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리플란] 성례

2차/적왕사2020. 10. 12. 15:44

 

  - 악마 칼리안이 보고 싶어서 충동적으로 쓰고 치움. 시대 배경x

 

 

 

  소리는 정확히 네 번 울렸다.

 

  이 집을 드나드는 사람들은 누구도 네 번이나 문을 두드리지 않았다. 어린 시종은 문을 열기를 망설이며 서성였다. 하필이면 이런 때에 저택에 누군가 찾아오다니. 어린 시종은 명령을 받고 수행하는 일에만 익숙했을 뿐 스스로 뭔가를 결정하고 행하는 데는 익숙하지 않았다.

 

  저택의 사람들은 누구나 그랬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모두가 저택의 부속품에 불과했던 탓이다. 커다란 저택에서 자아를 갖고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저택의 총 관리인인 시종장과 주인이 유일했다. 그러니 문을 열지 말지를 결정해줄 수 있는 것도 시종장과 주인뿐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시종장의 목숨은 어제 바닥에 떨어진 참이었다. 저택의 비밀을 함구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저택의 주인인 실리케 브리센은 사교계 모임에 참석하느라 마차를 타고 저택을 떠난 지 오래였다. 선택은 온전히 어린 시종의 몫이었다.

 

  집을 드나드는 실리케의 손님들은 늘 문을 세 번 두드리곤 했다. 그것이 저택을 방문하는 자들 간의 사소한 규칙이었다. 하지만 어쩌면 문 건너에 있는 사람은 그런 사소한 규칙을 까먹은 중요한 손님일 수도 있었다. 외진 데까지 귀한 걸음을 해주신 분을 소득 없이 돌려보냈다가는 어떤 사달이 날지 몰랐다.

 

  시종은 저번에도 실리케를 찾아 온 보안청의 고위 간부를 빈 손으로 돌아가게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실리케는 밀랍으로 주조된 것처럼 아름다운 얼굴에 명화 같은 미소를 띠며 그의 뺨을 올려붙였다. 먹여주고 재워준 은혜를 이런 식으로 갚다니. 실로 짐승만도 못하구나. 어린 시종은 순식간에 오른편으로 돌아간 얼굴을 감싸 쥐며 머리 위로 쏟아지는 폭언을 묵묵히 감내하였다. 실리케는 무척이나 화가 난 듯했지만 목소리에는 한 치의 흐트러짐조차 없었다. 오물 같은 순간 속에서도 그는 여전히 이 저택의 가장 높은 곳에서 피어나는 고귀한 르니에리였다.

 

  그때 실리케의 손찌검에 터져나간 뺨은 일주일이 지나도록 아물지 않았다. 그래도 그만하면 운이 좋게 끝난 일에 속한다는 걸 어린 시종은 알고 있었다. 이를 테면 길을 가다가 1플로린에 상당하는 금화를 주운 격이었다. 동시에 시종은 자신의 인생이 무수히 많은 불운으로 점철되어 있다는 것 또한 알았다. 행운의 여신은 그 순간 자신의 손을 떠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었다.

 

  이번에는 겨우 뺨을 올려붙이는 정도로는 끝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실리케는 멍청한 짓을 세상에서 가장 혐오했다. 만약 문 건너에 있는 사람이 보안청의 고위 간부처럼 중요한 손님이라면, 이번에는 그 귀하다는 상아로 만든 조각상 너덧 개가 자신의 머리를 과녁 삼아 날아들지도 모를 일이다.

 

  문 하나를 두고 생이 긴박하게 오갔다. 어린 시종은 바싹 말라오는 혓바닥을 침으로 축였다. 건너편에서 한 번 더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선택의 시간이었다. 그는 눈을 질끈 감고 문고리를 잡아 당겼다.

 

 

  “안녕하세요. 좋은 오후군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시나요?”

 

 

  어린 시종이 문을 열고야 만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는 데는 1초면 충분했다. 문 밖에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검은색으로 물든 청년이 서 있었다. 청년은 구시대의 유물로 생각되기 쉬운 수수한 로브를 입고 있었는데, 후드를 푹 눌러쓴 탓에 청년의 얼굴을 알아보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그럼에도 때늦은 직감이 시종에게 말해주고 있었다. 눈앞의 청년은 결코 중요한 인사 따위가 아니며, 지금 이 순간 문을 연 행동은 그가 평생에 걸쳐 두고두고 후회하게 될 수 만 가지 일 중 하나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길게 그림자가 드리워진 얼굴 아래로 선명한 붉은 빛을 띠는 입술이 수려한 곡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아, 문 닫지 마시고.”

 

 

  시종의 얼굴에 드리워진 낭패감을 읽어낸 것인지, 청년은 말로 선수를 치며 닫지 말 것을 종용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청년은 시종의 주인이 아니었다. 구태여 그 말을 들을 필요는 없었다. 공연한 짓을 했다는 생각에 시종은 다시 문을 닫으려 했다. 하지만 문이 완전히 닫히는 것보다 문틈 사이로 청년이 손을 집어넣는 것이 더 빨랐다. 문이 닫히기 직전에 청년의 손이 문 틈 사이로 끼어드는 것을 본 순간 시종은 자신도 모르게 문고리를 붙든 손에 힘을 주었다. 문을 닫기 위해서가 아니라 닫히려는 문을 붙들기 위해서였다. 시종은 이대로 문을 닫으면 사람의 손이 으스러진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불과 며칠 전의 일이었다. 강요된 침묵 속에서 목도해야만 했던 참혹한 광경은 쉽게 잊히지 않는 법이었다. 청년이 벌려진 문틈 새로 얼굴을 가까이 하며 입을 열었다.

 

 

  “잘하셨습니다. 이제 당신의 주인에게 가서 칼리안이 찾아왔다고 말해요. 그러면 날 들여보내라고 할 겁니다.”

