우회적으로 말하는 수법에 익숙해진 이들이 라리시움 하나를 두고 온갖 허황된 추측을 내뱉는다 하여 놀라울 것은 없었다. 자신의 하나뿐인 동생은 아직도 파릇파릇한 콩줄기를 키워내는 걸 평생의 업으로만 삼을 줄 알지 세자위를 빼앗을 생각은 요만큼도 하지 않으며, 라리시움은 꽃향기를 꺼려하는 자신을 위해 소 같은 르메인이 안배해둔 것이라고 정정해 줄 필요도 없었다. 낭설일지언정 그것이 장차 정치적으로 필요한 소문이라면 그저 흐르는 대로 두는 게 가장 좋았다.

 

  맹수의 엄니로 자신을 제외한 모든 것들을 물어 뜯는 법밖에 모르는 이들을 속이기 위해서라면. 플란츠와 칼리안의 사이가 갈라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이들을 덫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라면.

 

 

  "이렇게 되면 역시 란델 왕자님 편에 서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얼마 전에 텐실의 왕세자가 찾아왔다죠. 장차 텐실과 손을 잡자는……."

 

 

  불온한 말들이 한여름의 햇빛처럼 끈적하게 고였다. 그러나 이런 자리에서 섣불리 발설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발언이라는 걸 깨달은 이들의 어색한 웃음소리가 금세 그 위로 뒤덮였다. 끈적하게 고인 말들이 웃음 아래에서 시궁창의 물처럼 흘러내렸다. 이제 연회장을 메우고 있는 것은 금빛 샴페인처럼 휘황한 빛과 무언가를 감추기 위한 인공적인 미소뿐이었다.

 

  얼마 안 가 플란츠는 조금 전까지 삼삼오오 목소리를 높여 말하던 이들 사이에 명백한 의도를 담은 시선이 소리없이 오가는 것을 보았다. 적어도 이번 주 내로 저들 간에 은밀한 회동이 있을 터였다. 거기까지 생각을 끝마친 플란츠는 방금의 시선까지 포함하여 오늘 보고 들은 걸 모조리 칼리안에게 전해 줄 심산으로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등 뒤에 익숙한 손길이 닿은 건 그때였다. 돌아보지 않고서도 알 수 있었다. 칼리안이라는걸.

 

  칼리안에게는 존재만으로도 다른 사람을 압도하는 힘이 있었다. 그가 원하건 원하지 않건 간에 타인의 시선을 주목시키는 힘이 있었다. 그저 연회장에 다시금 모습을 드러낸 것만으로도 소란스러운 연회장을 가라앉히기에는 충분했다. 떨떠름한 얼굴로 선 플란츠에게 "웃으셔야죠. 형님." 하고 재빠르게 속삭인 칼리안이 해사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저하께서 피곤하신 것 같으니, 이만. 경들은 천천히 즐기도록 하세요."

 

 

 

*

 

 

 

  "나의 형님께서 이상한 부분에서 고지식한 구석이 있으셔서."

  "짖지."

  "마법사들과 약속하신 걸 잊으셨을 리는 없는데, 그러면 왜 여태 기별이 없으실까……. 그걸 생각해보니 아무래도 자연스레 나올 때만을 재보고 계신 것 같기에 이 아우가 형님의 수고를 덜어드리고자 모시러 간 것뿐입니다."

  "……그래."

 

 

  빌헬름 관에 빼곡하게 늘어 선 설치물을 보며 플란츠는 다소 얼빠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역시나 마법사들 중에서도 가장 돌아버린 카이리스의 마법사였으며 그 돌아버린 카이리스의 마법사 중에서도 더 돌아버린 발칸의 마법사들이었다. 생일까지 한 달 여 남짓 남았을 때부터 부군단장님의 생신은 제일 화려하고 멋지고 쿨하게 치러드려야만 한다고 별 난리에 난리를 다 치며 돌림 노래를 부를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이 말도 안 되는 광경을 실행에 옮기고도 남을 놈들이라는걸!

 

 

  "마음에 드십니까, 저하?"

  "너무 감격하셔서 말문까지 막히신 건 아닌가 모르겠습니다."

