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리플란] 그 왕세자가 왕자를 유혹하는 서른두 가지 방법

2차/적왕사2020. 10. 1. 23:32

 

 

  발칸의 부군단장이자 언젠가는 다시 왕자님이 될지도 모를 왕세자 저하께서 어딘가 이상하다.

 

  칼리안의 미친 따까리를 자처하는 아르센의 머릿속에 그런 불경한 문장이 눌어붙은 자국처럼 남기 시작한 건 정확히 이 주 전부터였다.

 

  이 주 전, 아르센을 위시한 발칸의 전 대원은 수도에서 거나하게 술판을 벌이고 새벽녘에 궁으로 돌아왔다. 6서클이 되기 전에는 석 잔 이상 맥주를 마시기만 해봐라 마셨다가는 아주 한 달 간 손 잡는 것도 금지라는 코코 아빠의 지엄하신 어명이 있었던 탓에, 그날 아르센은 맥주를 딱 두 잔까지만 마신 참이었다.

 

  그래, 더도 덜도 말고 정확히 두 잔.

 

  한마디로 기분 좋은 취기가 전신을 감싸면서 눈앞이 가물거리고 머리가 알딸딸해질 정도로만 마셨다는 얘기다. 그건 곧 이 주 전 '그 말'을 들을 당시 아르센의 정신이 지극히 정상이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날 회식을 마치고 돌아온 발칸은 무척 신이 나 있었다. 가만히만 있어도 머리가 비상한 쪽으로 팽팽 도는 덕분에, 마법사들은 모두 돌았다는 말을 듣기에 부족함이 없는 그들이었는데 하물며 취기가 오른 상태에서야 평상시보다 더 돌면 돌았지 결코 덜 돌 리가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체르밀 궁에서 훤히 내다보이는 인공호수를 보자마자 너나할 것 없이 한가지 생각을 머리에 떠올렸다.

 

  오늘에야말로 이 인공호수에 가득 담긴 물을 인공분수의 물줄기처럼 위로 솟구치게 하다못해 하늘을 수놓는 불꽃처럼 만들리라.

 

  그런 쓸데없는 야망이 삽시간에 돌아버린 마법사들의 머리를 꽉 메웠다. 만일 발칸이 목숨보다 끔찍이 여기는 어린 왕세자가 이 야심 찬 계획을 알게 된다면 당장 아이처럼 환하게 웃으며 연병장 뺑이를 시키겠지만, 그거야 들키지만 않으면 그만 아니던가. 더군다나 사위가 고요히 잠든 새벽녘에 고귀하신 왕세자 저하께서 이 먼 인공호수까지 친히 행차하실 일이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술에 취한 마법사들은 술에 취해 흐물흐물해진 정신머리로 나름의 논리적인 사고를 거친 끝에 호수 쪽으로 스멀스멀 몸을 움직였다. 이 위대하고도 원대한 계획을 성공적으로 실현 시키려면 물에 색을 입히는 마법이 필요했고, 고요히 고여 있는 물을 중력을 무시해가면서 모조리 위로 끌어 올리는 마법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렇게 허공으로 솟구친 물을 삽시간에 얼린 다음 유리조각처럼 잘게 부숴서 흩뿌리는 마법이 필요함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아르센이 코코 아빠를 떠올리면서 잠깐 한눈을 판 사이 마법사들은 일사천리로 역할 분담에 나섰다. 돌아도 단단히 돌아버린 마법사들이 술김에 또 뭔가 기상천외한 일을 벌이고자 한다는 걸 아르센이 눈치챘을 때는 잔잔하게 고여 있던 물이 중력을 무시하고 모조리 위로 솟구친 뒤였다.

 

  마법사들이 벌인 기행을 목격하고야 만 아르센은 크게 기함하며 손짓 한번으로 물을 얼렸다. 그러자 돌아버린 마법사들 사이에서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눈부신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역시 부군단장님이야! 빌헬름 관에 부군단장님 동상을 세워도 되겠습니까? 얼음 마법의 최고 권위자 아르센 헤르츠를 찬양하라! 듣기만 해도 낯부끄러운 말이 분수대의 물줄기처럼 한가득 쏟아져 내린 순간, 그 시간대에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될 파릇파릇한 머리통이 아르센의 시야에 걸렸다.

 

  플란츠였다. 그가 인공호수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무언가를 얼리고 얼린 것을 산산이 조각내는 건 아르센의 특기였다. 거대한 기둥을 만들며 하늘로 솟구쳐 오르는 호수의 물을 손짓 한 번으로 얼리는 건 아르센에게는 일도 아니었다. 냉동 마법은 눈을 감은 상태에서도 구사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마법이었고, 불의의 타를 얻어맞고 목숨이 끊기지만 않는다면 그렇게 얼린 상태를 무한하게 유지할 수도 있었다.

 

  그러니 얼어붙었던 호수의 물이 한순간에 녹아내리면서 왕세자 저하의 파릇한 머리통을 푸르죽죽하게 적시게 된 건, 순전히 그곳에서 맞닥뜨리리라고 미처 생각지도 못한 왕세자의 모습을 보는 바람에 아르센이 당황했기 때문이었다. 알딸딸하게 취기가 오른 머리는 얼어붙은 물기둥을 뻔뻔하게 유지하며 연병장 뺑이를 각오해야 할지, 아니면 지금이라도 마법을 풀어서 물기둥을 액체 상태로 만들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양 플란츠에게 웃어 보여야 할지를 기민하게 판단하지 못했다.

 

  그리고 아르센이 갈팡질팡하는 사이 호수 지척까지 다가 온 플란츠는 인상만 가만히 찡그렸다. 아, 그러니까 이게. 아르센이 잽싸게 운을 떼며 변명을 늘어놓을 준비를 마친 순간 마법사 여럿이 만들어 낸 화염구가 물기둥을 강타했다. 가뜩이나 유지해야 할지 말지를 망설이느라 냉동 마법이 불안정하게 유지되고 있던 차에 거대한 불똥까지 처맞고 나니 얼어붙은 물기둥이 녹아내리는 건 당연지사였다.

 

 

  "……마법사. 너희."

 

 

  다음 순간 촥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플란츠의 몸 위로 호수의 물이 모조리 쏟아져 내렸다. 집채만 한 파도가 무서울 정도로 범람하여 사람을 집어삼키는 것만 같은 광경이었다. 돌아버린 마법사들은 술이 확 깨는 걸 느끼며 다급하게 실드 마법을 구사했다. 한 발 늦게 구사된 마법이 물에 쫄딱 젖은 플란츠의 몸을 겹겹이 감쌌다.

 

  난데없이 물세례를 맞게 된 플란츠는 온몸에서 물을 뚝뚝 떨어트리며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 고요는 폭풍이 들이닥치기 전의 불길한 침묵과도 닮아 있었다.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샴페인과 폭죽을 터트린 것처럼 왁자지껄했던 분위기는 플란츠의 몸 위로 쏟아진 물과 함께 쓸려나간 지 오래였다.

 

  발칸의 마법사들은 숨을 쉬는 것조차 잊고 플란츠를 주시했다. 어머니, 아버지, 안녕히계세요. 불초 소생은 오늘 자진하여 세뉴 강에 안네루시아를 띄우러 갑니다. 각자의 머릿속에 저마다의 안네루시아가 세뉴 강을 수놓는 모습이 떠오를 무렵, 플란츠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돌았다 돌았다 했더니……. 정녕 돌았지."

 

 

  즐겨 입는 카디건과 셔츠가 쫄딱 젖은 탓에 유약을 구워 바른 도자기처럼 매끈하고 흰 속살이 모두의 눈앞에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었다. 감히 왕세자 저하의 적나라한 모습을 이 두 눈에 담는 불경을 저지를 수는 없다는 생각에 발칸의 신입은 허겁지겁 제 두 눈을 가렸고 니들렌은 눈을 크게 떴으며 아르센은 눈을 흐리게 떴다.

 

  투명한 압생트 빛 눈이 무언가를 생각하는 양 가늘어졌다. 뭔가 심상찮은 기운을 감지한 신입이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세자 저하, 그러니까 그게... 다들 입을 모아 말하기를 몹시도 순한 세자 저하라고는 하나, 새벽녘에 호수 주변을 산책하다 봉변을 당한 상황에서도 그 순함이 유지되는 건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왕족들의 성미가 대개 괴팍하다는 걸 고려해 보았을 때는 더더욱 그랬다. 따라서 저 조막만 한 입술에서 그 어떤 불호령이 떨어지기 전에 대강이나마 배수진을 쳐야겠다는 일념으로 황급히 입을 여는 신입에게 플란츠의 나른한 시선이 가닿았다.

 

 

  "됐어."

  "네?"

 

 

  됐다니 뭐가 됐단 말인가. 아, 역시 내 목숨은 오늘 중으로 되었으니 더는 말을 들어 볼 필요도 없다는 말인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며 멍청하게 묻는 신입을 향해 플란츠가 눈을 깜박였다.

 

 

  "됐다고. 생각해보니, 이거면 될 거 같아서."

  "……네?"

 

 

  갓 따낸 푸성귀처럼 파릇하기만 한 어린 세자 저하의 말이 지극히 짧다는 건 발칸의 전 대원이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이처럼 알아먹기 힘들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플란츠의 말을 알아듣지 못해 답답해하는 발칸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플란츠는 영 알 수 없는 소리만 돌려 줄 따름이었다.

 

  마법사들은 기본적으로 돌아 있는 생물이었다. 그 말인즉슨, 불가해한 수식을 맞닥뜨리면 적당히 우회할 줄도 알아야 하는데 우회라는 말은 악신과 함께 잠재운 것처럼 일방통행 직진밖에 할 줄 모른다는 얘기기도 했다. 당최 알아먹을 수 없는 왕세자의 말을 헤아리고자 사단장인 니들렌을 포함하여 아르센의 휘하에 있는 발칸의 모든 대원은 아르센을 구원처럼 바라보았다. 목자를 따르는 양처럼 몹시도 간절한 눈빛이었다.

 

  결국 갸륵한 얼굴로 자신을 보는 마법사들을 무시하는 데 실패한 아르센은 자진해서 총대를 메고 나섰다. 쫄지 말자. 코코 엄마. 왕세자 작위 떼고 붙으면 이쪽도 저쪽도 부군단장이니 꿀릴 건 없다. 알코올이 가져다준 용기에 힘입어 아르센은 모두가 궁금해했으되 모두가 묻지 못했던 문장을 용감하게 입에 올려놓았다.

 

 

  "그……. 실례지만 됐다는 건 대체……?"

 

 

  물을 머금고 늘어진 잎사귀처럼 나른하게 풀려 있던 눈매가 한순간에 날카롭게 좁혀 들었다. 역시 조금 쫄아야 했던 걸지도 몰랐다. 헤이시아 궁이 무너진 뒤로는 무척 오랜만에 마주하는 것만 같은 눈매에 아르센은 잠깐 집 나갔던 겁대가리를 곱게 주워들었다.

 

 

  "아니, 아닙니다. 제가 아무래도 괜한 것을 물은 거 같은데 대답해주기 싫으시면 말씀……."

  "젖어야 할 일이 있었는데 마침 잘 됐다고."

 

 

  누덕누덕 기운 옷처럼 볼품없이 이어지던 말의 한중간을 서슴없이 잘라낸 플란츠가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원체 태생이 잘난 탓인지는 몰라도 고작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는 별것 아닌 행동마저 한 편의 명화처럼 우아하기만 했다. 파르스름한 새벽빛이 조각조각 떨어지는 풍경 속에서 홀로 고고하게 존재하시는 왕세자 저하를 넋 나간 얼굴로 쳐다보던 아르센이 한참 후에 눈을 깜빡이며 얼빠진 소리를 흘렸다.

 

 

  "예……?"

 

 

  됐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만 알아내면 정말 될 거 같았는데, 젖어야 할 일이 있었다는 건 또 뭐란 말인가. 영 뜬구름을 잡는 것만 같은 소리에 플란츠를 제외하고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이들의 머릿속에 의아함만 뭉게뭉게 피어오를 즈음이었다. 무언가 말하고 싶은 게 있는데 겨우겨우 참아내는 듯한 얼굴을 보고 자신의 말이 충분한 설명이 되지 못했음을 깨달은 플란츠가 짧게 한숨을 뱉었다. 그러고는 몹시도 순한 왕세자답게 친히 말을 덧붙였다.

 

 

  "내가, 젖은 옷을 입고 아우님을 만나야 할 일이 있어서."

 

 

  플란츠는 그 말을 남기고 이제 더는 볼 일이 없다는 양 체르밀로 자연스레 발걸음을 옮겼다. 세자 위를 얻은 지 꽤 되었음에도 플란츠의 처소는 여전히 체르밀 4층이었다. 플란츠가 카밀론으로 가기를 원치 않았고 내색하지는 않았으나 칼리안 역시 그러했으며 최종적으로 르메인이 플란츠의 뜻을 존중한 결과였다.

 

  순식간에 아득한 점처럼 멀어지는 왕세자의 뒷모습을 넋 놓고 바라보던 아르센은 그의 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 뒤에야 한 가지 사실을 퍼뜩 떠올리며 외마디 비명을 내질렀다. 물론, 속으로만. 가만. 그러고 보니 아까 왕세자 저하께서 걸어가시면서 셔츠 단추를 두 어 개 정도 풀지 않았던가? 혓바닥 위에 고였던 의문형의 문장은 이내 목구멍 아래로 얌전히 침잠했다. 발칸의 부군단장직을 역임하면서 비상할 정도로 늘어난 눈치가, 조금 전 목격한 장면은 무덤 끝까지 가져가야 할 비밀임을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그때가 처음이었다. 발칸의 부군단장이자 언젠가는 다시 왕자님이 될지도 모를 왕세자 저하께서 어딘가 이상하다고 생각하게 된 것은. 처음에는 그대로 뇌리를 스치고 지나갈 불경한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날 들었던 플란츠의 말은 머리 한구석에 꿰매어 붙인 것처럼 도시 가시지를 않았다. 아르센은 그날 새벽 플란츠의 말을 오래 곱씹으며 잠을 설쳤다. 그리고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왕세자 저하가 어딘가 이상하다는 생각에만 무게감이 실렸다.

 

  몇 시간 뒤 빌헬름 관에서 얼굴을 마주친 플란츠는 몇 시간 전에 자신이 한 말이 정확히 무슨 의미였는지는 끝끝내 말해주지 않았다. 아르센의 예상대로였다. 때문에 젖은 옷을 입고 아우님을 만나야 할 일이 있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르센은 끝끝내 알지 못했지만, 시일이 지나면서 그런 것쯤은 아르센 안에서 사소한 의문으로 격하되기에 이르렀다. 얼마 안 가 하루가 멀다하고 칼리안의 하소연 아닌 하소연을 듣게 된 탓이다.

 

  처음에는 으레 하던 푸념의 연장 선상인 줄로만 알았다. 이렇게나 어리고 연약하시면서 당최 뭘 믿고 그러시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동생 말을 듣지 않는 철없는 형님 때문에 내가 또 오십 년을 늙었다는 식의. 그래서 적당히 들어주며 고개를 끄덕이면 될 줄로만 알았다. 그게 아니라는 걸 깨닫는 데는 단 이틀이면 충분했다. 칼리안의 입에서 나온 하소연 아닌 하소연은 그간 들었던 것과는 미묘하게 궤를 달리하고 있었다.

 

 

  "헤르츠 경. 들어 보세요. 글쎄 어제는……."

 

 

  익숙한 서두가 흘러 나오자마자 아르센은 올 것이 왔다는 표정을 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헤르츠 경. 들어 보세요. 글쎄 어제는……. 으로 시작하는 불길한 얘기는 오늘을 포함하여 벌써 열흘째 계속되고 있었다. 윗사람의 푸념과 하소연을 듣는 것도 엄연한 감정 노동의 일환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아르센이었으나 계급 앞에서는 그 신념도 다 무의미했다. 까라면 까고 들으라면 들어야지 별수가 없다.

 

  속으로 코코 아빠와 코코를 죽어라 떠올리며 표정 관리를 위해 애쓰는 아르센의 귀에 꽃잎처럼 부드러운 미성이 한들한들 내리 앉았다. ……완두콩이 저번처럼 한쪽 허벅지를 이불 밖으로 드러내다 못해 이번에는 아주 가슴께까지 침의를 걷어 올린 낯부끄러운 행색으로 잠을 청하고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물론, 형님께서 어떤 모습으로 주무시건 내가 상관할 계제가 아니라는 건 압니다. 또한 예전에는 자주 그런 식으로 주무셨다는 것도 익히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말입니다. 더위도 추위도 많이 타시는 분께서 감기에 걸리려고 작정이라도 하셨는지…….

 

 

  "아무래도 뭘 잘못 드신 것 같은데."

 

 

  뜰채로 떠 올린 햇빛을 푸르른 바다에 듬성듬성 흩뿌리고 성의 없이 뭉갠 것처럼, 드문드문 주홍빛으로 물들기 시작한 하늘 아래 우렁찬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은접시처럼 쨍쨍하게 타오르던 해가 덜 익은 노른자처럼 풀어져 하늘로 스미는 시간임에도 빌헬름 관에서는 발칸의 마법사들이 플란츠의 선창에 맞추어 체력 단련을 하는 훈훈한 광경이 한창이었다. 그래서 무의식중에 듣지 못할 것이라 여겼나 보다. 옆에 있는 사람이 귀 밝기로 둘째 가라면 서러울 소드 마스터라는 점을 그만 간과하고.

 

 

  "응? 지금 뭐라고 했습니까, 헤르츠 경?"

 

 

  신의는 있어도 충의와는 거리가 먼 마법사들을 능숙하게 통솔하는 새파란 머리통을 흐뭇한 얼굴로 지켜보던 칼리안의 얼굴 위로 삽시간에 화사한 미소가 만개했다. 실로 꽃 같은 미소나 그 속에 날카로운 칼이 숨겨져 있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아르센은 뒤늦게 헙 하고 입을 다물었다가 큼큼하며 공연히 목을 가다듬었다. 하필이면 부지불식간에 그런 말이 새어나갈 게 뭐란 말인가. 하여튼 입이 원수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왕자님."

  "하기야, 아무리 돌아버린 마법사라고는 하나 암만 그래도 내 형님께서 뭔가 잘못 드신 것 같다는 그런 말을 내 앞에서 할 만큼 경이 미쳤을까."

 

 

  ……다 들으셨잖습니까. 지금이라도 준비할까요. 안네루시아. 매도 먼저 맞는 매가 낫다고 이참에 자진 납세해서 세뉴 강으로 가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방긋방긋 웃는 칼리안을 보며 아르센이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대강의 훈련을 끝낸 플란츠가 두 사람이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그러자마자 딸기처럼 물렁해진 붉은 눈이 플란츠의 모습을 위아래로 바삐 훑었다. 늘 핏기없이 창백하게 말라 있던 얼굴이 오찬을 들고 난 이래로 계속된 훈련 때문에 발그스레하게 상기되어 있었다. 이제야 조금 살아 있는 사람처럼 여겨지는 얼굴이었으나 칼리안의 미간은 여지없이 찌푸려졌다. 그 얼굴에 자잘한 생채기며 흙먼지가 가득했던 탓이다.

 

  기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오늘의 훈련 일정에는 마법사들과의 대련도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흙먼지는 그렇다 쳐도 자잘한 생채기쯤이야 시스파니안의 위대한 축복으로 몇 분 뒤면 감쪽같이 나을 터였다. 그럼에도 그 모습을 보자마자 클린 마법부터 외운 칼리안은 아르센이 보기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플란츠를 살뜰히 살피기 시작했다.

 

  여긴 누가 그랬습니까? 여기는요. 또 여기는……. 뺨에 난 생채기를 하나하나 더듬어나가는 눈꼴이 시린 광경 앞에서 아르센은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아무리 그래도 상사 앞에서 헛구역질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칼리안의 손이 움직이는 것에 맞춰 시시각각으로 새파랗게 질려가는 부군단장의 모습을 힐끗 본 플란츠가 한 손을 들어 칼리안의 행동을 제지했다.

 

 

  "그만."

  "그만은요. 형님 이거 여기서 조금만 삐끗했다가는 눈까지 다치실 뻔했습니다. 누굽니까?"

 

 

  자못 심각한 어조였으나 그리 말하는 칼리안의 손은 플란츠의 목덜미에 가닿아 있었다. 거기서 조금만 삐끗하면 눈까지 다칠 뻔했다니, 누가 봐도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지그프리드의 소가주가 리리에를 걱정하고 염려한 끝에 하는 행동보다도 더한 짓을 로젤리타까지 다녀온 형님에게 하는 이 우스꽝스러운 광경을, 만일 드미레아가 봤더라면 크게 혀를 찼을 게 분명했다. 큰 상처도 아니고 이까짓 생채기쯤이야 축복의 힘을 빌리면 금세 낫는다. 더군다나 대련 때마다 목덜미를 신나게 그어 댄 사람이 할 법한 말은 아니었다. 그걸 알면서도 지나치게 호들갑을 떠는 작태에 플란츠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작작 하지."

  "내 형님이 연약하셔서 이 아우가 걱정이 큽니다. 축복이 있으니 흉은 안 지시겠지만..."

  "……괜찮으니까. 그보다, 조금 더운데."

 

 

  그러며 플란츠는 자연스럽게 셔츠 단추를 풀려 했다. 하지만 단추 하나를 풀기가 무섭게 검은 장갑을 낀 손이 플란츠의 손목을 붙들었다. 뒤이어 물 흐르듯이 유려한 손길로 플란츠가 방금 푼 단추를 도로 잠가 낸 칼리안이 무시무시한 얼굴로 아르센을 돌아보았다. 헤르츠 경. 뭐 하고 있습니까. 내 형님 저하께서 덥다고 하시는데. 그러니 경의 특기인 얼음 마법으로 주변을 시원하게 만들든 아예 얼려버리든 아무튼 형님의 더위가 가시게끔 뭐라도 좀 해보라는 압박이자 명령이었다. 아르센은 미친 따까리답게 그 명령을 충실히 수행하려 했지만, 주문을 외우려던 입술은 자신을 서늘하게 일별한 연둣빛 시선에 곱게 다물렸다.

 

 

  "뭐 하고 있습니까?"

  "아니, 그게 말입니다."

  "……안 더워."

  "조금 전에는 덥다고 하셨잖아요."

  "잘못 말했어."

 

 

  플란츠는 그리 말하며 아르센을 향해 미미하게 턱짓을 했다. 그 순간 아르센은 플란츠의 눈에 불만이랄지 서운함이랄지 섭섭함이랄지 여하간 하나로 딱 정의 내릴 수 없는 복잡다단한 감정이 서린 걸 보았다. 그 감정이 플란츠의 하나뿐인 동생에게서 기인했음은 너무나도 자명했다. 왕세자 저하께서 왕자님 때문에 그런 감정을 가지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좌우지간 이럴 때는 잠자코 플란츠의 지시를 따라 자리를 피하는 게 상책이었다. 아르센은 칼리안과 플란츠에게 번갈아 묵례한 뒤 잽싸게 그 자리를 벗어났다.

 

  눈치 빠른 파란 머리 마법사가 바람처럼 사라지고 나니 이제 남은 건 저만치 멀리에 옹기종기 모여서 또 정신 나간 짓을 벌일 준비를 하고 있는 발칸의 마법사들과 두 명의 왕족뿐이었다. 그러나 멀리 있는 마법사들은 그들이 좋아하는 정신 나간 짓 외에는 안중에도 없었으니 실상 이 장소에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차근차근 따져본 끝에 이곳에 단둘만 있다는 걸 확신한 플란츠의 입이 조심스레 열렸다.

 

 

  "돌아갈 건데."

  "아, 체르밀로 가시게요?"

  "응. 그런데……."

 

 

  플란츠는 칼리안을 힐끗 쳐다보았다가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걷기가 좀 힘든데."