 

 

  부탁과 명령의 경계가 흐릿한 문장이었다. 어린 시종은 머리를 다쳐 이해력을 상실한 사람처럼 눈만 깜박였다. 그때 당장에라도 폭풍우가 올 것처럼 어두컴컴했던 하늘 위로 한줄기 빛이 번쩍였다. 지면을 온통 태울 것처럼 환하고 강렬한 빛이었다. 그 한순간의 빛이 그림자 속에 숨은 청년의 눈동자를 세상에 드러냈다.

 

  한 쌍의 붉은 눈이 흔들림 없이 이 편을 바라보고 있었다. 흡사 까맣게 죽은 피를 응고시킨 것만 같은 눈이었다. 그 눈을 마주하며, 시종은 저택의 2층에서 죽은 듯이 누워 있는 도련님을 떠올렸으나 잠시였다. 유령이나 그림자는 주인이 될 수 없다. 집에는 주인이 없었다. 그것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어린 시종은 악마에게 홀린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문을 열었다.

 

  청년이 고개를 살짝 모로 기울였다.

 

 

  “그냥 열어도 됩니까?”

 

 

  시종은 두어 번 고개를 주억거렸다. 주인님이 안 계셔서요. 청년이 나직한 탄성을 뱉었다. 아하. 불길한 눈이 가늘게 뜨였다. 역시. ……그럴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말이 과연 무슨 뜻인지 시종이 생각해보기도 전에 청년이 저택 안쪽으로 들어섰다.

 

 

  “응접실로…….”

  “아니, 됐습니다.”

 

 

  청년은 응접실로 안내하겠다는 시종의 말을 자르며 한 손을 들어 보였다. 그럴 필요 없다는 뜻이었다. 그간 이 저택을 찾아 온 손님들에게 했던 것처럼 청년을 일단 응접실로 모신 뒤 예를 갖춰 대접하려 했던 시종은 그 말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저, 그럼 제가 뭘…….”

  “아무것도.”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는 것인지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뜻인지 시종은 알 수 없었다. 시종이 둘 중 어느 말인지 가늠해보는 사이 청년은 리놀륨 바닥 위를 미끄러지는 듯한 걸음으로 걸어갔다. 망설임이라고는 요만큼도 없는 태도였다. 마치 이 저택의 주인이라도 되는 양 거침없이 뻗어나가던 걸음은 이윽고 나선형으로 된 계단 앞에 멈추어 섰다. 청년의 뒤를 불안한 얼굴로 좇던 어린 시종도 청년의 뒤에 멈춰 섰다.

 

 

  “여기, 올라가 보고 싶은데.”

  “위, 위요?”

  “네. 안 되나?”

 

 

  어린 시종은 당황한 얼굴을 했다. 청년이 은근슬쩍 하대를 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어린 시종은 청년과 나선형 계단의 끄트머리를 번갈아 보았다.

 

  2층에는 어느 날 갑자기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에 걸려 하루하루 죽을 날 만을 기다리는 저택의 도련님이 있었다. 어린 시종은 그가 정확히 어떤 병에 걸렸는지는 알지 못했다. 다만 그 병에 걸린 이들이 연신 마른기침을 토해내다가 침대보를 핏물로 적신 끝에 생을 마감한다는 사실만을 알았을 뿐이었다.

 

  실리케가 플란츠의 이상을 눈치 챘을 때는 이미 플란츠가 뱉어내는 숨에 비릿한 내음이 섞여 있었다. 절망은 플란츠의 몸에서 빠르게 개화했다. 머지않아 침대보에 시든 꽃잎처럼 점점이 흩어지는 것들을 보며 실리케는 입술을 사리물었다. 검은 피는 제일가는 부정의 증거였다. 재수가 없으면 악마와 목숨을 거래했다는 의심을 살 수도 있었다. 실리케는 플란츠가 병이 들었다는 사실을 숨기려 했지만 본디 형체 없는 것들을 숨기고 또 감추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브리센의 장남인 플란츠 브리센이 하루아침에 반송장이 되었다는 소식은 사교계에 적잖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몇몇 사람들은 브리센이 그간 저질렀던 온갖 악행에 대한 업보를 일부나마 치르게 된 것이라 여기며 고소해했다. 몇몇 사람들은 그를 은밀히 동정했다. 또 몇몇 사람들은 브리센이 악마에게 영혼을 판 대가를 치르는 게 아니냐며 저열한 기쁨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들은 가면과 부채 뒤에서 타인의 비극을 와인처럼 음미했고 그 행위를 통해 자신들이 얼마나 복받은 존재인지를 상기했다. 사교계는 그런 식으로 세대에 세대를 거듭하여 이어져 온 관계의 집합이라고 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비극의 여신이 비껴간 삶에 안도하며 샴페인을 터트렸다. 한때 사교계의 사람들이 브리센의 보물이라고 칭송하며 줄을 대기에 바빴던 존재가 동정하거나 비난해야 마땅할 존재로 전락하는 데는 단 하루면 충분했다. 사람들은 플란츠 브리센의 미래를 희망으로 점치지 않았다. 그것은 플란츠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내일을 기대하지 않는 자들이 으레 그러하듯이 플란츠는 하루의 반 이상을 잠으로 보냈다.

 

  지금은 그가 깊은 잠에 빠져 있을 시간이었다. 가뭄이 든 것처럼 자꾸만 마르는 혀를 침으로 적시며 어린 시종은 어느 과거를 떠올렸다. 가문이 몰락하는 바람에 단출한 옷가지만을 챙겨들고 저택에 들어온 첫 날이었다. 그 날 시종장은 어린 시종을 저택의 뒤편으로 불렀다. 빛이 희미하게 비껴드는 응달 속에서 어린 시종은 저택에서 결코 해서는 안 되는 일에 대해 낱낱이 전해 듣게 되었다. 두 발로 저택에 들어왔다가 땅에 묻히는 건 사양이었고 어린 시종은 시종장이 알려 준 저택의 불문율을 한시도 잊지 않았다. 어린 시종이 기억하기론 저택의 주인인 실리케를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도련님의 잠을 깨워서는 안 된다는 건 그 불문율 중 하나에 속했다.