 

 

  그때 빌헬름 관에 부군단장님의 얼음 동상을 세워두는 것으로도 모자라서 아예 마법으로 부군단장님의 건물 하나를 세우면 안 되겠냐는 말을 하는 놈들이 있긴 했지만 설마 그걸 실행에 옮기랴 싶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말도 안 되는 헛소리 하지 말라는 요지의 문장을 무척 부드럽게 꺼내며 그 말도 안 되는 제안을 일축했으니 그 화제는 거기서 일단락 된 줄로만 알았다. 일축하자마자 한 풀 꺾인 얼굴을 하더니, 그래도 좌우지간 세상에서 제일 화려하고 멋지고 쿨한 생일상을 치러드릴 테니 부군단장님께서도 다가 올 생일을 기대하며 지내셨으면 좋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던가.

 

  앞의 말이 무척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다가 올 생일을 기대하며 지내셨으면 좋겠다는 그 말이 무척 좋았다. 지금까지 한 번도 그래 본 적이 없어서. 누군가에게는 태어난 날이 곧 축복이라지만 자신에게는 축복과 동의어로 여겨진 적은 한 번도 없었기에. 그래서 몹시도 말 잘 듣고 순한 왕세자답게 기대하며 지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인생을 사는 동안 기대를 해 본 적이 희박해서 그들이 말한 기대에 부응하는 기대를 하면서 지낸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기다렸다.

 

  그리고 정확히 어제였다. 발칸으로부터 서신이 상달되어 왔다. 네모 반듯한 편지에는 탄신 연회가 끝날 즈음에 빌헬름 관으로 와주십사 하는 요청이 정갈하게 적혀 있었다. 말로 해도 되는 것을 굳이 격식 따져가며 서신으로 전한 것은 이상한 데서 융통성이 없고 고지식한 마법사다운 방식이라고 할 법했다. 플란츠는 그 즉시 빌헬름 관으로 달려가 루시와 안네에게(루시와 안네는 니들렌이 지니고 다니는 소금 넣지 않은 닭고기를 호시탐탐 노리곤 했다) 닭고기를 주고 있는 니들렌에게 대답했다. "알았어."

 

  편지에 적힌 매우 공손한 그 문장이 검에 새긴 시나스타의 필체와 몹시도 같았으나 부군단장이자 왕세자 된 도리로 너그럽게 모른 척한 건 덤이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르메인의 축사다 뭐다 하며 연회가 길어졌고, 그렇다고 주인공인 이상 멋대로 자리를 비울 수도 없었으니 언제쯤 빌헬름 관으로 가면 좋을지 고민하던 차에 칼리안이 온 것이었다.

 

  플란츠는 칼리안의 손에 이끌려 약속한 시간보다 조금 늦게 빌헬름 관에 도착했다. 그리고 도착하자마자 미친 마법사들이 벌인 행태를 목격한 덕분에 할 말을 잃은 얼굴로 눈만 깜박여야만 했다. 가까스로 입을 열 수 있게 된 건 시도때도 가리지 않고 멍멍 짖는 아우님께서 멍멍 짖기 시작한 이후부터였다.

 

 

  "……."

  "부군단장님 동상이랑 건물은 안 된다고 하셔서, 그럼 루시랑 안네는 어떨까 싶었거든요. 앗, 설마 저하 놀라셨습니까?"

 

 

  그래, 놀랐다.

 

  내 동상이랑 건물 세우지 말라고 했다고 루시랑 안네의 동상이랑 조각상을 세울 줄은 몰랐으니까.

 

 

  "참고로 부군단장님께서 루시와 안네의 역동성에 중점을 두고 표현해보라 하시기에 그렇게 했습니다."

  "저희보다 저하께서 더 잘 아실 테지만……. 저건 빗방울을 잡는 루시, 저건 부군단장님의 서류에 앞발을 올려 놓는 안네, 저건 닭고기를 빼앗으러 오는 냥아……, 아, 아니. 닭고기를 가지러 오는 안네와 루시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마법사."

 

 

  쓸데없이 마법을 잘 하는 놈들만 모인 탓에 루시와 안네의 동상은 어디에 세워놔도 부끄러울 것 없는 위용을 뽐내는 것은 물론이요 니들렌이 말한 대로 동상 같지 않은 역동성마저 지니고 있었다. 심지어 그게 다가 아니다. 어두운 밤이라 못 볼 게 염려 되었다면 마법 등불로 주변을 밝히면 될 것을, 무슨 생각에서인지 루시와 안네의 눈은 별처럼 빛나고 있기까지 했다. 거기다 자유분방하게 뛰어 놀고 있는(동상이지만 이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빌어먹을 정도로 역동적이었으니까!)동상의 저 끄트머리에는 머리에 완두콩을 소중하게 올려 놓은 안네와 루시의 얼음 조각상이 있었다.