  "어떤 놈입니까."

  "아니라고. 그런 거."

 

 

  당장이라도 발칸 전원을 집합시키다 못해 붉은 오러에 피어를 더해 무시무시한 검을 만들어 낼 기세인 칼리안을 재빨리 막아서며 플란츠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럼요."

  "그냥, 좀. 그래서 아우님이……."

 

 

  그래서 아우님이 부축해줬으면 좋겠는데. 플란츠는 그런 말을 하려 했지만 말은 채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플란츠가 말을 맺기도 전에 칼리안이 빌헬름 관을 지키고 있는 시종을 불러 마차를 부르고 나선 것이다.

 

 

  "제가 말해뒀으니 조금 있으면 마차가 도착할 겁니다. 그러니 그거 타고 돌아가셨다가, 오늘은 푹 쉬세요. 무리하시면 안 됩니다."

  "……."

  "형님?"

 

 

  연분홍빛 입술이 몇 번인가 달싹였다. 포동포동 살이 오른 루시의 앞발이 고단한 잠을 청하고 있는 몸을 사정없이 꾹꾹 눌렀을 때처럼 불편한 얼굴을 하는 플란츠를 보며 칼리안은 고개를 갸웃했다. 형님 표정이 뭔가 마뜩잖아 보이시는데. 혹시 몸이 많이 불편하신가? 걱정과 다정과 애정이 여름철의 햇빛처럼 진득하게 녹아 흐르는 눈앞에서 플란츠는 애꿎은 입술만 꾹꾹 깨물었다. 그렇게 감추고 싶은 심정은 귀신같이 알아채는 주제에 왜 이런 쪽으로는 한없이 무디기만 한 건지.

 

  야심만만하게 준비한 계획이 실패한 게 이번으로 벌써 몇 번째더라. 될 수 있으면 어물쩍 넘어가는 게 좋을 부분에서마저도 영민한 머리는 눈이 부실 정도의 성과를 자랑했다. 자그마치 보름 간 연이어 온 민망한 실패의 나날이 하나도 빠짐없이 덧그린 것처럼 떠올랐다.

 

  최초의 기억은 연병장에서부터 시작했다. 여느 때처럼 키리에와 연병장에서 대련을 마친 플란츠는 그날도 키리에와 자신의 대련을 보기 위해 연병장에 와 있었던 칼리안을 힐끗힐끗 보며 평소보다 배는 가쁜 호흡을 했다. 다분히 어른의 의도를 양껏 담은 행동이었다. 그런데 칼리안은 눈만 크게 떴을 뿐 얼굴을 붉히지는 않았다. 키리에와 쉴 틈 없이 검을 맞대느라 발그스레하게 물든 얼굴을 하고, 민망하기 짝이 없는 호흡을 하고 있음에도 그랬다.

 

  칼리안은 얼굴을 붉히기는커녕 그 꽃다운 얼굴이 파랗게 질려선 걱정을 주렁주렁 매달고 플란츠에게 다가왔다. 그 얼굴을 보고 자신이 공연한 짓을 하여 아우님께 근심 하나를 더했다는 생각에 플란츠는 급히 호흡을 갈무리했다. 그런 게 아니라는 뜻을 전하기 위해서. 그러나 칼리안은 "어디 아프세요? 열이 있으신 건 아닙니까?” 하며 플란츠가 입을 열기도 전에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붓더니 손에 끼고 있던 검은 장갑을 빼고 맨손으로 플란츠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이마에 닿은 손은 속이 녹아내릴 만큼 뜨끈했고 좋았지만 딱 거기까지만이었다.

 

  칼리안은 그 이상을 해주지 않았고 "열은 없으신 것 같아 다행입니다."라며 떨어지는 손을 붙들어다 제 뺨에 대고 비빌 용기는 플란츠에게는 아직 없었다. 설사 있다 하더라도 그 짓을 칼리안의 충직한 따까리가 지켜보는 앞에서 자행할 정도의 용기는 나지 않았다. 그 따까리가 당신이 뭘 의도한 건지 내 왕자님은 모를지언정 적어도 나는 다 알겠다는 눈을 했다가 조용히 고개를 모로 돌리는 상황에서는 더더욱.

 

  쟤도 아는 걸 너는 왜 몰라.

 

  오갈 곳 없는 억울함이 울컥 솟구친 건 그 한 번으로 끝이 아니었다. 분명 자신보다 연세가 더 많으신 아우님께서는 어찌 된 영문인지 플란츠의 언행에 묻어나는 성적 뉘앙스를 번번이 알아차리지 못했다.

 

  큰마음 먹고 대담하게 "나 오늘 한가한데."라는 말을 했을 때는 "그럼 이참에 푹 쉬세요. 매번 잔업 처리하시느라 얼굴 밑이 까맣게 죽어 가는 꼴 보는 제 심정도 좀 생각해주시고요. 듣자 하니 적당히 다디단 차가 숙면에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라는 말을 돌려주질 않나, 이건 안 되겠다 싶어 일부러 허벅지까지 다 드러내 가며 자는 척을 했더니 세상 다 산 늙은이처럼 폭삭 삭아가는 한숨을 내쉬며 이불을 덮어주질 않나, 달큰하게 조린 잼이 가득 든 디저트를 먹으며 다분히 의도적으로 손에 잼을 뚝뚝 흘리고 흘린 잼을 혀로 핥았을 때는 "리리에도 아니고 다 흘려가며 드시네. 아니, 혹시 어디 편찮으신 건 아니죠? 제가 먹여드릴까요? 아니다. 제가 먹여드릴게요. 자, 아 해보세요. 아……." 하는 낯간지러운 장면을 연출하기에 이르렀다. 플란츠는 됐으니 집어치우라는 말로 헛다리를 짚어도 한참 잘못 짚은 아우님의 행동을 사양하려 했으나 그럴 틈도 없이 칼리안이 설탕에 조린 귤로 만든 파이를 집어 들었다.

 

  결국 그날은 못 볼 걸 보았다는 양 얼굴을 구기는 드미레아와 어쩐지 웃음을 애써 눌러 참는 듯한 히나를 앞에 두고 식사를 마쳐야만 했다. 아주 환상적으로 끝내주는 실패였다.

 

  그래서 이것도 저것도 다 아니고 좀 부족한가 싶어 여봐란듯이 젖은 옷을 입고 가슴팍을 다 풀어 헤친 채로 새벽녘에 칼리안을 만나러 갔다. 만나러 갔더니 이번에는 "감기 걸리신다니까요. 축복이 있으시다고는 하나, 그래도 몸은 챙기셔야 할 거 아닙니까. 이러다 크게 앓아누우시면 어쩌려고 이러십니까."로 시작되는 장장 한 시간짜리 연설을 들어야만 했다.

 

  아니 보통 그런 상황에서는 다른 생각부터 하지 않냐고. 그게 아니면 너 고자냐고. 생전 써보지 않았고 들어보지도 않았으며 책에서나 딱 한 번 보고 말았던 험악한 말이 목 끝까지 치달은 게 벌써 몇 번째인지 이제는 셀 수도 없었다.

 

  이제 그만 포기할까. 그러나 잠든 신에 맹세코 일평생을 통틀어 이처럼 강렬하게 무언가를 원한 적은 없었다. 게다가 자신의 하나뿐인 아우님도 그런 말을 하지 않았던가. 이제는 무언가를 내려놓고 흘려보내는 삶보다 원하는 걸 바라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고. 그러니 포기라니 말도 안 될 일이다.

 

 

  "아, 벌써 도착했네요. 제 말 꼭 명심하셔야 합니다. 아셨죠, 형님."

 

 

  어느샌가 도착한 마차가 플란츠와 칼리안의 앞에 얌전히 멈추어 섰다.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마차 문을 열어 주는 동생과 원망스러운 마차를 번갈아 보다가 플란츠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그럴 필요까진 없는데도 구태여 손을 잡아 주겠다 나서는 동생의 손을 붙들고 마차에 오르자 야속한 문이 잘도 닫혔다. 플란츠는 붉게 물들어 가는 하늘 아래에서 안네의 발톱처럼 작아지는 칼리안을 오래도록 보며 바삐 머리를 굴렸다. 덥다는 핑계로 은근슬쩍 옷을 벗어서 칼리안의 마음이 동하게끔 하려던 계획도 실패, 체르밀까지 부축해달라는 말로 은근하게 스킨십을 유도해 보려던 계획도 실패라면, 다음에는 어떤 방법을 쓰면 좋을지에 대해.

 

  그리고 완두콩만 한 머리를 데구르르 굴려 나온 각종 방안을 열심히 실행에 옮기는 플란츠의 눈물겨운 노력은 날이 가면 갈수록 칼리안을 곤혹스럽게 했다. 그 노력을 하나하나 열거하자면 끝이 없었으나 크게 놓고 보자면 플란츠는 이전과는 백팔십도로 달라진 몸가짐을 유지했다. 정확히는 원치 않았던 망나니 행세를 하던 시절로 돌아간 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방탕하고 경박하게 굴었다. 칼리안이 체르밀 4층에 들를 적마다 플란츠는 흐트러진 모습으로 칼리안을 맞기 일쑤였고, 묘하게 나른하거나 풀어진 눈매로 칼리안을 훑곤 했다. 그뿐만 아니라 이따금 휘청이긴 했어도 대체로 각이 잡혀 있었던 걸음걸이는 길을 지나가는 음험한 맹수에게 자신을 내던질 것처럼 무방비하기 짝이 없었다.

 

  이 완두콩이 대체 왜 이래.

 

  급기야 그 언젠가처럼 셔츠를 배꼽까지 풀어 헤치고, 체르밀 3층의 침대에 오도카니 앉아 있는 플란츠를 보았을 때 칼리안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물을 수밖에 없었다. 형님, 제게 뭐 불만 있으십니까? 하고. 플란츠는 내리뜨고 있던 눈만 위로 올려 칼리안을 보았다가 물음과는 상관없는 대답을 꺼내 놓았다.

 

 

  "……몸, 뜨거운 거 같아서."

  "계속 그렇게 다니시니 진짜 감기라도 걸리신 거 아닙니까……. 이리 와 보세요."

 

 

  환장하겠네. 그러니까 왜 이렇게 다 내놓고 다니냐고. 자신의 타들어 가는 속도 모르고 어여쁜 속살 훌훌 내까며 다니는 애증 하는 형님을 향해 칼리안은 손을 뻗었다. 다른 때 같았더라면 유순하게 휘어지는 풀잎처럼 순한 성정을 지닌 왕세자답게 그 손길에 고분고분 제 몸을 내맡겼을 플란츠였지만 이번엔 달랐다. 연분홍빛 입술만 지그시 깨물고는 빈정이 상했다는 듯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것이다.

 

  형님, 잠시만요. 지금 그 몰골로 어디 가시려고요. 제 망토라도 덮고……. 심지어 테라스가 아니라 문으로 걸어가는 모습에 칼리안이 황망히 제 망토를 덮어주려 했지만 플란츠는 그마저도 거절했다.

 

  형님……. 진짜 제게 뭐 서운한 거 있으신 건 아니죠? 드물게도 어리광을 부리는 것처럼 튀어나온 말이 문을 나서려던 플란츠의 발걸음을 잠시나마 붙들었다. 제가 말씀드렸잖습니까. 서운하신 것, 마음에 안 드시는 것, 마음에 드시는 것, 그게 무엇이건 간에 형님의 입으로 직접 듣고 싶다고. 그 말에 내내 정면을 보고 있던 플란츠가 고개를 살짝 틀었다. 연분홍빛 입술이 무언가 말할 것처럼 달싹였다. 그랬기에 칼리안은 플란츠가 이번에야말로 뭔가 말해주리라 일말의 기대를 했지만 그 입술은 칼리안의 기대를 배반하며 이내 다물렸다. 그렇게 누가 봐도 불만과 서운함과 섭섭함이 가득한 얼굴을 한 채 플란츠는 어떤 말도 하지 않고 칼리안의 침소를 떠났다.

 

  그게 바로 어제 일이다. 이렇다 보니 칼리안은 새삼 이런 생각을 하기까지에 이르렀다.

 

  아니. 이 완두콩 진짜 반항기 아냐? 그러나 가만 생각해보면 자신만 이렇게 여기는 것일 수도 있었다. 거듭 생각한 끝에 칼리안은 가장 만만한 사람 하나를 골라 의견을 묻기로 했다. 자고로 훌륭한 국왕의 재목이라면 타인의 의견도 한번쯤은 들어봐야 하는 법 아니던가.

 

 

  "내가 지금 이 자리에 경만 있어서 하는 얘긴데."

  "제가 왕자님께만 드리는 말씀인데 말입니다."

 

 

  두 사람은 동시에 말을 뱉고 동시에 말을 삼켰다. 설마하니 동시에 엇비슷한 말을 꺼내리라고는 두 사람 모두 생각지도 못했던지라, 어색한 침묵이 일순 장막처럼 사위를 덮었다. 살다 보니 이런 일이 다 있네요.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양 새하얀 침묵을 말끔하게 걷어낸 칼리안이 환하게 웃으며 넌지시 제안했다.

 

 

  "셋을 세면 동시에 말하도록 하죠. 헤르츠 경."

 

 

  아르센은 재빨리 손사래를 쳤다. 원하지는 않았지만 어느덧 하늘을 뚫을 기세로 자라난 그의 눈치가 이런 상황에서는 동시에 말해봤자 좋을 게 없다는 걸 경고문처럼 알려주고 있었다.

 

 

  "왕자님 먼저 말씀하십쇼."

  "그래요, 그럼. 내가 먼저 말해볼까."

 

 

  칼리안은 지난 보름간 있었던 일에 대해 아르센에게 낱낱이 털어놓았다. 대체로 아르센에게 하소연 조로 털어놓던 이야기에 몇 가지 사건을 첨가하여. 가끔 겁대가리 상실한 것처럼 굴며 맞먹으려 들긴 해도 대체로 이런 일을 발설하지 않으리라는 굳은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정정한다. 굳은 믿음과 오러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난 보름간 플란츠가 칼리안에게 어떤 행동을 했는지 소상히 듣게 된 아르센은 칼리안의 앞이라는 것도 잊고 입을 떡 벌렸다. 왕세자 저하께서 요즘 뭔가 이상하신 거 같은데 혹시 왕자님께서는 뭣 좀 아시는 거 없냐는 건방진 물음은 목구멍 안쪽으로 꾹꾹 집어넣은 채.

 

 

  "……그렇게까지……. 그런 것까지 하셨……. 다고요?"

  "네. 덕분에 내가 요새 걱정이 아주 많습니다."

  "그거……. 누가 봐도 유혹 아닙니까?"

 

 

  파란머리 마법사 너는 그걸 어떻게 아냐고, 그렇게 물으려던 붉은 입매가 잠잠해졌다. 유혹……. 유혹이라. 제2의 반항기를 맞이한 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도무지 이해하지 못할 완두콩의 온갖 행각에 유혹이라는 단어를 붙이니 그럭저럭 말이 되는 것 같기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에 완두콩과 유혹이라니 세상에 그것만큼 어울리지 않는 단어의 조합이 또 있으랴 싶었다.

 

  칼리안은 서명을 하기 위해 들었던 깃펜으로 책상을 톡톡 치며 생각에 빠졌다. 완두콩과 유혹이라니. 차라리 루시와 안네가 닭가슴살을 먹기 위해 플란츠를 유혹한다는 게 더 신빙성 있을 정도였다. 이리 생각하고 저리 생각해 보아도 제 머릿속에서 도무지 결합되지 않는 두 개의 단어 때문에 칼리안이 깊은 상념에 빠지려던 찰나, 아르센이 툭 던지듯이 말을 뱉었다.

 

 

  "두 분이 각별하신 사이라는 거, 웬만한 사람들이라면 다 알고 있습니다."

  "각별한 사이긴 하죠. 형님과 내……. 예?"

  "그러니 누가 봐도 유혹이라고 할걸요. 제이아 경도, 페일튼 경도.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는 베른 경이 그랬습니다. 두 분께서 서로에게 각별한 마음을 품고 계시는 것 같아 어쩐지 다행이라고. 사랑을 하게 되면 다들 달라진다는데 좋은 왕세자님이 자상한 왕자님을 참 많이 좋아하셔서 그분답지 않은 행동도 이렇게 하시는가 보다, 하고. 아무튼 그러자 집에 겁대가리 놓고 온 신입이 호들갑을 떨며 묻지 뭡니까. 그럼 지금 세자 저하께서 유혹……. 뭐 그런 걸 하고 계신 거냐고."

 

 

  대수롭잖게 이어지는 말에 붉은 눈이 휘둥그레 뜨였다. 이따금 돌아버린 마법사답게 헛소리를 늘어놓는 미친 따까리는 그렇다치고, 플란츠를 끔찍하게 여기는 앞의 두 사람도 그렇다치고, 우리 히나가 하는 말이 틀릴 리가 없다는 굳은 믿음을 가진 사람의 눈이 빠르게 깜박였다.

 

  그래. 우리 히나가 하는 말이 틀릴 리가 없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고 보기만 해도 빛이요 진리요 생명인 히나의 입에서 하는 말이 틀렸다는 게 말이 안 된다. 그렇다면 정말 나와 형님이 각별한 사이라는 걸 모두가 알고 있다는 뜻일 텐데, 대체 언제 들켰는가에 대한 생각은 곱이 접어 날려버린 칼리안이 한철에 피는 꽃처럼 섬뜩한 아름다움을 그 얼굴에 매달며 웃었다.

 

 

  "그런데 경은 어떻게 유혹이라고 확신합니까? 혹시 경에게도 그랬습니까? '내' 형님 저하가?"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아도 그 머리 파릇파릇한 왕세자 저하께서 여기 계시는 왕자님의 형님이시라는 건 제가 알고 세렌티가 알고 위대한 시스파니안께서 익히 아시는 사실인데도요……. 그리고 세자 저하께서 미쳤다고 제게 그러실 리가 없지 않습니까. 아니거든요. 그러신 적 없거든요.

 

  그러니까 그 불길하게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검붉은 오러 좀 거두어주십사 청해보려 했던 아르센은 몇 마디 말을 뱉기는커녕 입을 꾹 다물었다. 보름 전에 목격했던 어느 광경이 재수 없게도 머릿속에 퍼뜩 떠오른 탓이었다. 호수에서 한가득 쏟아진 물을 맞아 촉촉하게 젖은 얼굴을 하고 있었던……. 검붉은 오러가 예리한 칼날이 되어 목전까지 들이닥치는 환상 속에서 아르센은 재빨리 머리를 저어 그 끔찍한 상상을 훌훌 털어내었다. 그리고 발칸의 부군단장직을 역임하면서 눈칫밥을 먹는 데는 이 골이 난 사람답게 잽싸게 세 치 혀를 놀렸다.

 

 

  "세자 저하께서 귀애하시는 건 왕자님뿐이시잖습니까."

 

 

  그리고 전 집에 코코 아빠 있습니다.

 

 

 

*

 

 

 

  "형님께서 하신 모든 행동을 일컬어 유혹이라 하던데요. 헤르츠 경이."

  "……."

  "혹 사실입니까?"

 

 

  사실이라면, 아우님은 어쩔 건데. 플란츠는 입을 꾹 다물었다. 급작스레 예고도 없이 들이닥친다 싶었더니 대뜸 하는 말이란 게 저거였다. 마음을 고백한 지 반 년이 지났건만 칼리안은 여전히 손을 잡고 입을 맞추는 것에만 만족하는 형국이었다. 그렇지만 칼리안이 만족했을지언정, 혹은 만족하지는 못했으나 소드 마스터이자 연세 지긋하신 아우님의 눈으로 보기에는 마냥 어리고 연약하기만 한 나의 형님 저하를 생각하여 자신의 욕망을 꾹꾹 내리누르고 있었을지언정, 어찌되었건 간에 플란츠는 만족하지 못했다. 그래서 속된 말로 밥상은 내가 차려 놓을 테니 너는 안심하고 먹기나 하라는 뜻에서 이런저런 낯간지러운 행동을 일삼았던 것이건만.

 

 

  "형님께서 이토록 아무 말씀도 없으신 걸 보니, 아무래도 헤르츠 경이 한 말이 진짜였나 보네요."

 

 

  나의, 형님께서……. 풉, 큭, 하하, 아하하하……. 웃음을 겨우겨우 눌러 참는 모양새였던 칼리안은 급기야 배를 움켜쥐고 허리를 꺾어가며 말 그대로 숨이 넘어갈 듯이 웃기 시작했다. 화사한 얼굴에 습관처럼 웃음을 매달곤 하는 칼리안이 이처럼 포복절도하는 경우는 대체로 머리끝까지 화가 났을 때뿐이었다. 그 때문에 혹여나 제 저의를 드디어 알게 된 칼리안이 화가 난 건 아닌가 싶어 플란츠가 입술을 열려던 순간, 칼리안이 하도 웃어 눈꼬리에 맺힌 눈물을 손가락으로 닦아내며 입을 열었다.

 

 

  "나만 몰랐네요.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다들 아는데, 나만 몰랐어. 심지어 형님께서 날 속이려고 한 것도 아니었는데……."

  "……다 웃었으면, 그만 웃지."

  "아직이요. 조금만 더요."

  "……나가."

  "화내지 마세요."

  "아우님이 여기 있을 거면, 내가 나가지."

 

 

  그런 뒤 플란츠는 정말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그대로 문밖을 빠져나갈 심산이었던 플란츠의 몸을 붙든 건 칼리안의 단단한 손이었다. 그간 자신이 벌인 모든 행적이 뒤늦게 무안함으로 다가오는 탓에 제대로 얼굴도 마주치지 못하는 플란츠를 순식간에 제 품에 가득 가둔 칼리안이 쏟아지는 별처럼 황홀한 음성으로 속삭였다.

 

 

  절 그렇게 원하셨습니까? 형님.

 

 

  플란츠는 연분홍빛 입술만 지그시 깨물었다. 고작 그 말 하나만으로도 뒷덜미에 홧홧하게 열이 오르는 듯했다. 빠져나가고자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든지 자신을 가둘 두 팔을 풀어 줄 동생이라는 걸 알면서도, 칼리안의 두 팔이 만들어 낸 달콤한 감옥에 기꺼이 자신을 파묻기로 한 플란츠가 한참 뒤에 고개를 끄덕였다.

 

 

  "……원했어."

  "저를요."

  "그래. 아우님을."

 

 

  좀체 자신의 바람을 날 것 그대로 소리 내지 못하는 사람의 입에서 새어 나온 지극히 사랑스러운 욕망이었다. 매끄러운 가죽으로 된 검은색 장갑을 낀 손이 플란츠의 뺨에서부터 쇄골을 거쳐 부끄러운 줄 모르고 풀어헤친 가슴팍 사이로 미끄러지듯이 기어들어 갔다. 자신의 손조차 닿아본 적 없는 가슴을 농치듯 건드리는 섬뜩한 감촉에 플란츠는 어깨를 움찔 떨며 가만히 주먹만 그러쥐었다. 그 반응을 달갑게 음미한 칼리안이 귓불을 자근자근 깨물며 물었다. 제가 이렇게 해드리기를 바라셨어요? 살갗 위에 불씨가 화르륵 올라붙는 것만 같은 목소리였다. 플란츠는 침을 꿀꺽 삼켰다가 이번에도 고개를 주억거렸다.

 

 

  "너무 늦게 형님의 바람을 알아차린 불민한 아우를 용서하세요."

  "읏, 잠깐……."

  "그 대신, 그간 미련한 아우를 기다리며 인내하셨던 시간이 서럽다 여기시지 않을 만큼 제가 충분히 사랑해드릴 테니까요."

 

 

  단단한 두 팔로 플란츠를 사뿐하게 안아 올린 칼리안이 한 걸음을 떼었다. 소리조차 나지 않는 발걸음이 향하는 행선지는 명확했다. 졸지에 칼리안의 품 안에 얌전히 안겨 침대까지 이동하게 된 플란츠였지만 새빨갛게 물이 든 입술이 불만을 토해내는 일은 없었다. 쓸데없는 말을 내뱉으며 시간을 낭비하기엔 지금부터 이어질 시간이 너무나도 소중했으므로.