 

  그러니 지금 청년이 올라가는 건 조금 곤란했다. 시종은 그 사실을 어떻게 하면 고상하고 우아한 귀족의 화법으로 알릴 수 있을까 싶어 고민했다. 살고 싶다면 높으신 분들의 비위를 해쳐서는 안 되는 법이었다. 슬리퍼가 리놀륨 바닥 위를 스치는 소리가 들린 건 그 순간이었다.

 

  이내 나선형 계단의 끝에서 저택의 유령이자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둑한 공간 너머에서 반짝이는 에메랄드빛 머리카락. 어린 시종은 다급하게 고개를 숙였다. 청년은 아니었다.

 

 

  “안녕하세요. 브리센의 에메랄드.”

 

 

  시종은 고개를 숙인 채 아연한 얼굴로 옆을 보았다. 브리센의 에메랄드. 그건 지금 나선형 계단의 끝에서 나타난 이를 두고 사교계에서 붙인 별칭이었다. 얼핏 듣기에는 좋은 말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 귀족들은 겉으로는 칭송하면서 뒤로는 조롱과 험담을 일삼는 족속들이었다. 브리센의 에메랄드는 단순히 신이 섬세하게 빚어낸 주조물 같은 그의 용모만을 두고 한 말은 아니었다.

 

  에메랄드는 아름다운 광물이면서 깨지기 쉬운 광물이다. 그들은 플란츠의 용모를 칭송하는 척하며 하루아침에 반송장이 된 플란츠 브리센을 조롱한 것이다. 저택에서는 누구도 그런 식으로 플란츠를 지칭하지 않았다. 시종은 사태를 수습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도련…….”

 

 

  그러나 시종이 미처 말을 끝맺기도 전에 플란츠의 입술이 열렸다.

 

 

  “너.”

 

 

  어두침침한 저택에 플란츠의 목소리가 울렸다. 드넓은 저택의 가구처럼 있던 모든 고용인들이 소리가 들린 쪽을 일제히 쳐다보았다. 누구라고 지칭하지 않았음에도 자신을 향해 하는 말이라는 걸 알아챈 청년이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네.”

 

 

  플란츠는 오만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따라와.

 

 

 

*

 

 

 

  “무슨 변덕이지?”

 

 

  방문을 닫으며 플란츠는 물었다. 저택의 모든 고용인들은 자신의 허락 없이는 2층에 발을 들이지 않는다. 그게 저택의 불문율이다. 그러므로 방에는 누구도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플란츠는 문을 닫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눈앞에 있는 놈은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소 서슬 퍼런 물음에 칼리안은 어깨를 으쓱했다.

 

 

  “날짜. 기억하십니까?”

  “기억해.”

  “마지막 날이니만큼 특별한 방법으로 들어오고 싶어서요.”

  “전혀.”

 

 

  전혀 특별한 방법이 아니라는 소리였다. 저택을 드나드는 실리케의 손님들은 누구나 1층의 거대한 문을 이용했다. 특별한 방법이라면 처음 나타났을 때가 훨씬 특별했지. 돌연 허공에서 나타났으니까. 그 모든 뜻을 함축한 말에 칼리안이 눈꼬리를 화사하게 접었다.

 

  정확히 나흘 전의 일이었다. 플란츠는 칼리안이 돌연 자신의 눈앞에 나타나던 순간을 어제 겪었던 일처럼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하늘에 어물어물 조각달이 뜬 밤이었다. 그날 플란츠는 창문을 활짝 열어 놓고 하염없이 아래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희미한 빛이 세상에 깔린 중에도 저택의 2층에서 내려다본 아래는 해구처럼 검고 깊었다.

 

  지금 여기서 떨어진다면.

 

  문득 그런 생각을 했던 것도 같다. 그러한 생각은 이따금 불청객처럼 플란츠를 찾아오곤 했다. 불청객이 처음 플란츠의 마음을 두드린 건 플란츠가 자신의 이복동생이 실리케의 손에 떠밀려 계단에서 추락사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때부터였다. 플란츠는 어렸지만 아둔하지는 않았다. 시스파니안의 직계 혈족이라고 여겨지는 그 아이가 있으면 사교계에서 자신의 위치는 변방으로 밀려나게 되리라는 것도, 그래서 실리케가 미리 손을 썼다는 사실도 플란츠는 알았다.

 

  그리고 조금 더 자란 뒤에는 브리센 가문이 그 휘장 아래 어떤 죄악들을 감추고 있는지를 알게 되었다. 언제나 딱딱하고 무섭게만 여겨졌던 지면이 말랑하고 폭신한 침대처럼 여겨지게 된 건 그 무렵부터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바닥은 너무나도 매혹적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대로 몸을 내던진다면 이번에야말로 극적이고 편안한 잠을 맞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찰나의 고통을 기꺼이 받아들며. 그러나 결국 플란츠는 번번이 고개를 돌리곤 했다. 죽음이 죄로부터 도피하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기에.

 

  누군가는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죄 때문에 왜 사서 고통을 받느냐고 할지도 모르지만 플란츠는 브리센과 자신을 구분지어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간 무력하다는 이유만으로 브리센이 저지르는 온갖 부정과 죄악을 좌시하며 자신의 삶을 꾸준히 이어오지 않았던가. 브리센의 거대한 날개는 플란츠쯤은 충분히 숨겨내고도 남았다. 살고 싶어서, 숨 쉬고 싶어서, 무력해서. 그래서 그 날개 아래 몸을 의탁했다. 힘이 없어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는 건 비겁한 면피용 변명에 불과할 뿐 면죄부가 될 수는 없었다.

 

  자신은 죽어서 결코 천국에 가지 못할 것이다. 때를 잊고 일 년 내내 새하얗게 만발하는 르니에리가 무엇을 양분 삼아 피어나는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공범자였으므로. 함구의 대가는 죄책감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브리센의 양 날개를 잡아 꺾고 자신도 그 밑에 잠들고만 싶었다.