 

 

  "네."

  "내가……."

 

 

  하지만 플란츠는 몇 마디 말을 하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마주한 광경이 다소 어이없긴 했지만 이들이 어떤 마음으로 이런 짓을 했는지 모르지 않는다. 그것을 잘 알고 있기에 여느 때 같았더라면 웃기 바빴을 아우님도 지금은 조용한 거겠지. 플란츠는 짧은 한숨 같은 것을 뱉었다가 더디게 말을 이었다. ……고맙다는 말, 하고 싶어서.

 

 

  "쑥쓰러우니 그런 말씀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니들렌의 말에 곁에 있던 몇몇 발칸의 대원이 요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플란츠는 그들의 얼굴에 아침 햇살처럼 희번한 웃음과 미미한 부끄러움이 번지고 있는 걸 모르는 체했다. 니들렌이 큼큼거리며 목을 가다듬더니 입을 열었다. 실은, 저하의 생신을 축하드리고자 준비한 게 또 있습니다. 베른 경 것도 포함해서요.

 

  그 말을 시작으로 선물이 앞다투어 건네졌다. 정신을 차리고 나니 손에 한아름 안긴 것들은 태반이 루시와 안네에 관한 것들뿐이었지만 싫지 않았다. 싫을 리가 있겠나. 플란츠는 받은 것들을 소중히 품에 그러 모았다. 히나가 정성스레 털실로 짠 듯한 고양이 옷과 모자와 소금 들어가지 않은 닭고기와 루시와 안네를 본따 만든 미니 동상 등등……. 두 손 가득 끌어 안고도 벅찰 만큼 가득한 마음들이었다. 그 누구도 무가치하다 할 수 없는 다정이었다.

 

 

  "아, 그리고 이것도……."

  "이건."

 

 

  니들렌이 그제야 생각났다는 양 내민 건 파도에 쓸리고 갈려 물방울 모양으로 곱게 다듬어진 조약돌이었다. 전체적으로 푸르스름한 빛을 띠고 있었는데 달빛에 비추면 희끄무레한 흰빛으로 물드는 게 얼핏 보면 시나스타를 닮은 것 같기도 했다. 어딘가의 미친 마법사처럼 컬렉션이라도 완성하라는 건가. 일전에 받았던 소라껍데기와 돌들을 떠올리며 말하자 니들렌이 씩 웃으며 말을 받았다.

 

 

  그래주시면 감사하고요. 참, 다음 번에는 다른 것도 갖다 드리겠습니다. 뜨거운 태양 아래 타오르는 사막의 모래라든가, 그 사막에 잠든 드래곤의 비늘 같은…….

 

 

 

*

 

 

 

  "사랑 받고 계시네요. 형님."

 

 

  체르밀 4층으로 돌아와 받은 것들을 책상 위에 한가득 늘어 놓았을 때였다. 오래 전부터 체르밀 4층을 제 집처럼 여기게 된 검은 고양이가 플란츠의 뒤를 쫄래쫄래 따라와 곁에 섰다.

 

  사랑 받고 있음을 누가 모르겠냐마는 굳이 타인의 입으로 전해 듣는 건 어딘가 낯부끄러운 감이 있다. 그렇지만 그 말을 부정하거나 무시하고 싶지 않았던 플란츠는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랑 받고 있다는 말에 대답을 약간 주저하긴 할지언정 결국은 고개를 끄덕일 수 있게 되고, 사랑 받고 있다는 사실을 두려워하지 않고 기껍게 여길 수 있게 된 건 언제부터였을까. 깊게 생각해 볼 것도 없이 그 기원을 따지고 올라가 보면 언제나 눈앞의 고양이가 턱하니 걸리곤 했다.

 

 

  "기쁩니다. 이 아우는요."

 

 

  -게다가……. 아무것도 가져본 적 없어서 잃어버린 것도 없을 내 형님은. 아마도 여전히, 불행하시고.

 

 

  플란츠는 불현듯 어떤 예감, 혹은 영혼이 이끄는 소리에 순응하듯이 몸을 돌리고 칼리안의 뺨에 한 손을 올렸다. 더는 탁하게 잠겨 들지 않는 붉은빛 눈과 세상 그 무엇보다도 싱그럽게 피어날 준비를 끝낸 연둣빛 눈이 서로를 마주했다.