 

  성큼성큼 걸어 한달음에 침대에 도착한 칼리안은 푹신한 이불 위에 플란츠를 고귀한 보석처럼 조심스레 누였다. 가느다란 머리카락이 버석한 이불 위로 소란하게 흩어지는 감각에 플란츠는 저도 모르게 몸을 굳혔다. 두려우세요? 그 어떤 슬픔마저도 모조리 어루만져 줄 것처럼 감미로운 음성에 색소가 옅은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플란츠의 눈앞에 선 칼리안의 등 위로 달빛이 소낙비처럼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눈이 부신 달빛 사이로 드러나는 화려한 얼굴에 미처 숨기지 못하는 정욕이 그림처럼 선명했다.

 

 

  "……아니."

 

 

  정말이지 두려울 건 없었다. 플란츠가 바라마지 않았던 것들이 지금 이루어지려 하고 있어서가 아니라, 처음부터 지금까지 칼리안이 플란츠에게 두려움의 표상으로 다가왔던 적은 한 번도 없기 때문이었다. 그는 늘 선명한 빛 같은 것이었다. 강인하고 아름다우나 어쩐지 쓸쓸하게도 여겨지는 분명한 빛이었다.

 

  플란츠는 칼리안을 향해 팔을 뻗었다. 그 언젠가 두 사람분의 목숨을 손에 들고 칼리안을 향해 손을 뻗었을 때처럼, 그러나 평온한 죽음을 바랐던 그때와 달리 숨이 막히는 애정을 원하며 뻗어 나간 손에 칼리안의 손이 빈틈없이 겹쳐졌다. 제가 어떻게 해드리기를 원하세요? 칼리안이 몸을 수그리자 플란츠가 알고 있는 것을 통틀어 그 무엇보다도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세계가 플란츠의 두 눈에 가득 들이찼다. 플란츠는 진득한 욕망이 붉게 스민 입꼬리를 자신만만하게 들어 올렸다. …사랑해줘. 내가 기다린 만큼. 뻔뻔하다 싶을 정도로 내뱉어진 적나라한 요구이자 고백에 칼리안이 플란츠의 콧잔등에 가볍게 입술을 대었다.

 

 

  "예. 나의 형님 저하께서 원하신다면, 원하시는 대로, 얼마든지."

 

 

  칠흑 같은 그림자가 플란츠의 몸을 가득 덮었다. 그러고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입술이 맞닿았다. 눈을 깜박이는 그 찰나에 서로의 얼굴을 보지 못하는 것조차 아까웠기에 두 사람은 눈조차 감지 않고 서로를 탐닉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곧게 뻗은 두 손이 칼리안의 등을 껴안고 그의 등을 사선으로 가로지르는 흉터를 애틋하게 더듬어 나갔다. 이것은 지키고자 하는 자를 지켜 낸 자의 긍지이며 동시에 사랑의 흔적임을, 그리하여 결코 검사의 수치 따위가 아님을 플란츠는 무척 잘 알고 있었다.

 

 

  "제 등을 너무 사랑하시는데요."

  "아까워서."

 

 

  입술을 가깝게 맞붙인 상태에서 태연하게 뱉은 말에 칼리안이 숨죽여 웃었다. 이윽고 약속처럼 숨과 숨을 빼앗고 마음과 마음을 나누는 입맞춤이 재개되었다. 목을 타고 넘어가는 타인의 타액마저 달게 느끼며 두 사람은 서로를 거세게 끌어안았다. 습기 찬 숨소리와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에 이어 서로의 다리가 난잡하게 얽히는 소리가 고즈넉했던 방안을 빈틈없이 메워나간다. 이제부터는 온전한 연인의 시간이었다.

 

 

 

2019.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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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9.29

memo2020. 9. 29. 23:48

 

우리집 첫 6초는 메이링 0ㅁ0~

 

원래는 루실리카를 먼저 6초 해주려 했는데 육성 이벤도 있고.... 30일이 생일이라 경파 이벤도 있어서 겸사겸사.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 게임 재화 모으기가 너무 빡세다....ㅠ_ㅠ

 

필드에서 떨어지는 골드가 지금의 10배는 되어야 하는 거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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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록

2차/적왕사2020. 9. 15. 20:16

 

  - 미왕플 시절 아르센 시점

 

 

 

  그를 처음 만난 건, 어수선했던 카이리스의 국정이 어느 정도 정리 되어 갈 즈음이었습니다.

 

  한동안 카이리스의 정세는 다소 혼란스러웠습니다. 모든 것은 카이리스 제3왕자 때문이었지요. 저마다 한마디씩 말을 얹기 좋아하는 귀족들이 모인 아스트리샤 거리에는 제3왕자를 둘러싼 이야기들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평소 제3왕자는 시스파니안을 꼭 닮은 외모로 알려져 있었지만, 귀족들의 입에 그 이름이 쉴 새 없이 오르내린 건 그의 외모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미수에 그친 그의 패륜적인 범행 때문이었지요.

 

  그는 카이리스의 왕비인 실리케를 독살하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그 범행이 발각된 뒤에는 돌연 자결을 택했어요. 비난의 대상이 이미 죽었음에도 귀족들은 입을 모아 그의 끔찍한 행위를 지탄했습니다. 그것은 이미 세상을 뜨고 없는 이를 비난함으로써 자신들의 결속력과 입지를 공고히 하려는 행동이었습니다.

 

  아스트리샤 거리만큼은 아니더라도 테이난샤 거리 역시 소문이 모이기 좋은 곳인 탓에 나는 원치 않아도 어디에서나 제3왕자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테이난샤 거리의 마법사들 중에는 그게 정말 자결이겠느냐, 하는 물음을 은밀히 던지는 자들도 있었으나 섣불리 소리 내어 발설하는 이들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제3왕자의 악독한 범행으로부터 살아남은 왕비를 기원하는 행사가 열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지그프리드가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리베른의 대마법사로 알려진 앨런 마나실을 불러 들였지요. 좀처럼 먼저 움직이지 않는 마법사 연합은 그의 지휘 아래 제3왕자의 자결을 둘러싼 진상을 조사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앨런 마나실이 있던 곳이 카이리스가 아니었으므로 애석하게도 그 조사는 별 소득 없이 마무리 되었습니다. 어디까지나 표면적으로나 그랬을 따름입니다.

 

  제3왕자의 범행발각과 그의 자결로 인해 경악과 공포에 물들었던 국가는 언제 그랬냐는 듯 평온을 되찾아 가고 있었습니다. 물 밑에서는 아는 사람들만 아는 또 다른 일이 은밀히 추진되기 시작했고요.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것은 딱 그 즈음이었습니다. 정확히는 그를 독대한 것이 그때가 처음이었습니다.

 

  제2왕자의 비행은 테이난샤 거리의 마법사들에게도 유명했습니다. 그가 15세 때 성인식을 다녀온 이후부터는 지나칠 정도로 술을 가까이 하기 시작했다는 것 또한. 때문에 그의 몸에서는 술 냄새가 가실 날이 없다는 사실은 그의 시종이 아닌 이들조차 알고 있었지요. 그 정도가 하도 심해 왕자들이 광장에서 사절단을 배웅하는 일이 취소되었다든가, 중요한 식이 생략되었다든가 하는 일은 남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왕가의 수치 축에 끼지도 못했습니다. 모른다면 타국의 세작이라는 우스갯소리까지 나올 정도였으니까요. 그래서일까요. 그는 대개 그 이름보다는 ‘그 망나니’나 ‘저 망나니’ 같은 멸칭으로 지칭되곤 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직접 경험해보지 않은 이들을 상상할 때 그를 둘러싼 무수한 이야기를 토대로 삼곤 합니다. 그래서 그때까지만 해도 내게 그는 딱 그 정도에 불과한 왕자였어요. 철이 없고 생각도 없을뿐더러 주어진 생을 허투루 낭비하는 것만을 즐겨하는, 세상에 두려울 것 하나 없는 새파랗게 어린 왕자. 인생의 풍파 같은 것은 전혀 겪어보지 않았을 것만 같은 인물 말입니다.

 

  나는 그가 무척이나 오만할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다수의 귀족들처럼 마법사를 얕잡아 보고 안하무인으로 구는 치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의 호위 겸 감시 역으로 배정받았다는 걸 알았을 때는 시스파니안에게 원망 섞인 한탄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의 곁을 졸졸 따라다니느니 감자튀김을 얼리는 일이 더 생산성 있게 느껴질 정도였지요.

 

  그렇게 나는 아무런 기대 없이 그를 만났습니다. 백금과 토파즈를 가루 내어 뿌린 듯한 정오의 햇살이 체르밀 궁 내부에서 산산이 부서지는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는 그 부서져 내리는 햇살의 정 가운데에 서 있었어요. 어떠한 미동도 없이 말입니다. 그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그의 상급시종이 내가 찾아 왔음을 알렸습니다. 그러자 그는 내가 왔다는 사실을 그제야 알아챈 사람처럼 나른하게 풀어진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는 것이었습니다. 상급시종이 발소리도 내지 않고 방을 나간 뒤 굳게 닫힌 석문 같기만 했던 그의 입술이 느리게 움직였습니다.

 

 

  ……그렇군.

 

 

  그게 첫마디였습니다. 나는 그에게 왕실의 예법에 따라 예를 올리려 했지만 그는 그마저도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저었지요. 내가 누구인지 알리는 것조차 그는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아르센 헤르츠입니다, 하고 말을 올리려던 순간 그가 나의 행동을 제지했습니다.

 

 

  알아.

 

 

  과연, 그는 듣던 대로의 인물인 듯했습니다. 나는 당장에라도 삐딱해지려는 마음을 가까스로 바로 잡으며 입에 발린 소리를 혀끝에 올려놓았습니다. 세렌티의 축복을 받은 입이었다면 좋았겠지만 애석하게도 내게 그런 축복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살다 보면 때로는 개개인의 소신을 죽여야 할 때도 있는 법이고 지금이 바로 그때였습니다. 왕자님께서 알고 계시다니 영광입니다. 그는 눈을 한번 깜박였습니다. 그러더니 세간에서 그를 두고 하는 말들과는 어울리지 않는 쓸쓸한 얼굴—정말이지 그렇게밖에는 보이지 않았습니다—로 혼잣말을 뱉었습니다.

 

 

  ……이미 늦은 것을.

 

 

  그가 무엇을 두고 하는 말인지 나는 묻지 않았습니다. 그저 조용히 물러나야 할 때임을 직감하고 나중에 다시 찾아뵙겠다는 말을 했을 따름입니다. 그는 이내 언제 그런 쓸쓸한 얼굴을 했냐는 것처럼 한쪽 입술만을 끌어 올려 웃었지요.

 

 

  망나니의 뒤치다꺼리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닐 텐데.

  …….

 

 

  나는 뜨끔했습니다. 그는 아마도 테이난샤 거리에서 그를 두고 오르내리는 일련의 말들을 알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내가 아무런 대답도 못하고 있자 그는 실로 친절한 축객령을 내렸습니다. 나는 그의 앞에서 돌아 나오며 그를 만나기 전에 내가 그에 대해 가졌던 인상을 조금 수정했습니다. 세상의 풍파 같은 건 전연 모를 것 같은 인물이라고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그건 아닌 것만 같았습니다.

 

  기존의 사고를 전복시키는 새로운 사실은 쉬이 잊히지 않기 마련입니다. 체르밀 궁을 나온 뒤에도 그의 얼굴에 깃들었던 쓸쓸함—혹은 허무함—은 잔상처럼 눈앞에 아른거렸어요. 뜨거운 태양 아래에 오래 서 있다가 눈을 감았을 때 눈 위를 떠다니는 것들처럼, 그 모습은 오래도록 나를 괴롭혔습니다. 그건 한 순간에 몇 겹의 계절을 뛰어 넘은 듯한 얼굴이었어요. 마치 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그 얼굴을 몇 번이고 되새기며, 나는 그가 흡사 그저 그 자리에 존재하기만 할 뿐인 겨울나무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도 이미 오래 전에 밑동이 잘린. 그것이 그를 처음 본 나의 감상이었습니다.

 

 

 

 

 

  나는 명목상으로는 그의 호위 역으로 온 것이었습니다. 시스파니안의 가호를 받는 궁에서 이처럼 흉악무도한 범죄가 일어날 뻔했다. 앞으로도 삿된 것에 마음이 홀려 이와 같은 흉악한 범죄를 획책하는 자가 두 번 다시 나타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그러니 제2왕자의 신변에 위험이 없도록 각별히 살피라. 그런 지엄한 왕명을 받고요. 하지만 그는 나의 역할이 그것뿐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민하게 알아차린 듯했습니다. 이따금 나를 보며 경멸어린 시선을 보내곤 했으니까요.

 

  마법사도 참 할 짓이 없는 족속들이군.

 

  그 시선은 나를 그렇게 비난하는 것만 같았습니다. 날카로운 눈을 마주하며 나는 그에 대한 평가를 하나 더 수정했습니다. ‘생각만큼 생각이 없는 놈은 아니다’라고요. 그러나 그는 상급시종보다도 더하게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뒤쫓는 나를 보면서 질린 표정을 할지언정 그만 하라는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일단 왕명을 받고 온 놈이니만큼 그런 말을 하지 않는 게 좋다고 생각해서였는지, 해도 소용이 없다고 생각해서였는지는 모를 일입니다. 하지만 그가 ‘호위 역이자 감시 역’으로 따라 붙은 나를 기꺼워하지 않는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습니다.

 

  시간은 구름 떼가 흐르듯이 잔잔하게 흘러갔습니다. 체르밀 궁에서는 어떠한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한때 큰 소란이 일었던 나라는 어떤 일도 겪지 않은 것처럼 완전하고 고요했어요. 그렇게 한 사람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세상에서 말끔히 지워내고 있었습니다.

 

  시일이 지나면서 나는 과연 제2왕자의 감시 역으로 붙을 필요가 있었는가 하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는 감시가 불필요한 인물 같았습니다. 다시 말해 권력과는 무척이나 거리가 멀어보였어요. 그말인즉슨 권력 때문에 하나뿐인 형제를 해치는 잔악무도한 인간으로는 보이지 않았다는 얘기입니다.

 

  물론, 그의 어머니인 실리케는 달랐지만.

 

  잠시 다른 얘기를 하자면, 나는 처음부터 제3왕자가 자결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누군가의 간계로 그리 된 것이라고 여겼지요. 제3왕자가 겁도 없이 왕비의 독살을 획책할 만한 인물이 아니라고 여겼음은 물론입니다.

 

  외려 나는 실리케, 그야말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에게는 그만한 힘이 있었고, 무엇보다 내가 보고 들은 바에 의하면 실리케는 고작 왕비 자리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인물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나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르메인 국왕은 실리케가 제2왕자를 이용하여 또 무엇인가를 꾸밀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나를 그의 곁에 붙여 놓은 것일지도 모른다, 라고요. 또한 어쩌면 실리케가 자신의 계획에 훼방을 놓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나를 제2왕자의 곁에 붙여 놓은 것일지도 모른다고—제2왕자를 통해 실리케를 감시하고자—생각했습니다.

 

  당시 르메인 국왕은 모두가 오합지졸이라고 여기는 마법사들로만 이루어진 군단—발칸—을 창설하여 브리센을 집어삼킬 계획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 거대한 계획의 끝은 다소 희망적으로 점쳐지곤 했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삶에는 언제나 기습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리핀의 거대한 날개를 꺾고 그것을 사자의 날카로운 발톱 아래 둘 계획을 세웠던 르메인 국왕은 어느 날 돌연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원대한 계획의 끝을 목전에 둔 때였죠. 벼락 같은 죽음에도 실리케의 아들인 그는 놀라지 않았습니다. 놀라기는커녕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오리라는 걸 알았다는 것처럼 침착한 얼굴이었지요. 그리고 한마디를 했습니다. 못 볼 꼴을 보이는군. 그것이 왕가의 죽음을 두고 한 말이 아님은 누구나 알 수 있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아주 순탄하게, 마치 누군가가 이미 그를 위해 예비한 길을 그저 따라 올라가듯이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의 이름에 위대함을 뜻하는 ‘루’라는 한 글자가 더 붙게 된 날, 나는 비로소 르메인 국왕이 왜 나를 그의 감시 역이자 호위 역으로 붙여 놓았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 손 쓸 도리 없이 말라 비틀어진 연두색 눈이란…….

 

  그는 어디에도 적을 두지 않는 사람들과 같은 눈을 하고 있었어요. 내일 당장 낭떠러지 아래에 떨어져도 아쉬울 것 없는 사람처럼, 자신의 생에 조금의 애착도 느끼지 않는 이들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지상에서 가장 단단한 곳에 앉아 있으면서도 그 어디에도 뿌리를 내리지 못해 물 위를 떠다니고 있을 뿐인 부평초처럼…….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허무가 그의 주변에 가득했습니다. 나는 그제야 깨달았습니다. 르메인 국왕이 막으려 했던 것은 한 사람의 죽음이었다는 사실을요.

 

  그는 왕위에 오른 뒤 이전의 비행은 예행연습이었다는 것처럼 하루하루 날이 다르게 미쳐갔습니다. 광장에는 무고한 레니시타 잎이 종종 깔리곤 했습니다. 아스트리샤 거리의 모든 귀족들은 그의 이름을 올리며 공포에 질린 얼굴을 하기도 했지요. 그러나 공포의 이면에는 ‘무엇도 하지 않는’ 혹은 ‘무엇도 하지 못하는’ 왕에 대한 조롱과 멸시가 깃들어 있었습니다.

 

  나라는 거대한 그리핀에게 집어 삼켜진 지 오래였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이름보다는 브리센의 이름에 굴종했지요. 플란츠 왕은 이미 미쳤다. 하루가 다르게 미쳐가고 있다. 무능함이 극에 달해 눈을 뜨고 지켜볼 수 없을 지경이다. 거리에 만연한 소문들은 대체로 그랬습니다.

 

  불온한 얘기들은 마치 전염병처럼 퍼져 나갔지요. 나는 발칸의 군단장으로서, 또 마법사 연합의 일원으로서 그 모든 얘기를 듣고 있었습니다. 내전이 일어나거나 반란군이 조직되는 건 시간문제처럼 여겨졌어요. 그런데도……. 그런데도 나는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떠날 수 없었던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도 그의 마지막을 지켜보지 않으리라는 예감 같은 확신 때문이었을까요. 어쩌면 처음과 끝을 확인하고 싶어 하는 마법사의 본능 때문이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어찌되었건간에 그 죽어버린 눈에서 이따금 생생히 빛을 내는 광기에 내가 사로잡혔다는 것만은 확실합니다. 모두들 그가 미쳤다고 했고 나는 그의 눈동자에서 이따금 엿보이는 광증을 무시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무시무시하고도 유일한 생의 증거를요. 모든 게 죽어가는 이 나라에서 유일하게 살아 있는 그것을 말입니다.

 

  브리센의 횡포는 날이 갈수록 심해졌습니다. 도탄에 빠진 백성들의 원망이 하늘을 뚫는 것도 시간문제라고 여겨질 즈음 지그프리드의 새끼 코끼리가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얘기가 들려왔습니다. 불길한 세력이 사막 저편에서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얘기도요.

 

  그리고 그는 어느 날 전쟁을 준비하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되물었습니다. 왜 갑자기 전쟁을 준비하는 것이냐고는 묻지 않았어요. 전쟁이라 함은 카이리스의 손에서 발하는 것입니까. 그렇게 물었을 뿐입니다. 그는 땅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난 듯한 눈동자로 나를 돌아보았습니다.

 

  마법사. 이미 오래전에 가문 땅처럼 메마른 음성이었습니다. 그 목소리에서 생기라고는 느껴지지 않았어요. 그러나 나는 나를 똑바로 직시하는 그의 눈동자에서 형형한 빛을 보았습니다. 깨어진 틈으로 가느다란 빛 같은 게 새어나오고 있었어요. 그 즈음 그는 대개의 시간을 흐리멍덩한 눈으로 지냈고 가끔 가다 그런 눈을 하곤 했지요. 사람들은 그걸 두고 왕의 광증이 심해진다고 했지만, 나는 정말이지 그리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진정으로 미쳐있는 사람들은 그런 눈을 하지 않았기에.

 

  나는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어요.

 

 

  너희들은, 기사와는 다르지.

 

 

  그는 너희들이라고 하며 마법사와 기사를 구분지었습니다. 그의 말에 나는 조금 놀랐지요. 마법사들은 기본적으로 소속감을 지니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어딘가에 매여 있기보다는 자유를 추구하는 사람들이었어요. 그는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순응하지 않고 선택할 기회를 주겠다고. 전쟁은 카이리스의 손에서 시작될 것이나 따르지 않아도 된다고.

 

  그러니까 그는 마법사들이 어떤 부류인지 정확히 꿰뚫어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나는 답을 하는 대신 다른 물음을 입에 올렸습니다. 무엇을 위함입니까. 그는 조금 놀란 눈을 했다가 이내 여느 때처럼 그 얼굴에 권태로움을 두르고 대답했어요.

 

 

  없어.

 

 

  그럴 리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침략에는 그 원인이라는 게 있게 마련입니다. 물론 그가 말한 것처럼 아무 이유 없는 침략이 있을 수는 있어도 적어도 제 눈앞에 있는 그만은 그런 이유로 타국을 짓밟지 않는 사람이어야만 했습니다. 그것이 제가 그간 보아 온 그의 모습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타인이 이미 손에 쥐고 있는 것을 약탈하길 원치 않는 사람이었으므로.

 

  따라서 타인의 손에 이미 들어간 것을 빼앗고 싶어 하지 않는 자가 타인의 소유를 무력으로 쟁취할 생각을 할 때에는 그만 한 이유가 있을 게 분명했습니다. 잠깐의 생각 끝에 답은 곧 나왔습니다. 이유는 없는 것이 아니다. 다만 곧 존재하지 않게 될 일이므로 없다고 한 것뿐이라고. 지그프리드가 불러 들였던 리베른의 대마법사 앨런 마나실이 시간의 축을 확인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불길한 세력이 전능을 꾀한다는 얘기도요.

 

  현재를 살아가는 인간은 평생 영원에 다다르지 못합니다. 그것은 인간이 이미 종결된 시간을 뒤로 한 채 앞으로 닥칠 시간을 맞이하는 운명에 처해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영원은 오직 신의 공간에 속하고, 시간을 손에 넣는 자는 곧 전능을 손에 넣는다고도 할 수 있겠지요. 나는 직접적으로 시간의 축을 언급하는 대신 다른 말을 뱉었습니다.

 

 

  누구 하나를 위해 벌이는 전쟁이 아니라 하여도 이것은 일방적인 침략입니다.

 

 

  그는 부인하지 않았어요. 또한 정당한 명분을 들먹이지도 않았습니다. 나는 그럴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내가 그동안 보아 온 그는 무엇인가로부터 눈을 돌리는 대신 고개를 똑바로 들고 현실을 직시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면피용 변명을 내뱉는 대신 침묵을 택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무엇으로도 자신을 변호하려 들지 않았고, 그렇게 직시하게 된 현실이 설사 괴롭고 고통스러운 것일지라도 뒷걸음질치며 물러나려고는 하지 않았어요. 그는 자신의 과오와 저지른 죄를 한치의 덜어냄도 없이 인정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동시에 인간의 삶이 아주 공정해야 한다고 믿는 부류에 속했습니다. 무엇인가를 앗아왔다면 무엇인가를 지불해야만 하는 그런 공정한 삶 말입니다.