 

  이루어지지 않는 소망은 악몽처럼 이어진다. 칼리안이 찾아온 건, 그런 무수히 많은 나날 중 어느 한 날이었다. 그는 정확히 허공에서 한순간 나타나더니 날렵한 궁중 식 인사로 자신을 소개했다.

 

 

  “반갑습니다. 칼리안 레인 카이리스, 세상의 가장 밑바닥에서 당신을 데리러 온 사람입니다. 악마죠, 악마. 자기소개가 너무 거창한 건 싫으니 대충 이쯤하기로 하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당신 목숨을 가져가기 위해서 왔어요.”

 

 

  새빨간 눈에 칠흑처럼 검은 머리카락. 길게 자란 속눈썹과 곧게 뻗은 코, 티 한 점 없이 맑은 얼굴. 새까만 옷을 입고 있었음에도 칼리안은 어둠속으로 녹아들지 않았다. 칼리안은 어둠과 확연히 구분되고 있었다. 모든 어둠이 그의 뒤로 물러나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난데없이 나타난 존재에 심장이 쑥하고 지구 반대편으로 내리 꽂히는 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놀라긴 했지만 플란츠는 내색하지 않았다.

 

 

  “뭔데, 너.”

 

 

  사람은 갑자기 허공에서 나타나지 않는다. 그렇게 예고도 없이 허공에서 불쑥 모습을 드러내고는 유유히 창틀에 걸터앉지도 않는다. 플란츠는 멍청이가 아니었으므로 칼리안이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쯤은 처음 나타난 순간부터 알았다. 그가 구태여 악마라고 자신을 소개하지 않았더라도 그 엇비슷한 부류라고 여겼을 터였다.

 

  그러니 너 뭐냐고 묻는 저의는 다른 데 있었다. 플란츠는 청년의 존재 그 자체에 대해 물은 게 아니었다. 네가 왜 내 이복동생과 꼭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 물었다. 왜, 네가, 새까만 머리에 빨간 눈을 하고서는 자신을 악마라고 소개하는지에 대해 물었다.

 

  그 아이는 채 피어보지도 못한 꽃이었다. 꽃망울이 움트기도 전에 우아하면서도 무도한 손길에 꽃의 숨이 끊기는 것처럼 죽었다. 부조리한 삶이었다. 이 세상에 위대한 신의 섭리가 작용한다면 그 아이는 마땅히 나팔 부는 천사들의 손에 이끌려 하늘의 가장 고귀한 곳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어야만 했다.

 

  그런데 왜 악마냐고.

 

  플란츠의 말에 칼리안은 입을 살짝 벌렸다. 당황한 건 아니고 어이가 없어서였다. 칼리안은 자신의 턱을 느리게 매만지다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보통 이럴 때는 왜 내 목숨을 가져가는 거예요? 하고 울지 않나?”

  “울면. 울면 무슨 소용인데.”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자세로 창틀에 앉아 있던 칼리안이 늘씬하게 뻗은 다리를 꼬며 씩 웃었다.

 

 

  “맞는 말이네요. 그래요, 소용없죠. 다 부질없는 원망이지. 그러니까, 내가 왜 죽은 당신의 이복동생과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지 궁금해요?”

 

 

  플란츠는 창밖에 시선을 두며 대답했다.

 

 

  “거슬려.”

  “솔직한 사람이네요. 너무 그렇게 날 세우지 말고. 세상에 똑같은 사람 셋은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 중 하나가 나라고 생각해요.”

  “…….”

  “못 믿어도 할 수 없고. 난 당신 설득하러 온 게 아니라, 당신 목숨 가져가러 온 놈이니까. 누가 브리센을 저주했거든. 그 눈에서 피눈물 좀 뽑아달라고. 있잖아요, 난 그저 그런 하급 악마는 아니라서 원래 그런 싸구려 의뢰에는 응하지 않거든요? 근데 그놈이 자기 목숨까지 손수 내주는데 어쩔 수 없잖아. 악마는 보기보다 양심적이라서. 주는 거 받아 챙겼으면 이쪽도 뭔가를 줘야 할 거 아닙니까. 안 그래요?”

 

 

  칼리안은 대수롭잖은 투로 말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플란츠는 입술을 깨물었다가 입을 열었다.

 

 

  “이상해.”

  “또 뭐가요?”

  “보통, 그런 경우에는 소중한 걸 가져가기 마련 아닌가. ……브리센의 소중한 건, 내가 아니라서.”

 

 

  플란츠 브리센은 결코 브리센이 소중히 여기는 그 무엇도 될 수 없었다. 브리센이 좀 더 태양 가까이 닿기 위한 도구 정도라면 또 모를까. 가문 내에서 자신이 어떤 취급을 받고 있는지 신랄하게 평하는 말에 칼리안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럼, 당신은 뭐라고 생각하는데?”

  “반말.”

  “이제 와서? ……생각하는데요?”

 

 

  플란츠는 거침없이 대답했다.

 

 

  “명예. 돈. 권력. 한마디로 네가 날 찾아올 이유가 없어.”

  “맞아요. 당신은 브리센의 에메랄드지만 브리센의 소중한 건 당신이 아니지. 그냥, 변덕 같은 거죠. 내가 좀 지켜봤더니 이따금 창문 아래만 내려다보면서 죽고 싶어 하는 얼굴이던데.

 

 

  지면과 피로 얼룩진 키스를 하지 못해서 안달난 사람 같았다고, 당신. 칼리안은 불쾌한 투로 중얼거렸다. 플란츠는 심드렁한 얼굴로 칼리안을 일별했다. 관음 하는 취미라도 있는 건가. 이 악마는. 칼리안이 눈썹을 살짝 움직였다가 짧게 한숨을 뱉었다.