 

 

  "……전부, 아우님이 알려주셨으니."

 

 

  앞과 뒤를 잘라 먹고 맥락도 없이 툭 던져진 말이었지만 칼리안은 플란츠의 말을 알아 듣는 데는 이골이 난 사람이었다. 사랑 받는 것, 사랑을 받는 게 두려운 일이 아니라는 것, 사랑을 받는 게 잘못된 일도 아니라는 걸 네가 알려주었으니까. 그러니 지금의 내가 이렇게 존재한다는 의미를 담아 말 짧은 왕세자 답게 축약한 문장이었다. 그 말에 칼리안이 말 잘 듣는 고양이처럼 플란츠의 손에 제 뺨을 비비며 잔잔하게 웃었다.

 

 

  글쎄요. 어떨까요. 제 생각에, 아마도 이것만은 제가 알려드린 게 아닙니다. 형님께서는 원래 그런 분이셨어요.

 

 

  충분히 사랑 받을 자격이 있고 또 누군가를 사랑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는 말. 단지 엄동설한 언 땅 밑에 파묻힌 꽃씨처럼 움틀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자신이 언 땅을 손수 손으로 파헤치고 녹여가며 피어날 수 있게 도와준 것뿐이라는 말.

 

 

  "아……. 그러고 보니, 어쩌죠. 정말 준비하지 못했거든요. 선물."

 

 

  말 잘 듣고 예쁨 받는 고양이처럼 한참 자신의 뺨을 플란츠의 손에 비비며 고롱대던 칼리안이 문득 생각났다는 것처럼 입을 열었다. 갖고 싶은 거, 있으세요? 말씀 해주시면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준비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면서 유년의 순수함을 간직한 소년처럼 웃는다. 다분히 의도가 담긴 웃음이었다.

 

  플란츠는 두 손으로 칼리안의 뺨을 붙들었다. 그러고는 검은 고양이의 코끝을 아프지 않을 정도로 깨물었다가 놓으며 말했다.

 

 

  "준비 했잖아. 선물. 여기, 있는데."

 

 

  가장 갖고 싶은 거. 작게 접붙인 말에 칼리안이 자신도 모르는 새에 무럭무럭 자라 난 아이를 보는 것처럼 가슴이 벅찬 얼굴을 했다.

 

  

  "내가 욕심이 많아서."

 

 

  갖고 싶거든. 지금.

 

 

  "그 욕심은 언제까지 유효하신지 여쭈어 봐도 되겠습니까?"

 

 

  플란츠는 주인이 떠난 뒤에도 불이 꺼지지 않고 있는 지그프리드 관의 불빛을 일별하며 말했다.

 

 

  "아우님께서 그 날의 일을 사과하실 때까지."

  "평생, 이라는 거네요."

  "응."

 

 

  너무하세요, 형님……. 이렇게 욕심쟁이실 줄은 몰랐는데 말입니다……. 그리고 사방으로 튀는 물보라처럼 맑은 웃음이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서로의 입에서 터져나갔다. 약속처럼 손과 손이 맞잡아졌다. 둘은 각자의 손을 나무뿌리처럼 단단하게 얽은 채 왈츠를 추는 것처럼 걸어 침대로 향했다.

 

  영롱한 별빛과 달빛이 두 사람의 움직임을 따라 풍요롭게 쏟아져 내렸다. 이윽고 오금이 침대 모서리에 닿은 칼리안이 뒤로 풀썩 넘어지듯이 침대에 누웠다.

 

 

  "그러고 보니, 피곤하지 않으시겠어요."

  "이제와서."

  "하긴, 그것도 그러네요."

  "알았으면. ……가만히 있어. 칼리안."

 

 

  어느 틈엔가 제 위에 날래게 올라탄 플란츠의 한 손을 낚아챈 칼리안이 그 끝에 입을 맞추며 종달새처럼 속삭였다. 형님께서 원하시는 만큼 저를 취하세요. 그것이 저의 기쁨이 되기도 할 테니. 발칙한 고양이의 가슴팍을 드러내는 일에 막 열중하려던 플란츠가 한쪽 입꼬리를 끌어 당기며 오만하게 웃었다. 그러도록 하지.

 

 

 

2019. 11. 12 플란츠 생일 기념으로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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