 

  사람들은 때로 대가 없이 무엇인가를 얻거나 나누어 주기도 하지만, 그의 삶은 그런 대가 없는 상냥함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지요. 대가없는 상냥함을 기대하는 삶보다는 타인의 생명으로 유예된 죽음에 대한 값을 치르는 삶 같기만 했습니다. 그는 지독한 르니에리 향 아래에 파묻힌 것들을 한시도 잊지 않는 사람이었으므로. 나는 말을 이었습니다.

 

  그것을 앞으로도 잊지 않으신다면, 뜻을 같이 하겠노라고.

 

 

 

 

 

  권력은 곧 타인의 생명을 지불하고 살아남는 게 허용되는 힘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가장 높은 권좌에 앉아 있는 그는 굳이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출정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기꺼이 그 침략의 최전선에 서고자 했어요. 그가 한시도 품에서 떼어놓지 않았던 검을 손에 쥐고. 시나스타라는 이름을 가진 검이었습니다.

 

  본래 그는 무엇에도 이름을 붙이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길들인 말에게조차 이름을 부여하지 않았으니 말 다 한 일이지요. 그가 발칸을 일컬어 ‘나의’ 발칸이라고 한 적이 없듯이, 그가 무엇인가를 지칭할 때는 그 앞에 소유격이 붙는 일도 없었습니다. 많은 귀족들이 사소한 것에도 자신의 이름이나 가문의 이름 따위를 붙이며 무언가에 대한 소유를 주장하고 자신의 힘을 과시하는 것과는 사뭇 다른 태도였지요. 그는 언제나 소유와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태도를 고수했습니다. 모든 것을 소유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는데도 의도적으로 그 모든 것들로부터 거리를 두는 것만 같았어요. 그랬던 그가 자신의 손으로 별의 조각을 얻고자 했을 때 저는 정말이지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가 아직 왕위에 오르기 전의 일입니다. 그는 암살자가 따라 붙을지도 모르는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직접 경매에 참여하여 그 조각을 얻어내고자 했어요. 나는 그에게 차라리 레넌에게 말해 경매를 취소시키는 게 어떻겠느냐고 넌지시 제안했지만 그는 입을 다물라며 일축했습니다. 그 조각이 과연 힘을 들여 얻어낼 만큼의 가치가 있는 물건인지에 대해 나는 의문을 가졌습니다만, 적어도 그에게는 그 이상의 가치가 있는 듯했습니다.

 

  나는 그에게 조각을 재료로 하여 만든 검에 이름을 붙이시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고는 곧 후회했어요. 그가 여태껏 이름을 붙이거나 한 일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으면서도 그런 말을 하다니. 괜한 말을 했다 싶었지요. 그런데 의외로 그는 선선히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시나스타, 라고요. 시나스타란 인접 국가인 세크리티아의 장례 때 하늘로 올려 보내지는 푸르고 하얀 꽃을 말합니다. 하늘로부터 떨어진 별의 잔재에 올려 보내는 꽃의 이름을 붙이다니. 모순적인 일이 아닐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어찌되었건 결국 그 검도 그의 손을 떠났으니 그것조차 온전히 그의 소유는 아니었던 셈입니다.

 

 

 

*

 

 

 

  ……어떠한 명분으로도 변호되지 않는 그 거대한 침략의 마지막 순간, 나의 얼음창은 왕제의 가슴을 꿰뚫었습니다. 나는 세크리티아의 왕제에게 한순간에 죽음을 선사했어요. 그것은 끝내 죽지도 못하고 어떻게든 나라의 마지막을 지키고자 했던 왕제에게 바치는 경의의 표시였습니다. 나의 손이 허공에서 내려옴과 동시에 세크리티아의 왕제는 바닥으로 고꾸라졌고 왕제가 쓰러진 자리에는 피웅덩이가 고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광경은 마치 수 억 개의 안네루시아가 흐르는 강 같기만 했습니다. 영웅의 마지막이 언제나 덧없다는 사실에 약간의 서글픔을 느끼며 나는 속으로 왕제의 죽음을 애도했습니다. 그리고 그를 맞이할 준비를 했지요.

 

  모두가 미친왕이라 칭송해 마지않는 나의 왕. 그는 저 멀리에서 세크리티아의 이름 없는 자를 베어낸 뒤 천천히 내가 있는 쪽으로 걸어왔어요. 빛이 없는 눈동자가 그 순간 무엇을 담고 있었는지 나는 알지 못합니다. 단지 나는 그 눈이 세크리티아의 왕제를 천천히 훑었다고 여긴 순간 그가 세크리티아의 왕제에게 시나스타를 바치는 것을 보았을 뿐입니다. 자신에게 더는 필요가 없다는 듯이. 혹은 오래 맡아두고 있던 것을 이제야 돌려주는 듯이.

 

  자신이 지니고 있던 유일한 것마저 타인에게 넘겨준 그는 이제 완벽한 빈손이었습니다. 참혹하게 불타는 광경 속에서 그는 아무것도 손에 쥐고 있지 않았어요. 돌이켜보면 그의 삶은 대체로 그러했습니다. 소유보다는 무소유에 와닿은 삶이었어요. 무소유와 왕족이라니, 무척이나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 아닐 수 없지요. 하지만 그는 진정으로 무언가를 소유하는 걸 내켜하지 않아했고, 동시에 두려워 하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정확히는 소유에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상실을 말이에요. 나는 그 사실에 조금 놀랐지만 내색하지는 않았습니다. 타인의 내밀한 속내를 타인의 의지와 없이 들여다보게 된 자는 그것에 대해 함구하는 게 마땅한 도리였으니까요.

 

  그는 왕제에게 시나스타를 올린 뒤에도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었습니다. 그의 주변에는 침묵만이 가득했어요. 불타고 무너지는 도시에서 그는 외따로 존재하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한 순간, 그가 고개를 들었습니다.

 

 

  마법사. 잊지 말도록.

 

 

  무심하고 덧없는 눈동자가 멸망하는 도시의 최후를 빼곡히 눈에 담은 뒤 마지막으로 나를 스쳐 지나갔습니다. 나는 시간의 축을 향해 걸음을 옮기는 그의 뒷모습에 대고 말없이 머리를 숙이는 것으로 그 명을 받았어요. 그것은 지키지 못할 약속이었습니다. 그와 나 모두가 그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설령 지키지 못할 약속일지라도 맹세해야만 하는 것들이 있는 법입니다. 그와 나에게는 ‘잊는다’는 말이 허락되지 않았어요. 잊을 권리가 허락되는 것은 오직 무고한 사람들뿐이라는 걸 그도 나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나는 멀리서 그를 지켜보았어요. 그것이 나의 역할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윽고 처음으로 자진하여 높은 곳에 오른 그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시간의 축에 손을 대었습니다. 그러자 그의 손이 닿은 부분부터 따스한 빛이 새어나오더니 몇 겹의 고리에 둘러싸인 모래시계가 느리게 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금색의 모래들이 위에서 아래로 차르르 떨어져 내리는 그 황홀하고도 기이한 광경으로부터 나는 눈을 돌리지 않았습니다. 아니, 비단 그 순간뿐만이 아니라 처음부터 줄곧 그랬어요. 백금과 토파즈를 가루내어 뿌린 듯한 햇살 속에 미동도 없이 서 있던 그를 본 그 날부터 줄곧, 나는 모든 것으로부터 시선을 돌리지 않았습니다. 그 또한 마찬가지였지요. 그것은 천지 가득 무고한 꽃을 피워낸 자들의 의무였습니다.

 

  ……금색의 모래들이 모두 바닥으로 떨어져 내리고, 그의 손에서 흘러나오는 찬란한 빛이 세상을 뒤엎으면 이 모든 것은 없었던 일이 되겠지요. 완전한 마지막은 다시 온전한 처음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죽은 것들은 소생하고 메마른 가지에는 다시 싹이 움트겠지요. 그럼에도 이것은 명백한 침략의 기록입니다. 동시에 무엇으로도 변호 받지 못할 한 사람의 인생입니다.

 

  누구에게도 기억되지 않을.

 

 

2019. 05. 27.

 

2020.09.13

memo2020. 9. 13. 01:52

 

요즘 하는 것: 로오히 / 사퍼

이주 전의 나: 로오히 그렇게 열심히 안 할 거 같은데....(아주 웃기고 있죠)

요즘의 낙: 신비상인 물건 바뀌는 거 확인하기

 

재활 낙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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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발론 연맹은 특임대의 처우를 신중하게 결정했다. 온 대륙에 악명을 떨친 제국의 일원 중에서도 특임대는 특별했다. 그들이 전선의 최전선에 서서 사랑하는 이들의 삶을 유린하고 약탈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통솔하는 이가 다름 아닌 제국의 여덟 검이라 불리는 조슈아 레비턴스였던 까닭이다. 개개인의 감정은 정치적 올바름에 선행하였고 조슈아 레비턴스의 처우를 결정하는 순간에 이르러서는 언쟁에 가까운 토론이 오갔다.

 

  임시적으로 신병을 확보하고 있는 로드의 중재도 이때만큼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당연했다. 온 대륙에 해방의 물결을 가져 온 아발론 연맹의 주축이 되어 모두가 악이라 규정한 것을 단죄했다 한들, 아발론의 기원에는 상실이 존재하지 않았다. 아발론의 군주는 다른 누구보다도 그 사실을 잘 알았다. 때문에 그는 자신의 뜻이 이 자리에 모인 이들에게 영향을 미치기를 감히 기대하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자신의 발언이 이 자리에 모인 이들 중 어느 누구에게도 상처가 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전후처리를 논하는 회의는 휴의와 개의를 거듭하였다. 종내 연맹원들의 의사가 향한 곳은 알드 룬의 제4왕녀였다. 제국의 손아귀에 사랑하는 이들을 잃지 않은 자가 없다지만, 하루아침에 일가족이 몰살당한 참극은 그들에게도 제법 비극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세상이 정의라 규정한 이들이 망국의 왕녀를 주시했다. 연맹의 한 축을 담당하는 일원이자, 테레즈 해방군을 이끌며 갈루스 서부 각지에서 민중들에게 희망과 승리를 안겨주었던 이는 고요하게 가라앉은 시선을 들어 대답했다. 

 

 

  제국의 압제와 부당한 폭력 하에서 사랑하는 이들을 지키기 위해 일어난 이들이 있습니다. 제국의 치하에서 우리의 자유와 터전을 무자비하게 앗아간 이들이 사람으로서 사고하게 되었을 때, 나의 동지들이 비로소 획득하게 되는 가장 큰 복수의 기회를 앗아가서는 안 되겠죠.

 

 

  그런 뒤 그는 숨을 한번 참았다 내쉬며 말을 맺었다.

 

 

  저는, 조슈아 레비턴스에게 사람으로 살 것을 말했습니다. 

 

 

  바네사 테레즈 알드 룬의 음성은 갓 피어나는 봄처럼 온화했으나 그 저변에는 도저한 감정이 얼음처럼 서려 있었다. 연맹원들은 멸망한 나라의 왕녀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기민하게 읽어내었다. 짐승이 사람이 되어 수치와 죄를 알게 되었을 때, 그들은 자신의 죗값을 삭감해줄 이도 자신의 죄를 고해할 이도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리라. 전쟁은 미시적으로 보면 언제나 개인의 비극이었으므로 용서는 어느 때고 당사자의 손끝에서만 허락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제국이 짓밟고 지나간 곳곳마다 추모의 형태를 상실한 추모가 넘치고 있었다. 살갗이 벗겨질 정도로 피 묻은 손을 닦아낸다 한들 그 손에 묻은 피는 영영 지워지지 않을 것임이 자명했다.  

 

  연맹원들은 바네사 테레즈 알드 룬의 의지를 엄숙하게 존중했다. 그날의 회의는 전후 발생한 갈루스의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한시적으로 군정을 실시하되, 각 연맹에서 사람을 인선하여 갈루스의 각지에 임시 행정관을 두자는 결론으로 끝이 났다. 군정이 끝난 뒤의 자립을 위해 지역마다 자치위원회를 조직할 수 있게끔 독려하고, 군정과의 조화를 모색하는 일은 다음 번 회의의 의제가 될 터였다. 

 

  회의가 파한 후에도 알드 룬의 제4왕녀는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모두가 물러났음을 확인하자마자 그는 망설임 없는 기색으로 로드에게 '요구'했다. 아발론에서, 조슈아 레비턴스를 받아주었으면 해요. 로드는 그 말을 할 때의 바네사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를 읽어보려 했지만 도무지 읽어낼 수가 없었다. 바네사 테레즈 알드 룬은 구태여 드러낼 필요가 없는 것들을 감추는 데 능숙한 이였다. 

 

 

  저는 그에게 사람으로 살 것을 요구했어요. 그가 그렇게 되기까지, 아발론이 그 장소가 되어주었으면 합니다.

 

 

  로드는 그의 요구에 고개를 끄덕였다. 기실 바네사 테레즈 알드 룬에게 아무런 이유가 없다 해도 수락했을 것이었다. 바네사의 요구는 그의 존재만으로도 당위를 지녔다.

 

  아발론은 조슈아 레비턴스의 신원을 정식으로 인계받았다. 얼마 안 가 조슈아 레비턴스의 머리 위로는 단두대의 칼날이 아니라 군주의 검날이 내리닿았다. 한때 제국에 충성을 맹세했던 이는 어딘가 체념한 듯도 하고 가라앉은 듯도 한 얼굴을 하며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그게 희미한 죄책감의 발로라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그 모습을 보며 로드는 문득 생각했다. 바네사 테레즈 알드 룬은 이 자를 영겁토록 증오하지는 못하리라.

 

  바네사 테레즈 알드 룬이 자신의 몸을 바쳐 막아내려 했던 것들이 조슈아 레비턴스의 역사에서는 이미 종결되어 있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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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리플란] Love Story

2차/적왕사2020. 9. 13. 01:09

 

- 행복이 님과 함께 한 사망 소재 합작입니다. 

- 모든 것 날조 주의

- '뒤돌아 보면 항상 네가 있었으면 좋겠다고'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합작이었는데 당신으로 수정.

 

 

 

 

  뒤돌아 보면 항상 당신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그런 오만에 가까운 바람을 가졌던 적이 있다.

 

 

 

*

 

 

 

  달빛이 온 사방에 고루 내리깔리는 밤이었다. 플란츠는 한 손으로 책장을 넘기며 다른 손으로는 규칙적으로 탁자를 두드렸다. 자신도 모르는 새에 누군가로부터 옮은 버릇은 자꾸만 부정적인 쪽으로 번져가려는 생각을 덜어내는 데는 별 도움이 되지 않았지만 초조한 마음을 가라앉히는 데는 그럭저럭 도움이 되고 있었다. 손끝이 탁자를 한번 두드릴 때마다 시린 물 같은 달빛이 탁자의 끄트머리로 흘러내렸다.

 

  아까부터 종이 위의 활자를 건성으로 읽어 내리며 탁자 위에 곱게 놓아둔 수정판을 힐끗힐끗 보았지만 수정판이 반짝일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투명한 판 위에 드리워진 완벽한 적요에 짧지만 무거운 한숨이 책장 위로 떨어져 내렸다. 붙들고 있는 책장의 마지막 문단에 시선이 가닿음과 동시에 다음 장을 넘기려던 손길이 그대로 멎었다. 마음이 소란했던 탓에 도무지 내용이 눈에 들어오지 않아 관성적으로 읽어 내려가고 있었다고는 하나, 이제는 단순한 획의 조합인 활자조차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종이에 쓰인 카이리스의 언어가 겪어보지도 못한 고대 세크리티아의 언어처럼 난해하고 해괴하게만 느껴졌다. 결국 플란츠는 가름끈으로 표시조차 하지 않고 보고 있던 책을 그대로 덮으며 수정판을 주시했다. 여전히 수정판 위로는 물그림자 엇비슷한 것조차 어른거리지 않고 있었다.

 

  자신의 생일 날 칼리안에게 선물 받은 것을 다시 칼리안에게 선물해 주었더니, 칼리안은 일주일 남짓한 여정에 오르면서 수정판을 넘기고 갔다. 가깝지만 먼 타국이 그리울 때 한 번씩 들여다보라고 돌려준 물건을 왜 다시 제게 주냐고 눈으로만 물었더니 칼리안은 화사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제가 선물해 드리고 형님께서 돌려주신 거랑은 다른 겁니다. 제가 없는 동안 적잖이 외로워하실 것 같아서요. 마침 얼마 전에 새로이 수정판을 얻을 기회가 있어서 다행이지요. 이처럼 제가 멀리 가더라도 형님께서 제 얼굴을 보실 수 있으니.

 

 

  과연 짖기 좋은 기회만 있다 싶으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잘도 짖으시는 아우님이었다. 플란츠는 고운 미간을 사정없이 찡그리며 썩 꺼지라는 뜻을 표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저 없는 동안 울지 마시고요. 마지막까지 온 힘을 다해 짖은 칼리안은 그 말을 남기고 레이븐의 등에 올라타 훌쩍 왕성을 나섰다.

 

  그렇게 말했으면 연락을 하던가.

 

  엄밀히 말하자면 연락이 아주 없었던 건 아니다. 칼리안은 처음 며칠간은 착실하게도 수정판에 얼굴을 내비쳤다. 한가로이 루시와 안네의 털을 쓰다듬으며 시간을 보내던 중에 불쑥 수정판에 나타난 얼굴에 기겁하니 들려오는 말이라는 게 가관이었다. 왜 그렇게 놀라세요. 제가 말씀드렸잖습니까. 제 얼굴을 못 보시면 적잖이 외로워 하실 것 같아서 드렸다니까요. 그거. 그걸 시작으로 칼리안은 아침이고 점심이고 저녁이고 가리지 않고 멍멍 짖는 데 여념이 없었다. 듣다 못한 플란츠가 그만 좀 짖으라고 한마디를 해보았지만 칼리안은 짖는 걸 멈추지 않았다.

 

 

  말씀은 그렇게 하시나, 걱정하시리라는 걸 압니다.

 

 

  칼리안의 입에서 나온 문장에는 일종의 확신이 깃들어 있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플란츠는 그토록 내보이고 싶지 않던 치부를 들킨 기분에 아무런 답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러자 칼리안은 모양 좋은 입매를 유려하게 휘며 말했다.

 

 

  제 얼굴이 보고 싶으셔도, 형님께서는 말씀하시지 않을 분임을 알기도 하고요. 구실을 만들어 드리는 겁니다, 저. 그러니 그냥 모르는 척 이용하세요.

 

 

  그런데 그토록 열심히도 짖어대던 놈이 사흘 전부터는 갑자기 연락이 되지 않았다. 이제 조금 있으면 지그프리드령을 지나 시스파니안의 둥지에 도착한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칼리안으로부터의 연락은 전무했다. 처음에는 둥지에 도착해서 그런 모양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만 하루가 다 가도록 기별이 없자 불안함이 그 부피를 키워갔다. 심장을 내걸고 맺은 인이 아직 건재하다는 걸 알면서도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닌가 싶었다. 명석한 두뇌는 칼리안에게 일어났음직한 일들을 끊임없이 상상하고 재구성하며 불길한 상상을 그물망처럼 넓혀 나갔다. 루시나 안네의 털을 쓰다듬거나 그들과 놀면서 의식적으로 생각을 흩뜨리려 해도, 다른 생각이 일절 들지 않게끔 고의적으로 제 몸을 혹사하며 불길한 상상을 무위로 돌리려 해도 별 소용이 없었다.

 

  그러기를 벌써 나흘이었다. 속은 타들어가는 촛불의 심지처럼 다 타다 못해 재가 된 지 오래였지만 칼리안이 닷새가 되도록 자신에게서 기별이 없으면 그때 움직여 달라고 말했으므로 섣불리 움직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대체 어디서 뭘…….”

 

 

  부지불식간에 그런 말이 새어나온 순간이었다. 아마도 테라스 쪽에서 불어온 것만 같은 가느다란 바람이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플란츠는 그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테라스로 향했다. 고작 열 걸음 남짓한 거리를 가로질러 테라스로 가기까지 가슴이 미친 듯이 뛰었다. 심장이 꼭 귀에서 박동하는 듯했다.

 

  플란츠는 무섭도록 뛰는 가슴을 진정시킬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테라스를 내다보았다. 그 즉시 안도와 허탈함을 반반 섞은 숨이 새어나왔다. 플란츠의 예상대로, 그리고 실로 다행이게도 난간에 새카만 머리통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플란츠는 한쪽 눈썹을 찡그리며 팔짱을 꼈다. 요 며칠 간 그의 속을 새까맣게 태워 낸 아우님의 멋들어진 귀환이었다.

 

 

  “뭐야.”

  “화나셨어요.”

  “아니.”

  “제가 그래도 이렇게 왔잖아요.”

 

  역시 거짓말은 못 하지만 남 거짓말 하는 거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눈치 채는 아우님이었다. 화가 나지 않았다면 솔직히 거짓말일 테다. 화를 낼 만한 계제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무언가 사정이 있으리라고 짐작했으면서도 울컥한 순간이 없다고 한다면 거짓말이었다. 사람이 화를 내서는 안 되는 상황에서 불합리하게 화를 낸다는 건 그 밑에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한 공포가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플란츠는 칼리안이 없는 동안 불쑥불쑥 고개를 치켜 들었던 공포를 침 하나 삼키는 것으로 내리 누르며 고개를 까딱했다. 난간에 매달려 대롱거리는 놈이 위태로워 보인 탓이다. 칼리안은 그제야 얼굴을 활짝 펴며 난간 너머로 가볍게 몸을 날렸다. 그렇게 위태로운 자세로 난간을 붙들고 서서는 허락을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플란츠는 말없이 테라스 옆의 벽에 기대 섰다. 폴짝하는 소리가 날 만큼 가볍게 난간을 뛰어 넘어 4층으로 올라 온 칼리안이 새실새실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저 안 보고 싶으셨어요?”

 

 

  물을 머금은 루비처럼 영롱한 두 눈이 도르륵 굴러 플란츠를 향했다. 플란츠는 자신을 빤히 보는 그 두 눈을 힐끗 쳐다 보았다가, 작게 숨을 내쉬었다. 보고 싶지 않았느냐고.

 

 

  “차라리 그랬다면.”

 

 

  좋았겠지. 속삭이는 듯한 음성이 조도를 한껏 낮춘 실내 사이로 안개처럼 흩어졌다. 보고 싶지 않았다면 좋았을 것이다. 빌헬름 관에서 업무를 볼 때마다 마주쳐야 하는 미친 따까리로부터 건강에 이상이라도 생기신 거 아니냐는 헛소리를 들을 일도 없을 테고, 르메인으로부터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걱정 된다는 말을 들을 일도 없었을 테니까. 어디 그뿐일까. 핏물처럼 꾸덕하게 말라 붙는 불길한 예감에 속을 한가득 태워 낼 일도 없었을 테다. 한숨처럼 흩어진 말에 칼리안은 머쓱한 얼굴로 웃으며 플란츠의 곁에 섰다.

 

 

  “약속 드린 것보다 일찍 돌아오려고 했는데, 일이 생겨서요.”

  “일?”

 

 

  칼리안이 시스파니안의 둥지를 찾아간 것은 최근 각지에 나타나기 시작한 파편 때문이었다. 몇 년 전, 세크리티아의 바다에서 파편이 발견되었을 때 아르나이젤은 그걸 시스파니안에게 전해주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칼리안은 아르나이젤의 부탁을 따라 카이리스에 돌아오자마자 시스파니안의 둥지부터 찾았다. 무척 슬픈 눈을 하더군요. 지고의 고룡이. 칼리안은 씁쓸한 얼굴로 그리 말했다. 그는 지극히 사려 깊은 존재였으므로 자신이 만들었던 것이 후대에도 막대한 영향을 끼치는 것을 지켜 볼 수 없었던 것이리라.

 

 

  고작 한 사람의 몸으로 짊어지기에는 그 무게가 너무 무겁구나.

 

 

  파편을 건네 받으며 시스파니안은 그리 말했고 칼리안은 그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자신 외에는 달리 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앞으로도 무언가 일이 생기면 지금처럼 찾아오겠다는 말을 할 수 있었을 따름이었다.