 

 

  “아무튼. 그래서 난 당신이 언제 뛰어내릴지 그것만 지켜보고 있었거든요. 말했잖아. 악마라고. 그런데 가만 보니 당신이란 사람은 그 죄책감까지 함께 죽일 정도로 뻔뻔한 사람은 또 못되어서, 그 예쁜 입술 깨물고 창문 닫으면서 돌아서는 꼴을 어디 한두 번 봐야 말이지. 그래서 내가 이김에 브리센도 죽이고 당신도 손수 죽여줄까, 했거든요. 근데 말이야, 그렇게 마음먹고 나니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당신 얼굴이 좀 취향인 거야. 난 아름다운 거 좋아하거든. 아, 좋아하거든요.”

 

 

  칼리안의 입에서 브리센을 죽이겠다는 말이 나온 순간 플란츠는 내내 창밖을 향하고 있던 몸을 돌려 칼리안을 보았다. 갑자기 나타난 악마가 브리센을 몰락시키겠다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뱉었다. 플란츠는 이 인간의 상식을 뛰어넘은 놈이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내뱉은 대로 행할 수 있는 놈이라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브리센의 몰락. 그것이야말로 지난한 생에서 플란츠가 가장 바라마지않던 일이 아니던가. 그렇다면야 이제 창문을 닫고 등을 돌릴 일도 없어진 셈이다. 매번 자는 척을 하며, 징그러울 정도로 몸집만 부풀린 그리핀이 그 거대한 몸 아래에 감추어둔 일들을 은밀히 조사할 필요도 없다. 플란츠는 선선이 입을 열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인생에서 가장 마음 편히 입술을 움직인 순간이었다.

 

 

  “그래. 해.”

 

 

  칼리안이 인상을 찡그렸다.

 

 

  “……당신 뭐 원하는 건 없어요?”

 

 

  플란츠는 느리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미련이 없어도 너무 없네. 사람 같지 않게. 사람은 적당히 이기심이 있어야 포동포동 살도 찌고 영혼도 딱 먹기 좋게 되는 법인데 말이에요. 난 입이 고급이라 죽은 고기는 안 먹어. 죽기 직전에 내가 적선 한 번 하는 셈치고 뭐든 들어줄 테니 말이나 해봐요. 부귀영화, 여자, 술, 뭐든. 하룻밤의 꿈이어도 최상의 환락을 제공하는 게 우리의 의무거든. 이 얼마나 남는 장사고 밑지는 장사야.”

 

 

  조각달은 어느 새인가 구름 사이로 모습을 감춘 뒤였다. 그러나 희미한 달빛 한 점 들지 않는 곳에서도 청년의 얼굴은 소금기둥처럼 훤하기만 했다.

 

 

  “뭘 해줬으면 해요?”

 

 

  이미 져버린 계절의 빛깔을 닮은 분홍빛 입술이 달싹였다. 원해도 되는 건가. 과연 자신이, 무언가를 바라도 되는 것인가.

 

 

  “편히 말해요. 어차피 당신 죽을 텐데.”

 

 

  그러나 이어진 말이 망설임을 거두어 갔다. 플란츠는 닥쳐올 종언을 향해 대답했다. 최초이자 최후의 이기심이었다.

 

 

  “산책.”

 

 

  칼리안은 다소 황당하다는 얼굴을 했지만, 플란츠의 말을 무시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성립한 나흘 치 계약이었다. 창틀에서 폴짝 뛰어 내려온 칼리안은 플란츠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럼, 일단 눈 좀 감아 볼래요?

 

 

  그때 플란츠는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분명 빛이 들 일이 없는데도 칼리안의 검은 머리카락 위로는 은은한 달빛이 흩뿌려져 있는 듯했다. 어서요. 그 광경을 잠시 보았다가, 재촉하는 말에 플란츠는 고분고분하게 눈을 감았다. 속눈썹이 온전히 내려가 눈을 덮은 직후 머리카락 스치는 소리가 났다. 칼리안의 숨이 아주 가깝게 느껴진다 싶었더니 차게 식은 손 위로 무척 따듯한 손이 겹쳐지는 것이었다.

 

  악마라도 체온은 있는 모양이군. 플란츠는 그런 것을 생각했고 이제 눈 떠도 된다는 칼리안의 말에 눈을 떴을 때 둘은 크림소다처럼 폭신한 구름 위에 앉아 있었다. 언뜻 내려다 본 발아래가 까마득했다. 그러나 저택의 2층에서 내려다보았을 때처럼 새까만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해구 같지는 않았다. 무수히 많은 건물 위로 희미한 불빛이 어룽져 있는 게 꼭 물 먹은 별들이 떠 있는 것만 같았다.

 

 

  “안 놀라네요.”

  “이제 와서.”

 

 

  플란츠는 피식 웃었다. 놀랄 거면 네가 나타난 순간부터 놀랐어야 맞는 거 아닌가.

 

 

  “하긴 그렇네요.”

 

 

  칼리안이 엄지와 중지를 딱 소리 나게 부딪혔다.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 삽시간에 원형 테이블이 나타났다. 구름 위에서 다과라도 즐길 셈인 듯했다. 산책을 하자고 했더니 다과를 대접하고 있다. 생각하며 플란츠는 테이블 위에 아몬드 쿠키와 향이 진한 홍차가 나타나는 모습을 보았다. 희석된 피 같기만 한 물 위에 새하얀 르니에리 생화. 악취미가 따로 없다.

 

  플란츠가 멀뚱히 지켜보자 칼리안이 턱을 괴며 아, 하고 입을 열었다.

 

 

  “못 먹겠으면.”

 

 

  피아노를 치면 딱 어울릴 법한 손가락이 플란츠의 눈앞으로 뻗어왔다. 플란츠는 한손을 들어 그 손을 매몰차게 쳐냈다.

 

 

  “치워.”

 

 

  홍차 치워내려는 손 치우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칼리안은 사람 좋은 일 해주지 않는 악마답게 듣지 않았고 다음 순간 핏물 위에 둥둥 떠 있던 르니에리 생화는 감쪽같이 사라진다. 칼리안이 어깨를 들었다 내려놓으며 한숨을 푹 쉬었다. 정말 이상한 인간이라니까. 거북하면 거북하다고 말해요. 싫으면 싫다고 하고, 못 하겠으면 못 하겠다고 해. 당신이 나에게까지 쩔쩔맬 필요는 없잖아? 지극히 맞는 말이었다. 그래서 다음부터 플란츠는 칼리안이 알려준 대로 했다.

 

  지난 사흘 내내 칼리안은 플란츠를 데리고 이곳저곳을 분주히 오갔다. 칼리안은 플란츠가 원하기만 한다면 언제나 창문을 통해 플란츠를 찾아왔고 그를 안아든 채 흔적도 없이 저택을 나섰다. 칼리안은 과연 인세의 상식을 초월한 존재였던지라 시공간의 영향조차 받지 않는 듯했다. 칼리안의 발걸음은 플란츠가 나고 자랐던 시대와 공간을 가볍게 뛰어넘었다. 눈을 감았다 뜨면 그곳이 먼 이국의 땅이 될 때도 있었고 투명한 빙하가 떠다니는 바다 위가 될 때도 있었다. 둘은 아득히 먼 곳에서 얼음이 부서져 내리는 소리를 들으며 따끈하게 데워진 차를 마셨다. 플란츠는 얇게 저민 딸기가 꽃잎처럼 쌓인 딸기차였고, 칼리안은 첫맛은 떠름하고 끝 맛이 상쾌한 민트차였다. 꿈 같은 시간은 빠르게도 흘렀다.

 

  그렇게 오늘이었다. 악마가 플란츠에게 약속한 나흘의 기간 중 딱 나흘째의 날.

 

 

  “그래서, 오늘은 뭐가 하고 싶어요?”

  “산책.”

  “간단해서 좋네요. 문으로 나갈까요?”

 

 

  잠시 고민하던 플란츠가 고개를 끄덕였다. 칼리안의 말대로 그들이 약속한 마지막 날이었다. 오늘이 지나면 이와 같은 경험은 두 번 다시 하지 못할 것이다. 돌이켜보면 순전히 자신만을 위해 두 발로 저택의 문을 걸어 나가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둘은 발소리조차 내지 않고 나선형 계단을 내려왔다. 곧 돌아올 주인을 위해 저택을 정리하고 있던 고용인들이 플란츠와 칼리안을 쳐다보았으나 그뿐이었다. 칼리안이 플란츠의 옆에 있었으므로 그들은 검은 머리에 빨간 눈을 한 악마와 그 악마의 손을 붙잡은 저택의 도련님이 저택의 문을 통해 빠져나갔다는 사실조차 이내 잊었다.

 

 

 

 

 

  둘은 내일을 모르는 연인처럼 이곳저곳을 쏘다녔다. 파리의 한 거리에서는 젖은 이끼 냄새와 덜 마른 물감 냄새, 희미한 로즈마리 향과 곱게 갈린 원두의 향이 났다. 비가 내리는 탓에 수채화처럼 젖어 있는 도시를 노니며 플란츠는 색색의 포장지에 곱게 싸인 싸구려 사탕을 볼에 넣고 우물우물 씹었다. 플란츠는 우산을 쓸 필요가 없다고 했지만 칼리안은 그가 비를 맞지 않았으면 했다. 그래서 이번에도 두 손가락을 딱 소리 나게 맞부딪쳐 우산을 꺼냈다. 딱 한 사람만을 위한 세계가 완성되는 데는 널따랗게 펼쳐진 우산살 정도면 충분했다.

 

 

  “대성당에 가보고 싶은데.”

  “나 악만데.”

  “알아.”

 

 

  그런데 그게 뭐. 칼리안은 플란츠가 속으로 삼킨 말을 빠르게 캐치했고 인간이란 족속들은 고작 나흘 만에 무척 뻔뻔하게 돌변할 수도 있다는 걸 실감했다. 그렇대도 어차피 손짓 한 번에 사그라질 목숨, 더 고차원적인 존재로서 들어주지 못할 것도 없었기에.

 

  그 결과로 둘은 세월처럼 유유히 흐르는 센 강의 물 위를 기적처럼 걸어와 일 드 라 시테에 있다. 칼리안은 성당의 전면 부를 빼곡하게 장식하고 있는 조각상을 질린 얼굴로 올려다보았다. 조각상 중에는 그가 떠나온 세계에서 보아왔던 얼굴이 몇 있지만, 플란츠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성당 내부에는 곳곳마다 빛을 밝히는 곳이 있었다. 플란츠는 색색의 샹젤리제와 일렁이는 촛불이 안을 흐릿하게 밝히고 있는 성당 내부를 둘러보았다가, 대뜸 말했다. 성당의 가장 높은 곳에 촛불을 올리고 싶은데. 처음에는 산책 하고 싶다는 말조차 꺼내기를 주저했던 인간이 이제는 망설임조차 없었다. 그러나 악마는,

 

  칼리안은 그게 기꺼웠다.

 

 

  “이거면 되겠어요?”

 

 

  첨탑의 꼭대기에서, 칼리안은 붉은 꽃잎이 겹겹이 쌓인 것만 같은 불꽃을 손 위에 올려놓으며 물었다. 그리고 곧 악마답지 않게 후회했다. 손 위에 올려놓은 그 별 것 아닌 불꽃을 보며 플란츠가 먹먹한 얼굴을 한 탓이다. 이 도시의 모든 우울이 비스크돌처럼 창백하고 아름다운 얼굴 위로 흐르고 있었다.

 

 

  “……아무래도 비가 너무 많이 오는 거 같은데.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인간의 슬픔에는 익숙지 않다. 그것을 이해하고 싶다고 생각해본 적도 없다. 그랬는데 그 순간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말을 막을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지. 난 아름다운 걸 좋아하고, 그게 망가지는 건 싫거든.

 

 

  “첨탑에도 우산을 씌워두면 좋을 텐데.”