 

  그 일이 있고 대륙은 한동안은 잠잠했다. 그런데 갑자기 카이리스나 세크리티아에서 파편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우연이라기보다는 무언가의 징조라고 보는 편이 옳았다. 그래서 칼리안은 지체없이 둥지를 찾았다. 혹여 뭔가 조언을 얻을 수 있을까 해서. 그런데.

 

 

  “만나지 못했거든요. 시스파니안을.”

 

 

  정작 그렇게 찾아간 둥지에서 칼리안은 시스파니안을 만나지 못했다. 시스파니안의 검은색 머리카락 하나 손에 쥘 수 없었다. 지극히 위대한 그가 칼리안이 둥지로 왔다는 것을, 둥지로 오리라는 것을 몰랐을 리가 없다. 그런데도 시스파니안은 모습을 내비치지 않았다. 심지어 그의 의지조차도. 시간의 흐름이 무의미하게 여겨지는 공간에서 기다리다 보면 나비라도 찾아올까 싶었으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나타나지 않는 시스파니안을 하염없이 기다리던 칼리안은 별 수 없이 발길을 돌려야만 했다. 헌데 이상한 일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그것뿐만이 아니에요. 일순간이지만 제 몸을 구성하고 있던 서클이 희미해지는 걸 느꼈습니다.”

  “희미해지다니.”

  “아주 한 순간이었지만, 심장에 겹겹이 쌓인 고리가 다시 오러로 화하는 듯한 기분을……. 받았다고 하면 믿으시겠습니까.”

 

  그래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수정판에 마력을 불어 넣어보려 했는데 역시나 되지 않았다고 했다. 다행히 둥지에서 나왔을 때는 다시 마력이 돌아온 듯했지만, 수정판은 제 기능을 상실한 것 같았어요. 그러며 칼리안은 검게 탄 수정판을 플란츠의 앞에 내밀었다.

 

 

  “연락을 드리지 못한 건, 이 때문입니다. 죄송해요.”

  “……둥지에서 바로 돌아왔다고 했는데.”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둥지에서 바로 돌아온 것치고는 시간이 너무 걸리지 않았던가. 지그프리드령에 이동마법진을 설치해 두었으니 둥지에서 바로 돌아왔다는 말이 사실이라면 일찍이 도착하고도 남을 거리였다. 플란츠가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 알아 챈 칼리안이 내놓았던 수정판을 주머니에 집어 넣으며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작동하지 않았습니다.”

  “뭐?”

 

  믿을 수 없는 얘기였지만 믿는 수밖에 별 도리가 없었다. 플란츠는 침음하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 시스파니안이 사라졌다. 심장에 겹겹이 쌓인 고리가 다시 오러로 화하는 듯한 기분을 받았다. 이동마법진이 작동하지 않았다. 일련의 일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가늠해보려 했지만 무언가 사고를 꽉 틀어막고 있는 듯했다. 플란츠는 감았던 눈을 떴다. 그의 마음을 다 안다는 듯 칼리안이 흐트러진 카디건을 매만지며 조근조근 말했다.

 

 

  “너무 심려치 마세요.”

  “…….”

  “무슨 일이 일어나건, 제가 어련히 알아서 형님을 살려드리려고요.”

 

 

  칼리안은 농을 치듯 가벼운 투로 말했다. 그건 칼리안 나름의 불안을 덜어내주려는 배려였고 다정함이었다. 오지 않는 칼리안만 하염없이 생각하느라 옷 매무시를 정돈할 정신조차 없었다는 사실을 여실히 드러내듯, 여기저기 루시와 안네의 털이 달라붙은 채 잔뜩 흐트러진 카디건을 정돈해주던 칼리안의 손길이 목덜미에 닿았다.

 

  그러고 보면 얼굴이 지나치게 가까웠다. 플란츠는 순간적으로 얼마 전의 일을 떠올렸다. 칼리안이 난데없이 소원 하나만 들어주면 안 되겠냐고 한 적이 있었다. 플란츠는 인상을 찡그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사냥 내기에서 이겨서 들어달라고 했던 소원은 분명 하나였을 텐데. 그 소원이라면 이미 말하지 않았나. 이런 뜻이었다. 실로 사려깊은 아우님이 말한 소원은 나의 형님 당신께서 르메인이 보낸 편지를 열어 보았으면 한다는 것이었고 플란츠는 그 말을 따랐다. 그러니 네가 말했던 소원은 그때 그걸로 끝 아니냐고, 그렇게 생각하는 머릿속을 읽은 모양인지 칼리안이 눈꼬리를 둥그스름하게 만들며 입을 열었다.

 

 

  무거운 소원 말고 가벼운 소원이요. 무거운 소원 하나 들어 주셨으니 가벼운 소원 정도는 형님 된 도리로 들어주실 수도 있는 거 아닙니까.

 

 

  다분히 억지스러운 얘기였고 개소리였지만 플란츠는 짖지 말라고 일갈하는 대신 파릇파릇한 식물의 잎사귀 같은 눈을 나른하게 뜨며 턱짓했다. 어디 한 번 말해보라는 뜻이었다. 칼리안의 말대로 무거운 소원 하나 들어줬으니 가벼운 소원쯤이야 형님 된 도리로 들어주지 못할 것도 없었다. 비록 아직도 칼리안은 플란츠의 소원을 들어주기 전이었지만(플란츠가 아우님도 아우님 답게 살라는 말을 했을 때 그건 형님 저하 당신을 위한 소원이 아니라며 기각한 바 있다), 그래도 자신이 형이었으니까. 그까짓 소원 하나쯤이야 조금 밑지고 손해보는 기분을 감수하고서라도 형님 된 도리로 너그럽게 들어주지 못할 것도 없었다. 그래서 허락했다.

 

 

  제게 한 번만 입술을 빌려주실 생각 없으십니까?

 

 

  그랬더니 칼리안은 그런 말을 하며 또 짖었다. 지나치게 가까운 거리에 급작스레 그날의 일이 떠오른 나머지 플란츠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 행동에 아, 하고 뭔가 알겠다는 것처럼 말을 뱉은 칼리안이 뒤로 몸을 물리며 플란츠에게서 떨어졌다.

 

 

  “제가 실례했습니다.”

  “됐어.”

  “일단 오늘은 밤이 늦었으니, 이만 주무세요.”

 

 

  플란츠는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첼과 함께 리베른으로 떠났던 앨런이 내일 중으로 돌아오겠다 했으니 일단 그가 돌아온 뒤에 무엇이든 얘기를 나눠보는 게 좋았다. 앨런은 워프를 쓸 수 있으니 카이리스까지 눈 깜박할 사이에 도착할 것이다. 칼리안도 같은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플란츠는 불길한 마음이 덤불처럼 스멀스멀 자라나려는 걸 억지로 잘라내며 난간 너머로 훌쩍 몸을 넘기는 칼리안을 오래도록 바라보다 등을 돌렸다.

 

 

 

*

 

 

 

  “제게 한 번만 입술을 빌려주실 생각 없으십니까?”

  “뭐?”

  “……제가, 명확하게 하고 싶은 게 있어서요.”

 

  이건 정진정명 개소리였다. 플란츠가 들었던 개소리 중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개소리였다. 플란츠는 그 왈왈 짖는 개소리에서 칼리안이 말하지 않았던 것까지 기민하게 짚어냈다.

 

 

  제가 형님을 좋아하는 거 같긴 한데 아직 마음에 확신이 없습니다. 그런데 입을 맞춰 보면 알 것도 같아서요. 그러니까 제가 한 번만 입을 맞춰 봐도 되겠습니까?

 

 

  고백이라기엔 무례했고 소원이라기엔 터무니없었다. 플란츠는 눈을 세모꼴로 떴다. 그러고는 작작 짖으라고 했더니 이제는 사람의 언어로 말하는 법도 잊은 모양이라고 한마디 하려 했는데 그럴 수가 없었다. 칼리안이 꼭 남의 손을 타다 내쫓긴 강아지처럼 울망거리는 눈으로 플란츠를 본 탓이다. 한겨울 북풍보다 매서운 음성으로 휘감기려 했던 말은 그 순간 갈 곳을 잃고 목구멍 안쪽으로 고이 침잠했다. 플란츠는 여전히 못마땅한 얼굴이긴 했으되 조금 누그러진 표정으로 칼리안을 보았다가 한참 뒤에 가라앉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 해.”

 

 

  플란츠는 본디 곱게 휘어지는 버들처럼 유순한 성정을 가지고 있었으며 칼리안에 한해서는 한없이 물러지는 경향이 있었다. 그런데 원하는 대답을 얻었으면 짖기나 할 것이지 칼리안은 떠름한 표정으로 자신의 입매만 매만지다가 운을 뗐다.

 

 

  “형님, 제가 저번에도 말씀드린 거 같은데……. 저에게는 싫으면 싫다고 하셔도 됩니다. 싫으면 싫다, 마음에 안 드는 건 마음에 안 든다, 개소리면 개소리다, 이렇게 말씀하셔도 된다고요. 아니면 모르는 사람이 이런 부탁을 해도 지금처럼 아무렇지 않게 들어주실 생각이셨습니까?”

 

 

  플란츠는 소파에 몸을 깊숙이 파묻으며 다리를 꼬았다.

 

 

  “일어나지도 않는 일, 가정하는 취미는 없어서.”

 

  하지만 적어도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칼리안이 아닌 다른 사람이 이런 허무맹랑한 부탁을 했다면 그 즉시 면상에 주먹을 날리거나 검집으로 턱주가리를 날려 버렸으리라. 그러나 거기까지 말해 줄 의무는 플란츠에게 없었다.

 

 

  “형님.”

  “계속 짖을 거면.”

  “……실례하겠습니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칼리안이 몸을 일으켜 제 쪽으로 다가오는 걸 보며 플란츠는 눈을 느리게 감았다. 곧 소파에 한 사람분의 무게가 더 실리는 게 느껴졌다. 얼굴에 닿는 숨결이 무척 가까웠다. 당장 입술에 따듯한 기운이 돌 거라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자 플란츠는 그사이 감았던 눈을 슬며시 떴다. 칼리안이 한쪽 무릎을 소파에 대고 몸을 이쪽으로 기울인 채 눈조차 깜빡이지 않고 있었다. 그 어느날처럼 칼리안의 그림자가 온 몸을 가득 덮은 가운데 새빨간 눈이 플란츠를 빈틈없이 직시했다.

 

 

  형님, 눈을 감으셔야죠.

 

 

  내뱉는 숨이 그대로 엉킬 것처럼 가까운 거리에서 칼리안이 속삭였다. 피부 위로 따듯한 숨이 무게감 없는 천처럼 올라 붙었다. 익숙지 않은 느낌에 플란츠는 자신도 모르게 제 쪽으로 다가붙는 칼리안의 옷깃을 꾹 쥐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다른 사람과 입술을 겹쳐 본 경험 따위가 있을 리 없었다. 칼리안의 입술은 무척 느리게 내리 앉았다. 숨과 숨이 맞닿은 순간 뱉어내지 못한 말이 안쪽에서 헛돌았다.

 

 

  “이제 됐습니다.”

 

 

  입맞춤은 짧았다. 칼리안은 건조한 목소리로 끝을 알렸다. 플란츠는 기나긴 꿈에 잠겨 있던 사람이 그제야 깨어난 것처럼 흠칫 놀라며 저도 모르게 붙들고 있던 옷깃을 놓았다.

 

 

  “……그래서, 어떠셨는지.”

 

 

  물으며 상기했다. 필경 서느랗게 내리 앉아야 할 입술이 어째서인지 너무나도 따듯했다고. 그 사실에 누군가 날붙이로 흰 캔버스를 수직으로 찢어내듯 마음이 찢기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알았다. 자신이 이러한 때를 꿈에 그리듯이 바라고 있었다는걸. 칼리안은 거짓말을 못 하지만 거짓말 하는 것 하나만은 기가 막히게 알아차리는 아우님이었다. 언젠가부터 칼리안을 바라볼 때면 연둣빛 눈 위를 스치고 지나가는 열망을 그가 읽어내지 못했을까. 그럴 리는 없다고 플란츠는 생각했다. 칼리안이 웃고 있을 때 실은 그가 슬픔에 잠식당하고 있다는 걸 플란츠가 알아차리는 것만큼이나, 칼리안은 플란츠의 감정을 알아차리는 데 능했으니까.

 

  그러니 이것은, 자신의 마음조차 꺼내놓기를 저어하며 제 마음을 외면하고 스스로를 속이려는 미련한 형님에게 아우님이 기회를 준 것과 다를 게 없다. 그는 언제나 플란츠에게 그럴싸한 계기와 구실을 만들어 주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플란츠는 한 번의 추억으로도 평생을 살 수 있는 사람이었다.

 

  일평생 많은 것을 바란 적이 없는 사람은 이번에도 자신의 감정을 배반하고 익숙하게 등을 돌린다. 학습화 된 체념이 빚어낸 결말이 아니라 욕망한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플란츠는 칼리안에게 자신이라는 짐을 얹어주고 싶지 않았다. 칼리안이 아무렇지 않게 손을 내민다고 해도, 그 손을 맞잡아 주길 원하고 있다고 해도. 플란츠는 영원 따위를 믿지 않았고 내일을 장담할 수 없는 자들 간의 연애는 시작도 전에 끝이 완성된 이야기나 마찬가지였다. 달콤하고 꿈 같은 결말은 찾아올 가능성이 우스울 정도로 희박하다는 점에서 이러한 연애는 희극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인생은 언제나 희극과는 거리가 멀지 않았던가.

 

  불확실한 미래 속에서 홀로 남겨지는 자신은 괜찮다. 하지만 언젠가의 앞날에 그가 홀로 남겨지게 되었을 때, 한때 연인이었던 자신을 추억하며 살길 원하지 않았다. 너는 다정한 사람이었으니까.

 

  무언가 오가긴 했으되 누구도 이름을 붙일 수 없는 입맞춤이었다. 플란츠는 입고 있던 카디건의 소맷자락으로 입가를 슥슥 닦았다. 어느 샌가 몸을 바로 하고 처음처럼 맞은편에 가서 앉은 칼리안이 눈꼬리를 애매하게 늘어뜨리며 어설프게 웃었다.

 

 

  “아무 느낌 없어서, 된 거 같습니다.”

 

 

  해가 지기에는 아직 이른 시간이었는데도 칼리안의 얼굴에 노을빛이 가득했다. 아우님은 정말 거짓말을 못하시는군. 목구멍 위로 올라온 문장은 끝끝내 입 밖으로 튀어 나가지는 못하고 다만 혀뿌리만 무겁게 짓눌렀다. 플란츠는 점점 묵직하게 가라앉는 혓바닥을 숨기며 애꿎은 입술만 물었다 놓았다.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정오의 햇살 아래에서 빛무리 같은 먼지들이 부유했다. 플란츠는 풍성하게 자란 칼리안의 속눈썹이 팔락이면서 흰 뺨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는 것을 보았다. 이 순간에 영원히 붙들려 있어도 좋겠다 싶을 만큼 아름답고 평화로운 광경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플란츠의 바람을 배반하듯, 검게 칠한 캔버스 위에 흰색 물감으로 덧그린 것처럼 선명했던 장면은 삽시간에 그 위에 물을 쏟아 부은 듯이 흐릿해지더니 이내 파도에 휩쓸리는 것처럼 번지며 흩어졌다. 플란츠는 이제 사방이 검게 물든 가운데 혼자서만 형체를 유지하고 서 있었다.

 

  그 언젠가 보았던 은빛의 장막조차 드리워지지 않은 온전한 어둠. 그 언젠가 보았던 참상과는 달리 빛조차 들어오지 않는 풍경은 책에서나 봤던 깊은 해구 같았다. 물 밑에 가라앉아 본 적은 한 번도 없으니 낯설어야 하는데 마냥 낯설지만은 않았다. 칼리안이 태양보다도 찬란하게 빛을 발하는 헤이시아 궁을 무너뜨리기 전까지 자신은 이와 같은 곳에서 두 무릎을 끌어안고 주저앉아 있지 않았던가. 명멸하는 빛처럼 깜박이던 연둣빛 눈동자에 어둠이 스민 순간이었다.

 

 

  “형님.”

 

 

  플란츠는 눈을 떴다. 칼리안이 앞에 있었다.

 

  마지막으로 보았던 것과 별반 다를 것 없는 행색이었으나 칼리안에게서는 감추지 못하는 피냄새와 희미한 흙냄새 따위가 났다. 그 어디에도 흙이나 피 같은 건 묻어 있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몸을 일으키자 비도 오지 않았는데 누군가 머리 한 구석을 쑤석이는 것만 같은 두통이 불시에 온 몸을 엄습했다. 플란츠는 관자놀이를 손으로 짚으며 칼리안이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오늘은 며칠이며 자신이 얼마나 잠들어 있었냐고 묻는 것보다 칼리안의 입이 열리는 게 빨랐다.

 

 

  “꼬박 일주일을, 미동조차 하지 않고 주무시더군요.”

  “내가, 그랬다고.”

  “네.”

 

  많이 피로하셨던 거겠지요. 그렇게 말하는 칼리안의 목소리에는 피로함이 묵은 먼지처럼 묵직하게 묻어났다. 너는 내가 잠든 사이에 어디서 뭘 했냐고 플란츠는 묻지 않았다. 굳이 묻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만나고 온 모양인데. 어머니 나무.”

 

 

  칼리안의 붉은 눈동자가 일순 크게 뜨였다. 그토록 열심히 클린으로 몸에 묻은 흔적을 지워댔는데 어떻게 알아 본 것이냐고 묻는 듯이. 정말이지 거짓말에는 서툰 아우님이었다. 플란츠는 화급히 제 몸을 돌아보는 칼리안에게 여상히 말했다.

 

 

  “깨끗하니까 걱정하지 말고.”

  “……그럼.”

  “익숙한 냄새가 나서.”

 

 

  피 냄새 말고. 사실 희미한 피 냄새 같은 것도 났지만 굳이 그건 아니라고 덧붙였다. 안 그러면 연약하고 어린 형님을 끔찍하게 생각하는 아우님께서 또 자신을 책할지도 몰랐으니까. 그 지긋지긋한 흙 냄새가 나잖아. 그렇게 덧붙이자 칼리안의 얼굴에 씁쓸함과 안도가 반씩 섞인 이상한 웃음이 떠올랐다.

 

 

  “그랬군요.”

  “그래서.”

  “시스파니안은 다가올 날을 대비하기 위해 잠들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축복이 흐려졌다고.”

 

 

  그런 말을 들었습니다. 칼리안은 무언가를 두려워하듯이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칼리안의 입에서 나온 말이 유리잔에 맺힌 물방울처럼 귓가에 맺혔다가 주륵 흘러내렸다. 플란츠가 어느 정도는 생각하던 일이기도 했고, 그럼에도 내심 사실이 아니길 바랐던 일이기도 했다. 시스파니안의 축복이 모든 걸 치유해주지는 않는다지만 그래도 그간 어느 정도 자잘한 몸의 이상 같은 건 적당한 선에서 치유해주곤 했다. 축복이 건재하다면 플란츠가 난데없이 과로로 쓰러지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런데 쓰러졌다. 그리고 칼리안은 시스파니안의 둥지에서 그를 만나지 못했다고 했다. 작동하지 않는 수정판과 이동 마법진. 그 모든 것은 시공간을 뛰어 넘는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다가올 날이라는 건, 종말을 말하는 건가.”

  “……하지만 제가 기억하는 것보다 너무 가깝습니다.”

 

 

  플란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전에 플란츠와 칼리안이 세크리티아에 갔을 때 체이스는 그 참극이 지금으로부터 약 10년 뒤에 일어났다고 말했다. 세크리티아 행으로부터 이제 고작 몇 년이 지났을 뿐이다. 칼리안의 말대로 모든 것이 지나치게 가까웠다. 급작스레 각지에서 나타나기 시작한 파편은 다가올 종말을 대비하라며 위대한 세렌티가 안배해둔 것이었나. 그렇다면 시스파니안이 눈을 감은 것은 다가올 종말을 대비하기 위한 세렌티의 의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실로 이해할 수 없었지만, 본디 한낱 인간은 위대한 신의 손짓조차 이해하기 어려운 법이 아니던가.

 

 

  “……칼리안.”

 

 

  플란츠는 눈을 한 번 감았다 떴다. 푸르른 신록을 머금은 눈이 눈두덩이 아래로 사라졌다가 다시 드러났다. 봄의 새순처럼 무르고 부드러운 시선이 아니라, 햇빛을 받아 은빛으로 반짝이는 여름철 잎사귀처럼 형형하고 예리한 시선이 칼리안을 향했다.

 

 

  “그 자리, 올라도 되지 않나. 이젠.”

 

 

  나른한 한숨 같은 음성이 침묵을 불러왔다. 칼리안이 카밀론에 입성한 순간부터 르메인이 차기 국왕의 재목으로 칼리안을 선정했다는 건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칼리안은 차일피일 왕위에 오르는 것을 미뤄왔다. 아직은 제가 감당치 못할 자리인 거 같습니다. 카밀론에서 조금 더 국왕 전하의 업무를 거들게 해주시지요. 하지만 남의 공치사를 기리는 데 인색한 귀족들조차 칼리안이 붉은 융단이 길게 깔린 길을 따라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를 만한 재목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었다.

 

  플란츠는 칼리안이 그 자리에 앉는 것을 망설이고 또 주저하는 이유를 알았다. 시스파니안의 축복이 국왕과 그의 직계혈족을 따라 내려오는 신성한 힘인 탓에. 자신이 왕좌에 오르게 되면 자신의 형제인 플란츠에게서는 자연히 그 축복이 사라지리라는 걸 지나온 발자국을 되짚어 보듯 확신하고 있기 때문에. 고작 자신 때문에 붙들린 위대한 걸음이었으나 시스파니안이 잠든 지금은 더는 멈춰 서 있을 이유가 없었다. 다가올 종말을 대비해야 하는 입장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플란츠를 보는 붉은빛 눈동자에 전례 없는 침통함이 그림자처럼 깊게 스며들었다.

 

 

  “……알고 계셨습니까.”

 

 

  목소리가 빛 한 점 들지 않는 심해로 가라앉는 것들처럼 무겁게 침잠했다. 플란츠는 온갖 감정이 갈앉은 칼리안의 얼굴을 내다보다가 그리 놀라울 것도 없다는 투로 말했다. 아우님이 그토록 서툴게 변명하시는데, 모르는 게 이상한 거 아니겠나. 어느 한 중간에 붙들린 걸음에 담긴 마음을 안다. 입술을 겹쳤던 그 날 알게 되었던 그 마음이 지금도 유효하다는 것을 안다. 그 비이성적인 결정의 근간에 플란츠 룬 카이리스의 이름이 있다는 걸 안다.

 

  그래서 플란츠는 말했다.

 

 

  “더는 억지 써 가며 미루실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세자 저하.”

 

 

 

*

 

 

 

  칼리안 레인 카이리스의 이름에 위대함을 뜻하는 루가 붙은 건 그 해 겨울의 일이었다. 칼리안은 날 때부터 위정자의 위치에 올라 선 사람처럼 거침없이 국정을 이끌어 나갔다. 시대의 변화를 읽지 못하고 날뛰는 세력들이 없었던 건 아니나 칼리안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근자근 그들의 세를 죽여 놓았다. 그 과정에서 카이리스의 제3왕자였을 시절부터 자신을 따르는 세력들을 착실히 불려온 게 적잖은 도움이 되었다.