 

 

  칼리안은 실없는 소리를 주워섬기며 제 손 위의 불꽃을 하늘과 가장 가깝게 맞닿은 곳에 올려 두었다. 예쁜 얼굴이 온통 엉망이에요. 중얼거린 말에 플란츠는 대꾸하지 않았다. 플란츠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칼리안은 아주 사려 깊은 악마였으므로, 플란츠가 감정을 갈무리할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저 플란츠의 곁에 앉아 있었다. 변덕이라면 변덕이었다. 플란츠는 한참 뒤에야 입술을 꾹 깨물었다가 다 잠긴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제, 가. 칼리안은 어디로 갔으면 좋겠냐고 묻지 않았다. 어디든 좋거나 좋지 않을 것이었으므로.

 

  아무래도 비가 오는 도시를 선택한 게 잘못이었어. 칼리안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약간의 고민 끝에 이번에는 구름 한 점 없이 아주 맑은 동네로 플란츠를 데려다 놓았다.

 

 

  “마음에 들어요?”

  “응.”

  “다행이네. 이제 다 울었어요?”

  “누가.”

  “아니면 말고요.”

 

 

  연초록빛의 활엽수와 짙고 푸른 침엽수가 군락을 이루고 있는 숲의 한 가운데에 비취색의 호수가 있었다. 들여다보면 얼굴을 그대로 비춰낼 것처럼 맑고 깨끗한 호수였다. 여긴 어디냐고 묻는 플란츠에게 칼리안은 친절히 대답했다. 크로아티아요. 낯선 국가의 이름이 다정함과 함께 흘러 나왔다. 둘은 정답게 손을 잡고 비취색으로 부서져 내리는 플리트비체 호수 위를 걸었다. 센 강을 건너갔을 때처럼.

 

  정말이지 파리와는 영 딴판으로 날이 아주 좋았다. 하늘에는 그 흔한 뭉게구름도 깃털구름도 떠다니지 않았으므로 모든 풍경은 꼭 호수 아래에 잠들어 있는 것만 같았다. 천국에 나팔수가 있다면 밀카 테르니나의 목소리를 하고 노래를 불렀으면 좋겠군. 플리트비체 호수를 걸으며 무심결에 그런 말을 하는 플란츠의 옆에서 칼리안은 숨죽여 웃었다. 그러네요. 동의하며 칼리안은 실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 이것은 이 사람의 슬픔을 닮았다. 너무나도 맑아 속까지 내비치는 호수를 들여다보며 악마는 그런 생각을 했다.

 

 

  “조용하네요.”

  “그러게.”

 

 

  플란츠가 마지막으로 선택한 곳은 바다였다. 물 실컷 봤으면서 왜 또 물 보냐고 칼리안이 물었더니 한번쯤은 바다를 보고 싶었단다. 하룻밤의 꿈에 불과할지라도 최고의 향락을 제공하는 게 악마의 의무였다. 보고 싶다는데 또 들어줄 수밖에. 칼리안은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바닷가에 플란츠를 곱게 데려다 놓았다.

 

  플란츠의 시선은 끝없이 펼쳐진 수평선 너머를 응시하고 있었다. 칼리안은 지면에서 3cm정도 뜬 채로 플란츠의 옆에 서 있다가 이제는 그냥 플란츠의 머리 꼭대기에 올라가서 책상다리를 하고 앉았다.

 

 

  “그 사람이, 무역상이어서.”

 

 

  플란츠의 몸에 흐르는 피의 반은 르메인의 것이었다. 그는 드넓은 바다와 대륙을 바삐 오가는 무역상이었다. 이름 높은 가문의 자제가 천시되던 상업에 손을 대었을 때 사교계에서는 그의 가문을 비웃기 급급했지만 결과적으로 그는 시대의 흐름을 잘 읽은 사람이 되었다. 막막하고 두렵게만 느껴졌던 바다 저 너머에 새로운 세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알게 되면서부터 그의 사업은 순풍에 돛을 단 듯이 술술 풀렸던 것이다.

 

  하지만 그와 정 반대로 가족 관계는 한없이 소원해져만 갔지. 땅의 가장 맨 밑바닥에서 모든 것을 지켜보는 입장이었던 칼리안은 알고 있었다. 그는 사람들과 물건 값을 두고 협상하거나 흥정하는 일에만 능했지 자식들을 돌보는 일에는 무능하기 짝이 없었다. 이복동생의 죽음도 그의 의도치 않은 방관 속에서 벌어진 일이나 마찬가지였다. 안 그래도 끈끈하지 않았던 관계는 마치 유빙이 흐르는 것처럼 빠른 속도로 벌어지기 시작했고……. 그래서 플란츠는 아버지라고 말하지 않은 것이리라. 사람의 감정을 이해할 수 없으므로 감정을 읽어내는 데 능숙하지 않은 악마는 빛을 등지고 선 플란츠의 옆모습을 보았다. 왜인지 그 얼굴이 쓸쓸하다고 생각했다.

 

 

  “와보고 싶었어.”

  “……그래요.”

  “엄청 파랗네.”

 

 

  그저 무한히 이어진 물결을 보는 것만으로도 호흡을 잊게 된다. 그 정도로 압도적이고 매혹적이었다. 이런 광경이어서, 그렇게 집을 떠나 바다 위에서만 살았던 것일까. 영원히 이해할 수도 용서할 수도 없을 테지만 그래도 그렇다면 어쩔 수 없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불쑥 고개를 들었다. 그게 싫어서 플란츠는 바다로부터 시선을 거두어들였다.

 

 

  “만족해요?”

 

 

  물음은 머리 꼭대기가 아닌 등 뒤에서 들려왔다.

 

 

  “응.”

 

 

  파랬던 하늘 위로 붉은 빛이 넓게 번져나가고 있었다. 플란츠는 칼리안을 돌아보았다.

 

 

  “나는 이제 죽겠지.”