 

  동시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다가올 종말을 위한 대비를 착실히 진행해나갔다. 종말이 다가오면 비단 카이리스뿐만 아니라 시스테라 대륙 전체가 위험에 빠지리라는 건 자명한 사실이었다. 칼리안은 원래부터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던 세크리티아뿐만 아니라 역성혁명을 통해 새로 왕위에 오른 세르제인이 있는 텐실은 물론이고, 엘린느의 치세 아래 있는 리베른과도 외교적 합의를 통해 공존관계를 도모했다. 시스테라 대륙의 네 나라는 각자가 시간의 축에 관한 연구를 지속하면서 제온의 동향을 예의주시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나라와 대륙을 위해 부단히도 애를 쓰는 새로운 왕의 노고를 치하하듯 봄이 오자 풍요로운 햇살이 대지를 가득 내리비쳤다. 영지민들의 고충을 헤아려주십사 하는 울부짖음보다는 젊은 국왕의 선정에 감읍하는 얘기들이 미담처럼 거리를 떠돌았다. 제온은 그림자처럼 침묵했고 종말이 다가올지도 모른다는 점만 제외하면 모든 건 추수를 앞둔 들판처럼 완벽해 보였다. 이처럼 한동안 칼리안의 치세는 무사히 이어지는 듯싶었다.

 

  하지만.

 

 

  “텐실과 인접한 대사막에서부터 검은 기운이 몰려오고 있었다……, 라.”

 

 

  칼리안은 텐실에서 보내 온 전서구에 매달린 편지를 톡톡 쳤다. 시스파니안이 잠든 이후로 시공간을 넘나들며 사람의 생활을 편리하게 해주었던 것들은 모조리 그 빛을 잃었다. 어째서 모든 마법이 아니라 시공간에 관련된 것들만 무의미해졌는지는 알지 못했으나 수정판도, 반지도, 팔찌도 쓸 수 없었다. 각국은 가장 원초적인 방법으로 서로의 의향과 정보를 전할 수밖에 없었고 거기에는 당연하게도 일정한 시간이 소요되었다. 지금쯤 텐실에서 관측했다는 그 검은 기운이 상당부분 대사막을 뒤덮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칼리안은 편지를 곱게 접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오렌지와 딸기를 비롯하여 각종 말린 과일들을 넣어 만든 초콜릿을 한 입 베어 문 앨런이 입을 열었다.

 

 

  “선조의 이야기를 기록한 역사서에서 본 기억이 있습니다.”

 

 

  앨런은 그의 기호에 맞춰 얀이 내어 온 다디단 차를 호록 소리가 나게 마시고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지나치게 빠르게 영그는 곡식과 비정상적인 생장 속도. 일견 신의 축복과도 같은 일이 대륙 전역에서 발생한 직후 사방에서 어둠이 파도처럼 몰려 왔다 했습니다. 그리고 그 어둠이야말로 악신의 징조라 하더군요.”

  “다누가 말했던 종말…….”

 

 

  앨런이 침묵으로 긍정했다. 각지에서 나타났던 파편들, 그것을 칼리안은 전부 회수하고자 했으나 그러지는 못했다. 칼리안이 그 장소에 도달하는 것보다도 더 빠르게 제온의 손길이 미쳤던 때도 있었고 나타났던 파편이 신기루처럼 사라졌던 때도 있었던 탓이다. 제온은 몇 개의 파편을 손에 넣었을까. 시간의 축에서 떨어져 나온 작은 파편 하나만 해도 주위의 시간을 멈추는 어마어마한 힘이 깃들어 있었다. 전부 회수하지는 못했을지언정, 회수한 파편에 깃든 그 막대한 힘을 어떻게든 이용해 불완전하게나마 악신의 봉인을 해제하는 데 성공한 것인가. 의아한 지점은 많았으나 악신의 징조가 스멀스멀 다가오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 하나하나 파헤치며 여유를 부릴 시간은 없었다.

 

 

  “아버지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초월자들은 불분명한 암시를 주는 것을 좋아하더군요.”

 

 

  칼리안은 무릎을 손끝으로 톡톡 치다 넌지시 입을 열었다.

 

 

  “사실, 제가 본 종말과는 그 양상이 다릅니다.”

 

 

  칼리안이 시스파니안의 부재를 확인하고 돌아온 다음 날, 플란츠는 빌헬름 관에서 업무를 보다 말고 의식을 잃었다. 칼리안은 그 얘기를 아르센으로부터 전해 들었다. 지나친 과로가 원인이 아닌가 싶습니다. 말을 맺으며 아르센은 칼리안의 눈치를 살폈다. 아르센의 말을 듣고 한달음에 체르밀로 달려 온 칼리안은 가급적이면 플란츠의 곁을 떠나지 않으려 했다. 언제나 그랬듯이 플란츠가 깨어날 때까지 그 곁을 지키고 앉아 있으려 했다. 혹시나 완두콩이 눈을 떴을 때 아무도 없는 막막한 어둠을 보고 삶아지면 큰일이었으니까. 그런데 그럴 수가 없었다. 해가 지기 전에는 꼭 돌아오겠다고 했던 앨런이 밤이 되도록 돌아오지 않은 탓이었다.

 

  리베른에서 보낸 전서구가 도착한 건 그날 새벽의 일이다. 어찌된 영문인지는 모르겠으나, 8서클로 구현할 수 있는 마법에 제약이 걸린 것 같습니다. 전서구가 매달고 온 소식은 간략했고 동시에 무시무시했다. 칼리안은 내키지 않는 걸음을 옮겨 다누를 만나러 갔다. 천고가 가도 잊히지 않을 상처를 남겼으므로 칼리안에게 가진 감정이 빈말로라도 좋다고는 할 수 없었을 텐데 다누는 칼리안의 방문을 막지 않았다.

 

 

  -존재가 빚어낸, 막지 못할 참상을 보라.

 

 

  그리고 칼리안의 머릿속을 읽어내듯이, 칼리안이 묻지도 않았는데 시스파니안이 부재한 이유에 대해 말해주더니 당연한 수순이라는 양 칼리안에게 보여주었다. 종말을. 사방을 온전히 뒤덮는 암흑을. 그 암흑 속에서 칼리안은 비웃듯이 말했다. 이것이 종말입니까. 고작 이런 것을, 감히 막지 못하리라 확신하는 겁니까. 당신이. 보여주고자 했던 건 그것뿐이었는지 그렇다는 대답을 끝으로 눈이 부신 빛에 휩싸여 추방당했지만, 그때 보여준 광경과 지금의 광경은 확연히 달랐다. 대사막에서부터 어둠이 몰려오는 게 아니었다. 앨런이 말한 대로 사방에서 파도처럼 어둠이 몰아치고, 한순간에 모든 것을 뒤덮었다.

 

  악신의 봉인이 진정 깨어진 게 아닐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제대로 된 종말이 다가오기 전에 제온의 장난으로 종말을 흉내낸 마지막이 다가온 걸지도 모른다는 소리였다. 앨런은 미미하게 웃었다. 긍정이었다.

 

 

  “그렇지만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허면.”

  “각국에 전서구를 보내겠습니다. 한시도 지체할 수 없으니, 이쪽이 먼저 채비를 하여 대사막으로 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전하의 형님께는.”

 

 

  란델이 아니라 플란츠에게는 알리지 않을 것이냐는 뜻이었다. 앨런은 플란츠가 칼리안의 가장 큰 우방이자 정치적 동반자이자 이해자라는 것을 알았다. 거기까지만 알았다. 그 이상은 칼리안도 플란츠도 알리지 않으려 했기에 앨런은 알지 못했다. 그는 사려 깊은 아버지이자 이해자였지만 아들들이 감추려 드는 것까지 애써 알려 들지는 않는 사람이었다. 칼리안은 쉽사리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자신의 앞에 놓인 민트차로 시선을 떨구었다. 사사로운 감정에 휩싸여 갈피를 잡지 못하는 칼리안을 조롱하듯 민트차에 어른어른 플란츠의 얼굴이 떠올랐다.

 

  칼리안은 미련처럼 어른거리는 그 얼굴을 애써 외면하며 마음 속으로 다짐했다. 플란츠에게 알리지 않고 은밀히 움직이기로. 그것이 무척 비합리적이고 말도 안 되는 얘기라는 건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오래 전부터 칼리안은 오직 플란츠에게만 기울어진 천칭이었다. 절대 무엇도 말하지 않으리라. 짧은 시간 안에 결심을 굳힌 칼리안은 앨런에게도 이러한 뜻을 전했다. 앨런은 말없이 차를 마시는 것으로 난색을 표했다. 그게 과연 그리 쉽게 되겠냐는 의미였다.

 

 

  “대공은 전하의 곁을 지키려 할 텐데요.”

 

 

  과연 그 말대로, 앨런과 얘기를 나누고 얼마 지나지 않아 플란츠가 독대를 청했다. 칼리안은 일찍이 얀에게 플란츠가 찾아올 경우 그 걸음을 물리라 언질을 준 적이 있었지만 얀은 플란츠의 걸음을 막지 못했다. 그가 전례없이 완고했고 완강했던 탓이다.

 

 

  “제가 선택한 자리에 제가 서 있겠다는 것을, 아무리 국왕 전하라 하셔도 막으실 수는 없습니다.”

 

 

  나른한 음성이 초침 똑딱이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응접실을 가득 메웠다. 칼리안이 플란츠의 앞에 놓인 차에 잠시 시선을 두었다. 칼리안의 부탁으로 시종장인 얀이 향 없는 차를 내왔을 때 플란츠는 기호가 바뀌었으니 죄송하지만 다른 차를 부탁드려도 되겠느냐고 칼리안에게 물었다. 칼리안은 선선이 허락했다. 그 정도는 부탁 축에도 못 낀다고 할 수 있었을 뿐더러, 그 정도의 부탁이 허용되지 않는 사이도 아니었으니까. 플란츠는 조금의 동요도 없는 얼굴로 말했다. 가향차가 좋겠습니다, 라고.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칼리안은 모르지 않았다. 플란츠가 알게 모르게 조금씩 마신 덕분에 어느 새 투명한 바닥이 훤히 보이는 찻잔에서 시선을 거둔 칼리안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 뜨며 입을 열었다.

 

 

  “그 앞에 뭐가 있는 줄 알고 이리 함부로 걸음을 옮기려 하십니까.”

  “그러는 전하께서는.”

 

 

  칼리안은 짐짓 화가 난 듯해보였으나 플란츠는 예리하게 세공된 루비처럼 날카로운 시선의 기저에서 희미한 두려움을 읽어낼 수 있었다. 자신의 앞에 놓인 찻잔의 테두리를 느슨하게 쓸어내린 플란츠가 이윽고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말을 이었다.

 

 

  “그 앞에 뭐가 있으리라 확신하시기에 제 걸음을 막아서시는 겁니까.”

  “형님, 저는.”

  “칼리안.”

 

 

  플란츠는 칼리안의 말허리를 자르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무언가 말하려던 칼리안의 입술이 다물린다.

 

 

  “네가 기른 사람은, 그렇게 형편없는 존재인지.”

  “형님.”

  “날개 접고 고이 숨만 쉬는 취미는 없다고 했을 텐데.”

 

 

  칼리안이 주먹을 말아 쥐었다.

 

 

  “축복도 없으신 분께서……!”

  “네 곁에 있는 이들과 나의 처지가, 무엇이 다르지.”

  “…….”

  “경솔히 굴지 마시지요. 괜찮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객기나 만용으로 칭해질 수도 있는 발언과 행동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아니, 객기를 부리거나 만용을 부린다는 말이 더 적합한 상황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칼리안이 자신을 살리는 행위를 통해 살아나가고 있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그것을 알고 있었기에 삶아지고 절여지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것을 알고 있었기에 가능하면 그 꿈만은 늦게 꾸도록 노력했다. 꾸게 된다면, 현존하지는 않으나 분명히 살아 있는 죄가 자신을 안에서부터 찢어 발기리라는 걸 알아서.

 

  이 걸음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는 모른다. 칼리안이 막아 설 만큼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만 어렴풋이 짐작할 따름이었다. 그럼에도 플란츠는 결심했다. 그의 곁에 서기로.

 

 

  “……알겠습니다.”

 

 

  먹먹한 얼굴로 플란츠를 바라 보던 칼리안이 한참 뒤에 피로한 얼굴로 백기를 들었다. 기실 플란츠의 말이 맞았다. 시스파니안이 잠든 이후부터 축복 같은 건 하등 상관없는 일이 되지 않았던가. 또한 축복이 없는 것은 자신도 마찬가지였으며 자신과 뜻을 함께 하고자 하는 이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플란츠만 축복이 없다 하여 예외 취급을 받아야 할 이유도, 그럴 권리도 없다.

 

 

  “……대신, 제 앞으로 나서지 마세요. 그리고, 또 혼자 다니시다 제 곁에서 멀어지시지 말고요.”

  “알았어.”

  “……그리고 하나 더요.”

  “또 뭔데.”

 

 

  돌아올 때는, 꼭 지금과 같을 거라고 약속해주세요. 칼리안은 간절한 기원을 돌에 새기듯이 말했다. 그것은 어려울 것 없는 일이었다. 그럴 수만 있다면, 플란츠는 단 한 순간도 자신의 생을 무가치하게 내던지고 싶었던 적이 없었다. 자신의 죽음이 브리센의 악행에 쓰일까봐 베개 밑에 작은 칼을 숨기고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울 때조차 그랬다. 그는 살고 싶었다. 남들이 이기적이라고 욕해도 할 말이 없을 만큼 아주 간절히 살아 나가고 싶었다. 제 앞에 펼쳐진 길이 엉망으로 깨진 유리를 가득 흩뿌린 가시덤불뿐이라 할지라도, 그 길을 맨발로 걸은 끝에 발이 피투성이가 된다 할지라도, 그렇게 피를 흘리며 살아 나가고 싶었다. 죽고 싶었던 적도, 면죄부로서의 죽음을 구하고 싶었던 적도 없었다.

 

  무모하다 여겨질 수 있는 지금의 발언 또한 그랬다. 언제부터인가 플란츠는 칼리안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죽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지만, 이건 그런 생각을 기저에 깔고 하는 말이 아니었다. 자신을 소모품처럼 내던져가며 죽음을 불사하고자 하는 행동이 아니었고, 죽고 싶어 동행하는 걸음이 아니었으므로 그러했다. 플란츠는 지키고 싶었다. 살아 있는 자들이 살아갈 수 있도록.

 

  그리고 살아가고 싶었다. 칼리안과 살아나가고 싶었다. 그뿐이었다. 그래서 플란츠는 반드시 그렇게 되리라는 예언을 말하듯 힘주어 대답했다. 칼리안이 4층에 오면 숨을 쉴 수 있다고 했던 그 말이 무엇인지 이제는 명확히 알았으니까. 사람이 화분을 기르고 키우면서 마음의 안정을 얻듯이 그가 푸르죽죽한 완두콩을 파릇파릇하게 키워내는 행위를 통해 숨을 쉰다는 걸 알았으니까. 존재 자체가 누군가의 호흡이 되기도 한다는 걸, 이제는 분명하게 알고 있으니까.

 

 

  “약속하지. 아우님께.”

 

 

  지키지 못할 약속이었다.

 

 

 

*

 

 

 

  칼리안과 그 일행이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도착한 대사막은 이미 검은 기운에 잠식당한 듯했다. 본래도 생명 하나 움트지 않는 불모의 땅이라지만 그래도 온통 검은빛으로 뒤덮인 광경은 기이하기 짝이 없었다.

 

  쉴 새 없이 꾸물거리며 마수를 뻗쳐 오는 어둠의 한 중간에서 불길한 모래시계가 돌고 있음을 발견한 드미레아가 칼리안을 돌아보았다. 기억에 있는 것과 같냐는 뜻이었다. 저만치 앞에 있는 것을 보다 뚜렷하게 보기 위해 가느스름해졌던 칼리안의 눈이 이내 크게 뜨였다.

 

  그럴 리가 없다.

 

  하지만 드미레아가 손을 들어 가리킨 방향에 있는 모래시계는 분명 자신이 마지막 순간에 보았던 시간의 축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더 믿을 수가 없었다. 파편을 전부 회수하지는 못했을지언정 그래도 일부나마 회수했으니 설사 제온에서 시간의 축을 손에 넣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엉성한 모습을 띠고 있어야 했다.

 

  그런데 어찌하여.

 

  핏빛 돌을 사용하여 생장과 회복을 주관하는 신의 영역에까지 손을 뻗친 제온이었다. 그게 설령 시간의 축이라 불리는 위대한 신물이라 할지라도 그 일부인 파편의 모조품을 만드는 것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칼리안은 여러 겹의 띠로 된 거대한 구 속에서 느리게 회전하는 모래시계를 노려보았다. 갑자기 대륙 곳곳에 나타나기 시작한 파편, 눈을 감고 잠든 시스파니안과 다누가 보여주었던 종말. 미세하게 어긋났던 축들이 지금 비로소 온전하게 맞춰지는 듯했다.

 

  시스파니안은 세렌티의 의지로 잠든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잠든 것이었나. 다누가 보여주었던 종말과 지금의 종말이 다른 양상을 띠는 것은, 대륙을 뒤덮을 종말을 조금이나마 뒤로 늦춰보기 위해 시스파니안이 자신의 온 힘을 쏟아 부은 끝에 잠든 결과였으리라. 일련의 생각이 가지를 뻗어나가던 중 칼리안보다 약간 뒤에 있던 플란츠가 말없이 칼리안을 쳐다보았다. 바라보는 시선에서, 칼리안은 플란츠 역시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고 동일한 결론을 도출해냈음을 알았다.

 

  시간의 축은 본디 악신을 상대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으나 결과적으로는 악신을 봉인하는 데 쓰였다고 했다. 동시에 악신 전쟁 때 시스파니안은 시간의 축을 돌리지 않았다고 했다. 시간의 축은 파편 하나하나에 시간을 멈추는 방대한 힘이 깃든 신물이었다. 곧 축 자체에 시간의 흐름을 끊어내는 힘이 담겨져 있다는 뜻이었다.

 

  축을 갈라내어 그 힘을 억지로 해방시킨다면, 대륙을 향해 들이닥치는 종말을 온전히 막을 수 있지 않을까. 시간의 축을 돌린다는 선택지는 애초에 배제하고 생각을 끝마친 칼리안이 몸을 돌려 자신의 뒤에 도열한 이들을 바라보았다. 이 앞에 무엇이 있는지조차 알지 못하면서, 그 앞으로 나아가는 것만이 자신의 신념을 배반하지 않는 유일한 길이 되므로 칼리안과 동행한 이들이 칼리안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말했던 것처럼, 키리에는 히나가 돌을 제거할 수 있는 틈을 만들어 줘. 무슨 일이 있어도 히나의 곁에서…….”

 

 

  칼리안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검게 물든 사막이 마치 바다처럼 요동쳤다. 검은 모래들이 내내 감추고 있던 사나운 본성을 드러낸 것처럼 정신없이 출렁이며 칼리안과 일행을 향해 맹수 같은 이를 드러냈다. 아무도 없던 사막에 제온으로 보이는 치들이 모습을 드러낸 건 그 순간이었다.

 

 

 

*

 

 

 

  플란츠는 검을 고쳐 쥐었다. 벌써 몇 명을 베어냈는지 이제는 셀 수조차 없었다. 이편을 향해 달려드는 검사들을 무차별적으로 베어내는 도중에 독에 당한 모양인지, 어깨에서부터 옆구리를 타고 베인 상처가 불에 타는 것처럼 뜨거웠다.

 

  아우님이 화 낼 텐데.

 

  희게 드러난 목덜미를 노리고 달려드는 검격을 오른손에 든 검으로 막고, 그 틈을 노려 옆구리를 노리고 달려드는 공격은 몸을 슬쩍 비껴 피하며 그런 생각을 했다. 막은 손에 힘을 주어 검을 밀쳐 올리자 맞닿은 검신에서 불꽃이 튀며 놈이 들고 있던 검이 저 멀리 날아간다.

 

  무기를 잃은 검사는 언제든 사냥할 수 있었다. 플란츠는 자신의 옆구리를 노리고 달려들었다 목표물을 잃고 아차 하는 놈을 향해 왼손에 쥔 시나스타를 휘둘렀다. 바람을 가르는 듯했던 검이 급격하게 꺾이면서 섣부른 공격을 가하려 했던 검사의 몸을 아래에서 위로 갈라낸다. 피가 분수처럼 튀며 플란츠의 몸을 적셨다. 심장에 단단히 박혀 있던 돌은 방금의 일격으로 깨졌을 것이다. 플란츠는 망설이지 않고 몸을 돌렸다. 무기를 잃고 도망가려 했던 검사의 등에 주저없이 검을 꽂아 넣는다. 숨을 들이 삼키며 검을 뽑아내자 본디 희어야 할 검신을 타고 피가 주륵 흘렀다.

 

  도무지 끝이 나질 않는 싸움이었다. 곳곳에서 그 어떤 언어도 필요치 않은 상황이 바삐 전개되고 있었다. 사막에 퍼진 검은 기운을 피하며 제온을 상대해야 했기에 필연적인 난전이 될 수밖에 없었다. 서로가 서로의 안위를 보장해주지 못하고 각자 생존을 도모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칼리안은 한사코 플란츠의 곁에 서서 그를 지키려 했고 플란츠는 그런 칼리안을 밀쳐 냈다. 도저히 그럴 만한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저 멀리서 아델리아와 앨런이 사이좋게 공방을 주고받는 모습이 보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의 모습이 보인 건 아니었다. 다만 솟구치는 대지와 하늘에서부터 쏟아지는 불의 비를 보고 그들이 서로를 향해 맹렬한 공격을 퍼붓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시스파니안이 잠들었으니 대륙을 불태울 기세로 마법 공세를 퍼붓는 두 마법사를 말릴 이는 어디에도 없었다.

 

 

  -재밌을 거 같지 않아? 종말이라는 거.

 

 

  개전 직전 아델리아가 했던 말이 아직도 머릿속에서 웅웅 울렸다. 마법사란 족속들은 하나같이 다 미쳐 있지만 미쳐 있기로는 저기 있는 백발의 마법사가 최고일 거라는 생각을 했다. 종말 같은 건 원하지 않는다. 그런 끝은 어떻게든 막아내고 싶다. 아델리아와 앨런으로부터 급하게 시선을 거둔 플란츠는 뛰어가면 닿을 만한 거리에서 격전을 펼치고 있는 칼리안을 보았다.

 

  다수의 제온은 일찌감치 칼리안을 목표 삼아 맹공을 퍼붓고 있었다. 희고 푸르고 붉은 빛이 터져 나왔다가 비정상적으로 빨려 들어간다고 여긴 순간, 거대한 회오리가 그 부근을 휘감는다. 플란츠는 눈을 한번 깜박였다. 회오리가 가신 광경 속에서 칼리안의 등 뒤로 그 형체가 급격하게 변하는 붉은 검들이 떠오르더니 그를 둘러싼 이들을 향해 무시무시한 속도로 쇄도하기 시작했다. 얼핏 보기에는 압도적으로 우위를 점하고 있는 듯했으나, 지속적으로 마력과 오러를 소모하고 있는 탓에 그 낯빛이 창백했다.

 

  세크리티아의 바닷가에서 제온을 상대했던 날이 떠올랐다. 자신에게 참극을 보여주었다는 이유로 다누에게 천고가 지나도 잊히지 않을 상처를 남기고 아무렇지 않은 양 굴다가 종내 쓰러진 날이 떠올랐다. 지나온 과거가 예지처럼 눈앞에 펼쳐지려는 것을 플란츠는 머리카락을 흩뜨리며 흩어내고는 시선을 거두었다. 이내 흉흉한 기운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했던 탓이다. 플란츠는 검게 탄 별의 잔재와 눈이 시릴 정도로 흰 빛을 내는 별의 잔재를 각각 한 손에 쥔 채 자세를 가다듬었다.