 

 

  약속한 시간이 다 되었음을 둘 모두 알았다. 씁쓸함인지 후련함인지 모를 감정이 플란츠의 얼굴 위로 사이좋게 허물어지고 있었다. 칼리안은 석양에 불그스름하게 물들어가는 플란츠의 얼굴을 보았다. 새하얗고 창백해서 마냥 시체 같기만 했던 얼굴이 지금 이 순간 사람처럼 여겨지는 건 단순히 번져오는 빛 때문이었을까. 칼리안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지.

 

 

  “누구 마음대로요?”

 

 

  플란츠가 짧게 숨을 뱉었다. 저주의 상징이라고 여겨지는 새빨간 눈이 꼭 그처럼 붉게 물들고 있는 세상 한 가운데에서 선명하게 빛났다.

 

 

  “아닌가.”

  “기억 안 나나 본데, 당신은 악마랑 거래 했어요.”

  “……그런 기억, 없어.”

  “나한테는 있어요. 사실, 악마는 밑지는 장사 같은 건 안 하거든. 내가 당신에게 나흘의 말미를 줬으니 당신은 나와 거래한 셈이지.”

  “사기꾼.”

  “악마라니까?”

 

 

  플란츠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것 참 편리하고도 유용한 말이군.

 

 

  “그러니까, 그 순간부터 당신의 처음과 끝, 끝 이후의 시간까지 모두 내 거야. 내가 당신을 샀어요. 당신의 죽음조차 이제는 내 소유라는 소리죠.”

  “뭘 원하는데.”

 

 

  뭘 원하냐고. 그렇게 묻는 입술은 엊그저께 악마가 마주쳤던 새까만 고양이의 분홍빛 앞발바닥 같기도 했고 갓 피어나는 연분홍빛 꽃 같기도 했고 악마가 가장 끔찍이 싫어하는 계절을 한 데 그러모은 것 같기도 했다. 그럼에도 사랑스러워서.

 

  아름다운 것을 사랑하는 악마는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나와 함께 가요.”

  “나를 포동포동 살찌운 다음에 뼈와 살과 영혼을 취하겠다고 한 건 언제고.”

  “말했잖아. 난 아름다운 걸 좋아한다니까요?”

  “…….”

  “지옥은 가장 결백한 죄인을 위해 예비 된 곳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당신도 스스로가 천국에는 발 못 붙일 영혼이라고 생각하잖아.”

 

 

  칼리안의 말에 플란츠는 사선으로 내리 비끼고 있었던 시선을 들었다.

 

 

  “……약속해.”

 

 

  플란츠는 칼리안과 자신이 걸어왔던 길을 눈으로 되짚었다. 인간의 시선이 닿지 않는 그 아득한 끝에는 브리센의 대 저택이 있으리라.

 

 

  “저 끔찍한 걸 무너뜨리겠다고.”

 

 

  칼리안은 예쁜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걱정 마요. 그거야말로 악마가 제일 잘 하는 거 아닌가? 그거면 되겠어요?”

  “……그래.”

 

 

  그리하여 마침내 페르세포네는 석류 세 알을 입에 넣게 된 것이다. 칼리안의 손이 플란츠의 턱을 붙들었다. 플란츠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키스할 때, 코는 어디에 두는지 알아요?* 플란츠는 칼리안이 보기에 몹시도 예쁘장한 입술을 달싹였다가 대답했다.

 

 

  “몰라.”

  “그럼, 일단 눈 감아요.”

 

 

  기다란 속눈썹이 에메랄드빛 눈동자를 서서히 덮는다. 아름다운 것을 사랑하는 악마는 보석 위에 베일이 덮이는 그 광경을 황홀하게 지켜보았다. 쥐고 있는 고개를 살짝 틀고 입술을 내리자 영원처럼 입술이 맞닿았다. 가슴이 뛴다. 칼리안에게는 무척 생경한 감각이었다.

 

  이윽고 불길이 두 사람을 덮었다.

 

 

 

*

 

 

 

  그 도련님, 사실 악마에게 잡혀갔대. 어느날 갑자기 이불 한가득 피를 토하고 죽었다는데. 어린 시종이 그걸 발견했다나 뭐라나.

 

  브리센의 업보지. 당해도 싸. 사람을 한 둘 죽였니?

 

  게다가 암암리에 아편도 유통시키다니! 보안청의 고위 인사 여럿이 관련되어 있다는 얘기, 들었어?

 

  들었어. 하지만 그 도련님은 무슨 죄야?

 

 

  “그러고 보니.”

 

 

  사람의 인적이 드문 어느 한 거리, 새까만 머리카락에 빨간 눈을 한 사람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당신 정말 후회 안 해요? 내가 함께 가자고 하긴 했지만, 막 강요할 생각은 아니었거든.”

  “잘도.”

 

 

  잘도 그랬겠다는 뜻이었다. 아, 너무 티 났나. 칼리안은 입을 가리며 숨죽여 웃었다. 플란츠는 그 모습을 흘겨보았다가 덤덤히 대답했다.

 

 

  “안 해.”

  “다시는 못 볼 텐데도?”

 

 

  이렇게 아름다운 풍경을 말이에요. 사실 지옥이 그렇게 아름다운 곳은 아니거든요. 물론, 내가 있으니 어느 정도는 아름답긴 하겠지만. 그 말에, 플란츠는 햇빛 아래 산산이 부서지는 풍경을 보았다가 칼리안을 보았다.

 

 

  “그러니 무슨 상관이지.”

  “응?”

  “너를 가졌잖아.”

 

 

  한낱 인간이 하는 말치고는 무척 대담하고 또 발칙했다. 칼리안은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네요. 당신이 나를 가졌어.”

 

 

  난 아름다운 걸 사랑하니까.

 

 

  “그러니 키스할래요?”

 

 

  플란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는 불길 대신 칼리안이 붙든 새하얀 로브의 끝자락이 두 사람의 얼굴을 가렸다. 베일 너머 성례와도 같은 입맞춤이 이어진다. 생의 시작이었다.

 

 

 

 

2019. 06. 24.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1943) "키스할 때 코는 어디에 두어야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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