 

  비릿한 냄새가 자신의 입에서 나는 건지 상처에서 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세크리티아의 왕궁에서 이름 모를 기사들을 상대했던 때보다도 더 숨이 가빴다. 플란츠는 밭은 숨을 내쉬며 상황을 살폈다. 얼마 가지 않아 빠듯하게 차오르는 숨을 그럭저럭 가다듬기도 전에 다수의 적이 주위를 에워쌌다. 한두 명으로 상대할 만한 인물이 아니라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플란츠는 한 손에 쥐고 있던 검을 한 데 모아 창을 만들고 휘둘렀다. 곁을 에워싼 제온을 일시에 소거하기에는 부족한 행동이었지만 적어도 그들의 공격을 분산시키는 데는 이만 한 게 없었다.

 

  이제는 창이 된 검을 휘두르며 플란츠는 힐끔힐끔 칼리안을 보았다. 싸우는 도중에는 한눈 팔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어쩔 수가 없었다. 시선이 닿는 곳에서, 오러로 만든 검이 누군가의 목덜미를 꿰뚫는다. 꿰뚫은 검이 방향을 선회하여 뒤에서 달려드는 적을 불시에 베어낸다. 상처를 헤집는 바람이 누군가의 살갗을 갈가리 찢어낸다. 칼리안은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적들을 효율적으로 상대하고 있었다.

 

  그러니 지금 남 걱정하실 때입니까. 형님.

 

  그런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린 순간이었다. 칼리안의 몸이 한순간 휘청댔다. 환상 따위가 아니었다. 이내 한쪽 무릎이 풀썩 꺾일 뻔한 걸 목격한 연둣빛 눈이 세차게 일렁였다. 플란츠는 피 냄새가 밴 입술을 깨물었다. 다급하게 주변을 살폈지만 칼리안에게 마땅히 도움을 줄 수 있을 만한 이들이 보이지 않았다.

 

  자신이 껴도 되는 곳과 끼면 안 되는 곳을 구분하여 발을 물리는 법을 안다. 그의 아우님이 자신을 걱정한다는 것 또한 안다. 하지만.

 

  하지만 지금 칼리안이.

 

  창을 휘둘러 한번 진형을 흩뜨려 놓았더니 다시 슬금슬금 몰려드는 놈들을 노려보며 플란츠는 어금니를 악물었다. 돌아올 때는 꼭 지금과 같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둘 중 누구도 홀로 돌아오는 일은 없을 거라고, 약속했다. 그가 처음부터 자신을 위해 예비해 둔 곳에 자연스레 서서, 그와 호흡을 맞추고, 걸음을 맞추고, 그렇게 살아 나가기로 약속했다. 그러니 지금은 걸음을 물려야 할 때라는 걸 알고 있었다. 여기서 나아간다면, 죽음이 자신의 손을 맞잡으리라는 걸 오래전에 완성된 이야기처럼 예상할 수 있었다.

 

  알고 있었지만.

 

  머리로 결정을 내리기도 전에 몸이 먼저 움직였다. 플란츠는 자신의 앞을 가로 막아 서는 놈의 팔을 베어내고 길을 열어 칼리안 쪽으로 뛰어 들었다. 자신의 아우님이 참 유능하고 능력도 출중한 소드마스터이자 마법사라고는 하지만 지치지도 않고 쇄도하는 제온의 공격을 모조리 막아내기는 아무래도 힘에 부친 듯하여.

 

 

  “……플란츠!!”

 

 

  플란츠는 칼리안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무수히 많은 검과 마법이 피로 물든 몸을 과녁 삼아 날아든 건 그 순간이었다.

 

  운, 좋네.

 

  세렌티라거나 운 같은 건 믿어본 적이 없었지만 지금만큼은 일평생을 통틀어 처음으로 그렇게 여겼다. 운이 좋다는 말밖에는 할 수가 없었다. 사실 딱히 공격을 막으려던 건 아니었지만 어찌되었건 적시에 자신을 향해 공격이 퍼부어졌고 덕분에 칼리안이 다치지 않았으니 된 일 아닌가.

 

 

  “왜 이런……. 왜, 왜요. 대체 왜.”

 

 

  몸에 돌기 시작한 독 때문인지, 그게 아니라면 한 사람의 몸으로는 감당키 힘든 공격을 한꺼번에 맞은 덕분인지 온 몸이 갈기갈기 찢기다 못해 산산이 조각나 부서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입체적이어야 할 풍경이 하나도 빠짐없이 점과 선과 면으로 나뉘었다가 합쳐지고 다시 잘게 쪼개지며 불티처럼 비산하고 있었다. 눈앞이 짙고 빽빽한 안개가 낀 것처럼 온통 흐렸다. 물 속으로 가라앉는 듯이 아득하게 멀어져 가는 의식 속에서 플란츠는 칼리안의 분노나 슬픔과도 닮은 것들이 주변에 포진한 적들을 불시에 덮는 것을 보았다.

 

  꿈에서 보았던 것처럼 슬프도록 시린 빛이라고, 입으로 피를 통하는 와중에도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

 

 

 

  플란츠는 속눈썹 가득 피가 엉겨 붙어 좀처럼 떠지지 않는 눈을 간신히 뜨고는 더디게 눈을 깜박였다. 피로 물든 시야에 칼리안의 얼굴이 사라졌다, 나타났다, 사라졌다, 다시 나타나기를 반복했다. 핏물에 담갔다 빼낸 것처럼 붉게 물든 플란츠의 옷만큼이나, 칼리안이 입고 있던 검은 옷 역시 온통 피에 절어 본래의 색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플란츠는 힘겹게 시선을 위로 올려 칼리안의 어깨 너머를 보았다. 물 한 방울 나지 않는 불모의 사막을 붉은 꽃잎들이 화려하게 수놓고 있었다.

 

  안네루시아를 올려 주셨네. 아우님께서.

 

 

  “……화를 내도 된다고 해주세요.”

 

 

  칼리안은 울음처럼 말했다. 슬픔은 높은 곳으로 올라갈수록 정갈하게 다듬어져야만 하는 법이었다. 내쉬는 숨 하나에도 의미가 부여되는 자리에 앉은 사람은 그 무엇보다도 절제된 언어로 슬픔을 표해야만 했다. 하지만 플란츠는 지금 이 순간 칼리안이 날 것 그대로의 언어를 토해낸다 해도 그를 책하거나 막을 수가 없었다.

 

  얼굴을 일그러뜨려가며 울지 않기 위해 애를 쓰는 칼리안은, 플란츠가 보기에는 슬픔을 토해내는 것만으로 호흡할 수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추위도 더위도 타지 않는 아우님이었는데 제 몸을 붙들고 있는 팔이 사정없이 떨리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후두둑 눈물이 떨어질 것 같은 얼굴을 보며 플란츠는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화를 내도 될 만한 사람이었다. 자신이 그럴 만한 짓을 했으니까.

 

  약속했는데, 지키지 못했다.

 

 

  “……이리도 순하셔서, 어떡합니까……. 형님이 제게 화를 내셔야죠. 어련히 알아서 살려드리겠다 했는데, 그러지를 못했잖습니까. 제가.”

  “아니, 야…….”

 

 

  메마르고 갈라진 음성이 목구멍을 작살처럼 긁으며 올라왔다. 뒤이어 울컥하고 피가 솟구치는 느낌과 함께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목구멍을 타고 올라온 피가 쏟아져 내렸다. 꽃처럼 화사했던 얼굴이 또다시 피로 물든다. 그게 안타까워 미간을 살풋 찡그리자 피보다 더 붉은 눈이 슬픔과 비탄과 비통을 안고 일렁였다.

 

  붉은 입술이 미미하게 달싹였다. 그가 어쩐지 자신이 잘 알고 있는 시동어를 발음하려는 듯하여, 플란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남은 마력도 없을 텐데, 그러지 말라는 뜻이었다. 그런데도 망설이지 않고 아브턴던트를 발음한 칼리안이 이내 어린 아이에게 동화를 들려 주듯이 조근조근 말했다.

 

 

  “……형님, 저는요.”

 

 

  칼리안은 견딜 수 없는 것들을 견뎌내려는 사람처럼 아랫입술을 물었다 놓으며 말을 이었다. 저는, 어느 하나 잊지 않겠습니다.

 

  어째서 그런 말을 해. 하지 말라는 뜻에서 손을 들어 입을 막아 보았으나 움직임은 더딜 수밖에 없었다. 너덜너덜해진 몸에 더는 힘이 들어가지 않은 탓이다. 될 수 있는 한 평소처럼 힘 있게 들어 올려 보려 했으나 힘없이 들어 올려진 손은 허공에서 얼마 머물지 못하고 아래로 추락했다. 그러나 그 손이 온전히 떨어지기 직전, 칼리안이 손을 붙들었다. 아우님은 정말……. 따듯하군. 무심결에 든 감상에 플란츠의 가슴이 무지근하게 내리앉으려던 찰나 칼리안은 붙든 손을 자신의 뺨에 비비며 속삭였다.

 

  형님이 그러지 말라고 하셔도, 저는 잊지 않을 겁니다. 죽음이 맞잡은 손에 와 닿는 온기가 낯설었다. 플란츠는 애매하게 손끝을 오므렸다. 피에 젖은 연분홍빛 입술이 달싹이다 멎었다. 네가 먼저 그렇게 말하면 어떡하라고. 무엇도 기억하지 않고 아무것도 없었던 양 그렇게 살라는 말을 하려 했는데, 그것이 자신의 소원이라고, 이게 마지막 소원이니 이 소원만은 아무리 아우님이라 해도 들어주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말하려 했는데 칼리안은 그조차도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정말 빌어먹을 아우님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고 화를 낼 수는 없었다. 화를 낼 사람은 자신이 아니었으니까. 또한 울 수도 없었다. 마지막으로 보여 줄 얼굴이 슬픔으로 얼룩지길 바라지 않았을 뿐더러, 네가 나의 슬픔마저 다 끌어 안은 듯한 얼굴로 날 보고 있었으니까. 플란츠는 별 수 없이 웃었다. 아이처럼 말갛게 웃진 않고, 한쪽 입꼬리만 끌어 올려 웃었다. 이지러진 달 같은 웃음이었다.

 

 

  “화를 내셔야죠. 아무튼 그렇게 웃으셔도 안 됩니다. 이것만큼은 아무리 형님이시라 할지라도 양보할 수 없어요.”

 

 

  그 말에, 누군가 가슴을 쥐어짜고 숨통을 틀어막는 것만 같았다. 무수히 많은 유리 파편들이 온몸을 찌르는 듯했다. 그러지 말라는 말은, 이미 늦은 거겠지. 그럼 나는 어떤 말을 돌려주어야 하나. 칼리안이 걸어 준 마법 덕분에 고통은 가셨다지만 숨을 쉬는 것조차 이제는 고역이었다. 플란츠는 자신에게 말할 수 있는 기회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했다. 그 어떤 말도 섣불리 내뱉을 수 없었다. 칼리안의 곁에서 살아 숨 쉬는 동안 그 무엇보다도 풍성하게 자라난 녹음이 피로 젖은 속눈썹이 파르르 떨릴 때마다 온갖 감정을 안고 일렁였다.

 

 

  “그러니 형님도 그러겠다고 해주세요.”

 

 

  그제야 알았다. 너는 안네루시아가 아니라, 시나스타를 올려준 거였구나.

 

  그러지 않길 바랐다. 시나스타가 아니라 안네루시아를 올려주길 바랐다. 안네루시아는 강물을 따라 하류로 흘러가다 그렇게 잊힐 테니까. 차마 사라지지 못하고 가슴 한 편에 갈앉은 추억과 해묵은 감정 따위가 뒤늦게 역류하여 칼리안을 도륙하는 날이 오지 않기를 바랐다. 생의 마지막 때에 간절히 바라는 건 그런 것뿐이었다. 그런데 칼리안은 그렇게는 못하겠다고 말한다. 잊지 않겠다고 말한다. 이 생을 안고 고스란히 살아가겠다고, 그렇게 말한다. 그래서 해줄 수 있는 말이 하나밖에는 없었다.

 

 

  “……안, 잊을 테니, 까…….”

 

 

  칼리안이 지금 한 말에 돌려주는 대답이긴 했으나 꼭 그런 것만도 아니었다. 아주 오래 전에 해주었어야 하는 몫까지 포함하여 돌려준 대답이었다. 진작 해줬어야 하는 말이라는 걸 알았으면서도 그때는 차마 하지 못했다. 그 말을 하게 되면 한 사람분의 생을 그 몸에 고스란히 얹어주는 길이 될 것만 같아서. 너와 내가 형님과 아우가 아닌 또 다른 사이로 엮일 것만 같아서.

 

  칼리안은 한 평생 우는 법밖에 모르는 사람이 처음으로 웃는 것처럼 설익은 미소를 그 얼굴에 올리며 대답했다.

 

 

  “네.”

  “너, 웃어……. 자꾸…….”

  “봐주세요. 짖는 것보다는 이게 낫지 않습니까.”

 

 

  ……그리고, 자꾸 말씀하려 하지 마세요. 기운도 없으신 분이. 보세요, 계속 억지 부려가시면서 말씀하려고 하시니까, 이렇게……. 눈이, 자꾸……. 자꾸만, 감기시잖아요. ……피곤하세요? 플란츠는 그 어느 때보다도 세차게 고개를 가로저으려 했다. 안 피곤한데 왜. 안 피곤해. 말 하는 것도 안 힘들어. 고개를 저음으로써 그런 말을 전하려 했다. 할 수 없었다. 자꾸만 속에서 핏물이 치밀어 올라서, 그렇지만 또 피를 토하면 네가 분명 슬퍼할 테니까, 치밀어 오르는 걸 어떻게든 참아내고자 입을 꾹 다물고 있는 데 모든 힘을 소모하는 것만으로도 한계였다.

 

  칼리안, 칼리안……. 오래 전에 제 몸 곳곳에 뿌리를 내린, 그리고 아마도 다시는 부르지 못할 이름이 혓바닥 위를 미련처럼 맴돌았다. 마지막으로 이름 정도는 불러주고 싶은데, 그마저도 여의치가 않았다. 소리를 내보려 하자 목구멍이 난도질 당하는 듯했다. 그래도 플란츠는 기도와 연결된 기관이 모조리 잡아 뜯기는 듯한 고통을 감내하면서 고집스럽게 그 이름을 발음해 내었다.

 

 

  “칼리, 안…….”

  “네. 저 여기 있습니다. 형님.”

 

 

  분명 힘을 줘서 눈꺼풀을 들어 올리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까부터 칼리안의 모습이 보였다 안 보였다 했다. 사람의 키가 순식간에 늘어났다 줄었다 할 리가 없을 텐데 눈에 들어오는 칼리안의 머리통이 자꾸만 위로 치솟았다가 아래로 푹 꺼졌다가 어둠 속으로 잠겨든다. 플란츠는 벌벌 떨리기 시작한 몸을 칼리안 쪽으로 기대며 그의 품에 얼굴을 파묻었다.

 

 

  “거 봐요. 피곤하시잖습니까. ……주무세요, 이제. ……졸리시면서, 고집부리시네. 그러다 파릇파릇한 완두콩 노래집니다.”

 

 

  칼리안의 손이 그늘처럼 플란츠의 얼굴을 덮었다. 마지막까지, 건방져……. 속으로 잦아드는 불평을 토해내지 못하고 플란츠는 눈을 감았다. 신록의 계절이 저무는 순간이었다.

 

 

  “……편히 주무세요. 정말로.”

 

 

  한 계절이 소리없이 닫힌다. 칼리안은 가슴에 단단히 맺혔던 인이 형해조차 남지 않고 바스라지는 걸 느꼈다. 그 어느 것보다 눈이 부시게 아름다웠던 녹음이 바늘과 실로 꿰매다 붙인 것처럼 아직도 눈앞에 선명한데, 이 모든 게 이젠 다만 환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가 없다. 마치 자신의 살점을 뜯어내듯, 플란츠의 얼굴에서 좀처럼 떨어지지 않던 시선을 겨우겨우 떼어낸 칼리안은 한 손에 플란츠를 안은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온이 완성한 시간의 축은 불완전하고 불안정한 것이었다. 그들은 그것을 통해 악신을 일깨우고자 했고 실제로 검은 기운을 불러내는 데까지는 성공했지만 그것도 이제 끝이다. 칼리안은 모래시계가 있는 곳으로 걸어 가 피로 젖은 시나스타를 들었다. 검붉은 피를 머금고 불길한 빛을 내고 있는 모래시계를 횡으로 베어내는 손길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시간을 되돌리기 위함이 아니라,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되는 존재를 있어야 할 곳으로 돌려보내는 움직임이었다. 찬란한 금빛과 어두운 핏빛이 한데 뒤섞여 흐르며 대지를 물들이기 시작했다. 밀물처럼 구석구석으로 빠르게 번져나가는 빛이 검은 기운을 몰아내는 것을 보며 칼리안은 그저 서 있었다.

 

 

  미안하구나.

 

 

  감정이 희석될 만큼의 세월을 살아왔으면서도, 누군가를 잃어본 적이 있기에 칼리안의 슬픔을 이해할 수밖에 없는 절대자의 음성이 들렸다. 스스로 잠드는 길을 택하면서까지 종말을 막아보려 했지만 막지 못한 것에 대한 미안함인지, 그 결과로 사랑하는 사람을 잃게 만든 것에 대한 미안함인지 칼리안은 굳이 구분하지 않았다. 그저 바랐다. 실로 사려깊은 시스파니안이 누군가를 영겁토록 추억하고 기리는 생에서 벗어나 잊히는 결말을 부여받기를.

 

  빛을 잃은 대지에 신의 축복 같은 황금빛이 새로이 덧씌워진다. 더디지만 꾸준히 본래의 색을 되찾아 가는 사막 위에서, 너덜해진 몸을 부여잡은 이들이 뒤늦게 하나 둘 몸을 일으켰다.

 

 

  “……전하.”

 

 

  누군가 비명처럼 그 호칭을 불렀다. 칼리안은 자신을 보는 수많은 얼굴을 본다. 슬픔은 발화될 기회를 상실해야만 했다. 칼리안은 스러지는 것처럼 웃었다. 다 끝났습니다. 해냈어요. 우리가. 층층이 드리워진 구름 사이로 여리지만 분명한 빛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

 

 

 

 

  그러고 보니 설마 처음이십니까?

 

 

  무겁게 내리쬐는 정오의 햇빛처럼 숨이 막히는 침묵을 걷어 낸 건 칼리안의 말이었다. 너 말고 누가 있겠어. 고개를 갸웃하는 칼리안에게 그렇게 말하는 대신 플란츠는 공연히 옷깃을 매만지며 대답했다.

 

 

  그럴 리가.

 

 

  거짓말은 아니었다. 플란츠는 그 왕성하고 방대한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다양한 부류의 서적들을 읽고 또 각양각색의 지식을 섭렵한 바 있었다. 세크리티아의 바다에서 칼리안이 물에 빠졌을 때 건져낼 수 있었던 것도 그렇게 습득한 지식의 도움을 받은 것이었다. 물론, 개중에는 그처럼 써먹을 수 있는 것뿐만 아니라 차마 연세 많으신 아우님에게 대놓고 말하기 민망한 것들도 다수 있었다. 지금처럼.

 

  어쨌든 책에서 배웠으니 이런 일이 처음은 아니다. 제 안에서 억지논리를 펼친 끝에 나온 플란츠의 대답에 칼리안의 붉은 입매가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잊으세요. 그건.

  왜.

  어차피 책에서 접한 게 전부이실 거 아닙니까.

  건방진 새끼.

  대신, 지금 이 순간은 잊지 마세요.

  …….

 

 

  플란츠는 입을 다물었다. 칼리안은 모든 걸 이해한다는 사람처럼 약간 서글프게 웃으며 말했다.

 

 

  ……적어도, 제가 방금 가르쳐 드린 것만이라도요.

 

 

 

*

 

 

 

  “그래서, 제온이라는 잔악무도한 놈들이 불러 온 종말을 막아 내신 위대하신 국왕 전하와 영웅 분들 덕분에 우리가 이렇게 이 땅 위에 두 발을 딛고 서 있을 수가 있는 거란다.”

  “그 이후에 국왕 전하는 어떻게 되셨어요?”

 

 

  고소한 빵내음이 가득한 거리 사이로 아이들이 재잘거리는 소리가 소란스레 오갔다. 아이들을 주변에 앉혀 놓고 이야기를 해주고 있던 남자가 옹기종기 모여 있던 아이들 사이에서 불쑥 튀어나온 질문에 곤란한 얼굴로 뺨을 긁었다.

 

 

  “그 이후에 어떻게 되었냐면…….”

  “국왕 전하께서는 평생 왕비를 들이지 않으셨다는데 그게 사실이에요?”

  “나 알아! 사실 손위형제를 사랑해서 그러셨대!”

  “플란츠 룬 카이리스 대공 말이야?”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가 어딨냐, 욘석들!”

 

 

  말도 안 되는 소리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 검은 머리카락에 붉은 눈을 가진 사람은 그 곁을 유령처럼 스치며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종말을 막아 냈던 그 날, 다누는 칼리안을 자신의 영역으로 불러 들였고 자신의 예지가 틀렸다며 칼리안의 앞에 고개 숙이지 않았다. 칼리안도 미래를 읽어내는 당신이 감히 내게 막아내지 못하리라는 말을 했냐며 그를 비웃지 않았다. 그 날, 한 사람의 세계는 분명히 종말을 맞이했으므로.

 

  다누는 말했다. 세렌티의 힘은 거의 다했다고. 또한 너는 얼마든지 선택할 수 있다고. 칼리안은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쉬이 알아차렸다. 시스파니안이 했던 미안하다는 말이 무엇을 두고 한 말이었는지도 알아차렸다. 고작 한 사람의 몸으로 짊어지기에는 그 무게가 너무 무겁다고 했던 말이 불현듯 떠올랐다. 그는 실로 사려 깊은 시스파니안이었으므로 이런 불합리하고 부당하며 가혹하기까지 한 미래를 상정하고 한 말은 아닐 테다. 그렇지만 너무나 적확하고 정확한 말이지 않은가.

 

 

  선택이 필요한 문제입니까. 내가 왜 그래야 합니까. 어째서 그래야 합니까. 이토록 의미 없는 세계를 위해, 내가 왜.

 

 

  세렌티의 힘이 거의 다 했으니 이제 네가 세렌티를 대신하여 세계를 떠받드는 축이 되는 것이 좋겠으나, 원한다면 선택할 수 있다고 하는 다누의 말에 그런 분노가 욕지기처럼 치밀었다. 한때 자신을 분지르고 깎아 내고 마모시켜 가면서까지 누군가를 지키는 생을 추구해온 자가 터트릴 법한 감정은 아니었다. 가장 사랑했던 존재가 결여된 세계라 할지라도 저 먼 바다와 카이리스에는 아직 그가 사랑하는 이들이 분명하게 존재했다. 칼리안은 당장에라도 목구멍을 찢어내고 뛰쳐 나올 것처럼 제 속에서 날뛰는 모순적인 말을 끝내 뱉어내지는 못하고 핏덩이를 삼키듯 삼켜내었다. 동시에 생각했다. 플란츠 역시 지키고자 했다는 것을.

 

  그래, 플란츠는 지키고자 했다. 루시와 안네, 히나, 발칸의 대원들, 레릭, 리리에, 카이리스, 그리고……. 말로 다 하기도 벅찰 만큼 무수한 이들과 무수한 것들을 지키고자 했다. 그들이 발 딛고 선 세계를 지키고자 했다. 불모의 땅에도 생명은 피어나듯이, 플란츠는 폐허 같은 환경 속에서 태어났음에도 다른 이들을 사랑하고 또 사랑하는 이들을 지켜내고자 하는 사람으로 자라났다. 그런 사람이 사랑한 것들과 지키려고 한 것들을 알아서, 그래서…….

 

 

  “잘나신 형님 덕분에 고생입니다. 이 아우가.”

 

 

  그래서 대답했다. 알겠다고. 그날 이래로 죽은 사람을 통해 지켜져 온 불사의 삶이었다. 끝이 나지 않는 삶 속에서 명화처럼 아름다웠던 풍경은 금세 빛을 잃었다. 그간 많은 시간을 함께 했던 이들도 물살처럼 곁을 스치고 지나가니 오직 자신만이 홀로 불변한 채 존재했다.

 

  시간의 흐름과 함께 많은 것이 바뀌었다지만 칼리안은 그 모든 변화를 실감할 수 없었다. 분명하게 흐르고 있음에도 영원히 얼어 붙은 것처럼 여겨지는 시간은 머지 않아 한 사람에게서 인간적인 면모를 서서히 앗아가기 시작했다. 사람이 지녀야 할 다채로운 감정은 어느덧 종이 위의 활자처럼 낯선 것이 되었다. 칼리안은 액자 너머의 그림을 들여다 볼 때와 별반 다르지 않게 타인의 삶을 감상했다. 그들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었다.

 

  새롭고 흥미로운 풍경을 맞닥뜨렸을 때 인간이 마땅히 느껴야 할 감흥으로부터도 완벽하게 유리된 삶이었다. 무엇을 보아도 똑같으니 걸음에는 이제 목적이 없었다. 그저 발 닿는 데로만 다닌 지도 벌써 몇 백 년이었다.

 

  오늘도 다르지 않았다. 마을의 거리를 지나 외곽으로 이어지던 정처 없는 걸음이 이윽고 어느 숲 속의 파릇하고 푸릇한 새싹이 피어난 나무의 그루터기에 가 멎었다.

 

 

  “파릇하네…….”

 

 

  그 일이 있은 후로 앨런은 칼리안을 걱정하고 염려했다. 속에서부터 곪고 곪은 끝에 거꾸러질 것처럼 보여서였을까. 그 속을 다 파내고 마른 나무껍질 따위로 빈 속을 채운 인형처럼 공허해 보여서였을까. 칼리안은 좀처럼 갈무리 되지 않는 마음들을 힘겹게 그러모아 제 마음 한 편에 꾹꾹 눌러 담으며 말했다.

 

  저 어디 안 가요. 아버지 곁에서 평생 아들 노릇 해야 한다니까요? 게다가, 보세요. 이처럼 파릇한 것들을 두고 제가 가긴 어딜 갑니까. 할 수 있는 것들을 할 만큼 한 뒤에는 다른 이에게 왕위를 넘기고 물러나겠지만, 아직은 아니에요.

 

  한 세계와 무수히 많은 계절을 잃고도 칼리안은 죽은 듯이 살지는 않았다. 여전히 세상에는 칼리안 루 레인 카이리스를 사랑하는 이들이 많이 있었고 칼리안 루 레인 카이리스가 사랑하는 이들도 많이 있었다. 또한 단지 비참한 자기 위로에 불과할지도 몰랐으나 끔찍하게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 삶이 마냥 비극인 것만도 아니었다. 계절의 순환에 따라 푸르고 싱그럽게 피어난 것들을 볼 때면 매 순간 새롭게 사랑하게 되었으니까. 이 세계를. 그리하여 이곳을 지키려 했던 당신을.

 

 

  “제 뒤에 계시라고 했더니,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이렇게 제 앞에 먼저 와 계시면 저는 어떡합니까.”

 

 

  형님께서 언제나 제 등 뒤에 계시리라고 믿었던 적이 있는데 말입니다. 아니, 바람이었나. 어쨌든 오만한 바람이었다는 건 인정합니다만, 그래도요. 파릇하게 자라난 새싹을 손으로 매만지며 칼리안은 입을 비죽였다.

 

 

  짖네.

 

 

  바람결에 나뭇잎이 스치는 소리 사이로 그리운 음성이 파문처럼 일었다. 그것이 자신에게만 들리는 환청인지 아닌지 칼리안에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그 음성이 화석처럼 굳은 마음을 유일하게 움직이는 사랑하는 세계의 부름이라는 것뿐이었다. 형님 안 계시는 동안 더 잘 짖게 됐습니다, 저. 칼리안은 속으로 대답하며 슬며시 눈을 감았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어둠 너머, 언제든 여기에 있을 테니 되도록 늦게 오라고 하는 사람을 보기 위해. 자신을 살아가게 하는 그 얼굴을 그렇게나마 보기 위해. 인간이 지녀야 할 감정이 거세된 삭막한 얼굴 위로 설익은 미소가 떠올랐다.

 

  칼리안은 감은 눈에 힘을 주며 느리게 숨을 내쉬었다. 이윽고 감은 눈 너머가 파릇한 빛으로 물들면서 추억이 해일처럼 온몸을 덮었다. 봄철의 아지랑이처럼 아른거리는 풍경 속에서 플란츠가 자신을 보고 서 있었다. 여름 나무처럼 울창하게 피어난 계절이, 영영 잊을 수 없는 사람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누군가는 망집 같은 과거라 할지언정 이것은 결코 그를 도륙하는 절망 따위가 아니었다. 유일한 안식이었다. 호흡이었다. 살아가게 하는 모든 것이었다. 숨이 다하는 날까지 사라지지 않을 사랑의 흔적이었다.

 

  사랑이었다.

 

 

2019. 09.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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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텟츠바] 집요정이 물건을 가져가는 이유에 대해

2차/etc2020. 9. 12. 21:30

 

バンドやろうぜ!

시라유키 텟페이X사에키 츠바사

2017.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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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졸업식은 3월 19일이었다. 18일, 밴드부 연습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시라유키는 꽃집에 들렀다. 꽃다발 세 개가 필요했다. 이 년 동안 시라유키와 가장 친근한 시간을 보냈던 인물 세 명이 한꺼번에 졸업을 하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어버버하고 있다가 비웃음을 사지 않기 위해서(그러나 츠바사의 말을 빌리자면 그의 얼굴을 보고 비웃을 수 있는 사람은 몇 되지 않았다)꽃집에 들르기 전에 나름 착실하게 사전 조사를 했다지만 꽃집에는 꽃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꽃집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그 전까지 입속말로 열심히 되뇌었던 이름들은 홑씨로 변해 흩날렸고 시라유키는 꽃집을 가득 메운 꽃 속에서 잠깐 아연해졌다. 이거랑 이거, 이거 주세요. 그리고 이건 따로 묶어서 주시고요, 라며 꽃집에 들르기 전에 나름 예행연습이랍시고 외웠던 대사가 모조리 쓸모없어지는 순간이었다.

 

  시라유키는 꽃을 담아둔 수통 앞에 서서 눈을 부릅뜨고 꽃을 쳐다보았다. 온 신경을 집중해서 꽃을 보고 있으면 잃어버렸던 이름들이 돌아오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기실 꽃집에서 미리 만들어둔 꽃다발 중 적당히 세 개를 고를 수도 있는 일이긴 했다. 하지만 시라유키는 어쩐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시라유키가 생각하기로, 이 졸업식 꽃다발은 성만 다르고 피만 안 섞였달 뿐이지 가족이나 마찬가지인 선배들에게 줄 수 있는 마지막 선물이었다. 그런 선물을 무슨 냉동식품 고르듯이 대충 고를 수는 없었다. 

 

  그러나 암만 수통을 노려봐도 떠오르는 건 없었고 이러다가는 한나절이 가도록 꽃다발 세 개는커녕 하나도 사지 못할 것만 같았다. 시라유키는 점원을 부르기로 했다. 수통만 마냥 보다가 이대로 꽃집에 뿌리를 내릴 수야 없는 노릇이었다.

 

  “계심까?”

  “네, 지금 갑니다!”

 

  대답은 안쪽에서 들렸다. 곧이어 점원이 한달음에 달려왔다. 

 

  “…….”

  “…….”

  “…….”

  “저, 실례지만 무슨 용무로…….”

 

  점원이 시라유키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도움을 청하고자 점원을 불러놓고 시라유키는 정작 심각한 얼굴로 수통만 보고 있었던 것이다. 점원의 말에 시라유키가 화급히 그녀를 돌아보니 얼굴에 불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사에키가 시라유키를 놀려 먹을 때 종종 하곤 하는 말을 잠시 빌리자면, ‘얼굴도 무섭게 생긴 놈’이 꽃집에는 대체 무슨 볼 일이 있어서 들른 걸까, 하고 생각 중일지도 몰랐다. 

 

  시라유키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일도 이제는 익숙했다.

 

  “아, 그, 꽃 좀 사려고 하는데요.”

 

  점원은 그 말에 안심한 모양이었다. 그녀가 이내 친절한 영업용 미소를 얼굴 만면에 띠며 입을 열었다.

 

  “졸업식 때 쓰시려고요?”

 

  시라유키는 제법 힘 있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네. 소중한 선배들에게 줄 검다. 그러니까 제일 좋고 싱싱한 꽃으로…….”

  “어머, 그런 거라면 정말 잘 찾아오셨어요. 저희 집이 요 근방에서 제일 싱싱하기로 유명하답니다.”

 

  점원이 너스레를 떨었다. 제일 싱싱하기로 유명하다니! 시라유키는 그녀의 말에 요만큼의 과장도 섞여 있지 않다고 믿으며 속으로 짤막한 감탄사를 내뱉었다. 이 근방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꽃집을 검색까지 해가며 찾아온 보람이 있었다.

 

  “음, 혹시 생각해두신 꽃이라도 있으세요?”

  “그게 말임다……. 사실 뭐가 뭔지 잘 몰라서…….”

 

  시라유키는 뒷목을 긁적이며 말을 흐렸다. 그녀가 시라유키의 요구만을 기다리며 마네킹처럼 서 있었다. 시라유키는 허공을 쳐다보았다가 점원을 한 번 쳐다보았다가 다시 바닥을 내려다보며 더디게 말을 이었다.

 

  “그, 추천을……. 좀 해주셨으면 하지 말임다.”

 

  그러자 점원이 더할 나위 없이 상냥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걱정 마세요. 그래서 제가 있는 거 아니겠어요. 어디 보자. 졸업식 때 쓰시는 거면 역시 이거랑…….”

 

  점원이 분주하게 손을 놀렸다. 조금 전까지 안에서 줄기를 다듬고 있었는지 손끝이 파랬다. 시라유키는 그녀가 근처에 놓인 원통에서 몇 개인가의 꽃을 뽑는 것을 보았다.

 

  “일단 이건 어떠세요?”

 

  눈 깜짝할 사이에 꽃묶음이 완성되어 있었다. 시라유키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점원이 내민 것을 바라보았다.

 

  “별로세요?”

  “어, 어…….”

 

  예상보다 빠른 속도로 만들어진 꽃묶음에 너무 놀란 나머지 시라유키는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점원은 그걸 ‘불만족스럽다’는 표현으로 여겼는지 다시 재게 손을 놀렸다. 좀 별로시면 여기에 이거랑 이걸 추가하고……. 꽃묶음에 하늘하늘한 꽃잎이 풍성한 꽃들이 더해졌다.

 

  “이러면 좀 괜찮으실까요?"

  

  시라유키는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몇 개나 필요하시나요? 한 개만 사시나요?”

  “세 개 임다!”

  “세 개……. 그러면 너무 똑같은 것도 좀 그러니까, 다음은 이거랑 이걸…….”

 

  보인다! 점원의 머리 뒤에서 은은하게 빛을 발하는 동그란 광체가! 

  

  시라유키는 어딘가 감격한 얼굴로 점원을 바라보았다. 지금 이 순간 그녀는 시라유키의 단 하나뿐인 구원이자 꽃무더기 속에서 나타난 신, 꽃의 신 그 자체였다.

 

 

 

 

 

  <선배, 드릴 게 있슴다.>

 

  세 명에게 똑같은 내용의 라인을 보내고 시라유키는 핸드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졸업식을 맞아 교내에는 사람이 무척 많았다. 시라유키는 기념사진을 찍는 사람들에게 폐가 되지 않게 허리를 이리 숙였다 저리 숙였다 하며 구석자리를 찾아 움직였다. 쓸데없이 사람들 틈바구니에 끼어 있다가는 선배들이 자신을 찾지 못할 공산이 컸다. 

  

  빈자리를 찾는 일은 예상한 대로 쉽지 않았다. 여길 가도 사람, 저길 가도 사람, 어딜 가나 좁은 머리통에 심은 머리숱처럼 사람들이 수두룩 빽빽했다. 시라유키는 수색견처럼 빈자리를 찾아 헤맨 끝에 겨우겨우 앉을 자리를 찾을 수 있었다. 그늘은 아니어서 몸을 쪼그리고 앉아 있으려니 볕 아래에서 정수리가 따끈따끈하게 익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시라유키는 핸드폰을 꺼내 다시 라인을 보냈다.

 

  <화단 쪽임다>

 

  그러고는 산을 바라보는 것처럼 먼 시선으로 삼삼오오 모인 사람들을 보았다. 사람들 틈 속에서 연신 번쩍번쩍하고 눈부신 카메라 후레쉬가 터지고 있었다. 물보라처럼 튀는 웃음소리를 들으며 시라유키는 문득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가족들과 사진을 찍어본 게 언제였더라. 잘 생각이 나지 않았다. 잔뜩 차려입고 사진관에 가서 거창하게 찍는 가족사진은 고사하고, 집에는 평범한 가족사진조차 몇 장 없었다. 워낙 어린 나이에 부모님이 자신만 남겨두고 집을 나간 탓이다. 부모님과 함께 할 수 있었던 시간은 사진 몇 장으로나마 남긴 게 다행일 정도로 짧았다. 당연히 입학식 때나 졸업식 때 가족과 찍은 사진이 있을 리 만무했다. 부모님과 함께 할 미래를 꿈꾸며 어린 나이에 한푼 두푼 돈을 모아 앨범까지 사두었지만 결과적으로 그 앨범은 수많은 페이지가 백지로 남은 채 방치되었다.

 

  자신은 그 앨범의 일부분을 닮아 있다. 그래도 베갯잇을 적시며 운 건 처음 며칠이 다였다. 여느 때처럼 자다 일어났는데 하루아침에 부모님이 사라져버린 현실은 어린 나이에 받아들이기에는 조금 버거운 사실이었지만, 며칠 속시원하게 울고 나니 이미 벌어진 현상을 납득하는 일은 신기하게도 빨랐던 것이다.

 

  또한 시라유키는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쉽게 감상에 젖는 타입은 아니었다. 그것은 다시 말하자면 과거에 매몰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했다. 한번 납득한 과거는 이내 종이 위의 활자가 되어서, 시라유키는 책을 읽어주는 것처럼 다소나마 담담하게 부모님의 얘기를 꺼낼 줄도 알게 되었다. 그러니 졸업을 맞아 가족들과 화기애애하게 사진을 찍는 사람들을 봐도 그냥 그러려니 할 뿐이었다. 게다가 피를 나누지 않은 가족도 가족이라면 자신에게는 이미 세 명의 가족이 있었다. 블레이스트라는 이름 하에 하나로 묶인.

 

  그렇지만.

 

  시라유키는 들고 있는 꽃다발을 움켜쥐며 생각했다. 그 이름으로 묶이는 것도 이제 끝일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생각하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시노노메, 마키, 사에키 중에서 사에키가 졸업과 동시에 밴드를 그만 두기로 한 것이다. 3학년 막바지까지 블레이스트의 베이스로서 활동하긴 했지만 그가 2학년 때 진학반 시험을 쳤다는 건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너희들과 달리 난 뭐든 ‘그럭저럭’ 잘하니까 말이야.

 

  시노노메의 입에서 "츠바사, 진학반 시험 쳤어?"라는 말이 나왔을 때 사에키는 그렇게 말했다. 시노노메의 물음은 사에키에게 뭔가를 캐묻는다거나 그를 질책하기 위해 던져진 건 아니었다. 실제로 그는 사에키의 대답을 듣자마자 "츠바사가 그러기로 결정했다면 응원할게!" 라고 했을 뿐 사에키에게 어떠한 비난조의 말도 하지 않았다. 그건 마키와 시라유키도 마찬가지였다. 사에키를 포함하여 블레이스트에 속한 네 명 모두 개개인의 선택을 존중했으면 했지 자신의 생각을 내세우며 무언가를 강요하는 사람들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사에키는 대답을 할 당시 어딘가 속이 켕기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언제 그랬냐는 것처럼 낯빛을 싹 바꾸더니 누가 묻지도 않았는데 진학반 시험을 친 이유에 대해 말했다. 

 

  진학반 시험을 친 건, 그 편이 나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야. 너네도 알다시피, 그럭저럭 공부를 잘해도 그럭저럭 먹고 사는 데는 지장 없으니까. 

 

  다시 말해 그럭저럭 밴드를 해서는 그럭저럭 먹고 사는 것조차 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사에키의 뼈 있는 말에 블레이스트에는 잠깐 침묵이 감돌았다. 그 말로 인해 줄곧 외면하고 있었던 현실을 자각하고 머리를 얻어 맞은 듯한 충격을 느껴서는 아니었다. 애초에 어중간한 각오로 밴드활동을 지속하고 있었던 게 아니다. 그럭저럭 밴드를 해서는 그럭저럭 먹고 사는 것조차 할 수 없다는 것쯤은 블레이스트의 멤버 모두 충분히 인지하고 있던 명제였다. 사에키라고 하여 그 사실을 몰랐겠는가. 그러니 침묵이 감돌았던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모두 실감했기 때문이다. 사에키 츠바사가 정말 블레이스트를 떠난다는걸.

 

  마지막.

 

  불유쾌한 단어가 사전 위의 활자처럼 선명하게 떠올랐다. 별로 머릿속에 담아두고 싶지는 않은 단어였기에 시라유키는 필사적으로 다른 생각을 하며 고개를 도리도리 털었다. 때맞춰 건너편에서 익숙한 얼굴들이 걸어오고 있었다.

 

  “텟페이, 늦어서 미안!”

  “많이 기다렸냐?”

 

  시노노메와 마키가 차례대로 미안한 얼굴을 해보였다. 시라유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텟페이, 아무리 오래 기다리고 있었다고 해도 그렇게 인상 쓰고 있으면 사람들이 무서워서 다 도망갈지도 모른다구? 집 지키는 도사견인 줄 알았어. 뭐, 그 덕분에 멀리서도 텟페라는 걸 한눈에 알아봤지만 말이야.”

 

  한 발짝 떨어져서 어물쩍 걸어온 사에키가 얄미운 한마디를 툭 던졌다. 시라유키는 발끈하며 대답했다.

 

  “얼굴로 놀리는 것 좀 그만둬 주십쇼!”

  “싫-은데? 텟페이, 이게 다 애정이야. 안 그래, 야마토?”

  “맞아 맞아, 애정이라구! 텟페!”

 

  시노노메가 싱글벙글 웃는 얼굴로 신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너까지 츠바사에게 동조하면 어떡하냐! 물론, 나도 거대 치와와……. 아니, 이 경우엔 골든 리트리버인가……. 아무튼, 개처럼 생겼다고 생각하긴 하지만.”

  “잠깐 선배, 그거 지금 욕하는 거 아님까? 명백히 욕하는 거 같지 말임다?”

  “소스케가 저렇게까지 텟페를 생각해주다니!”

 

  마키의 말에 시노노메는 정말로 감격한 눈치였다.

 

  “잠깐만요, 야마토 선배! 이게 어딜 봐서 생각해주는 검까!”

  “소스케는 정말 마음이 깊구나……. 난 기껏해야 몰티즈나 비글을 생각했는데…….”

  “너네, 무슨 이상한 소리들을 그렇게 진지하게 늘어놓는 거야? 텟페 화낸다.”

 

  이 이상한 대화의 물꼬를 튼 주범이 유일한 상식인인 척 입을 열었다. 생각해주는 척하지만 어차피 기조는 늘상 놀리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알면서도 시라유키는 화내지 않았다. 사에키가 딱히 나쁜 뜻이 있어서 이러는 게 아니라, 단지 시라유키가 '친한 후배라서’ ‘놀리기 좋으니까’ ‘아무런 악의 없이’ 저런 말을 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거기에 사에키가 이처럼 격의없이 편하게 대하는 대상은 몇 없다는 것도. 그리고 그 몇 없는 대상 중 한명이 자신이라는 것도. 

 

  일련의 사실을 새삼 상기할 때마다 항상 울컥함보다는 기꺼움이 앞서곤 했다. 물론 시라유키가 사에키에게 이런 사실을 말한 적은 없다. 부끄러운 건 둘째치고, 말했다가는 분명히 건수를 잡았다며 주구장창 놀려댔을 테니까. 

 

  “츠바사 선배가 제일 먼저 시작한 거 아님까?! ……뭐, 됐슴다. 이거나 받으십쇼.”

 

  시라유키는 들고 있던 꽃다발을 주섬주섬 꺼내보였다. 시노노메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탄성을 내질렀고 마키가 소리없이 놀라며 그 탄성을 거들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후한 반응에 시라유키는 어쩐지 민망한 기분이 들었다. 따지고 보면 그렇게 대단한 것도 아니고 당연히 준비해야 하는 걸 준비했을 뿐인데 이렇게까지 좋아할 줄은 몰랐다. 시라유키는 머쓱하게 말했다.

 

  “선배들 졸업식이잖슴까. 그래서 샀슴다. 어제.”

  “텟페이! 뭘 이런 걸 다 준비했어. 와, 고맙게 받을게!”

  “텟페이……. 거대 치와와랑 골든 리트리버 닮았다고 한 거 사과하마. 역시 잉글리시 쉽독이…….”

  “……아니, 부탁이니 그만둬 주십쇼.”

 

  마키가 큼큼 헛기침을 하며 입을 다물었다.

 

  “이거, 각자 맘에 드는 걸로 고르십쇼. 일부러 다 다르게 골랐슴다.”

  “난 이걸로 할게, 텟페이!”

  “그럼 난 이거.”

 

  마키와 시노노메는 동시에 입을 열며 손가락으로 꽃다발을 가리켰다. 시라유키는 혹시나 둘의 선택이 겹치면 어쩌지 하고 찰나 간 걱정했으나 취향이 달라서인지 다행히도 그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시노노메는 노란색 프리지아를 골자로 해서 금잔화와 안개꽃이 드문드문 있는 꽃다발을, 마키는 전체적으로 색감이 붉은 꽃들이 탐스럽게 피어 있는 꽃다발을 선택했던 것이다.

 

  “너네 취향 진짜 너네 같다…….”

 

  사에키가 작게 하품했다. 시라유키는 그들이 고른 꽃다발을 각자에게 건네주려다가 멈칫했다.

 

  “츠바사 선배는요?”

  “나? 나는 됐어. 그보다, 벌써 두 놈이나 동시에 골랐잖아. 텟페 네가 들고 있는 꽃다발은 세 갠데 말이야. 이러면 자연히 남는 게 내 게 되는 거지 뭐.”

 

  심드렁한 음성이었다. 시노노메가 수업시간에 졸다가 짝이 등을 쳐서 깨어난 사람처럼 퍼뜩 놀라며 사에키를 쳐다보았다.

 

  “앗, 혹시 내가 고른 게 마음에 들면 그거 줄게, 츠바사!”

  “됐어.”

  “그럼 내 거…….”

  “아니, 괜찮다니까…….”

 

  자, 빨리 너네가 고른 거 가져가. 사에키가 휘휘 손을 내저었다. 하지만 시노노메와 마키는 선뜻 꽃다발에 손을 뻗지 못하고 머뭇댔다. 잠깐이지만 사에키를 고려하지 않은 미안함 때문이었다. 같은 이유로 시라유키도 그들에게 선뜻 꽃다발을 건네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세 명은 어쩔 줄을 모르고 고장난 로봇처럼 버벅였다. 

 

  사에키가 답답해 죽겠다는 얼굴로 시라유키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참. ……내놔라, 텟페. 쟤네가 고른 거.”

 

  당당한 요구였다. 시라유키는 멀거니 사에키의 손만 보고 있다가 “뭐 해.” 하는 사에키의 재촉에 허겁지겁 그에게 꽃다발을 건넸다. 사에키가 시노노메와 마키가 고른 꽃다발을 받아들어 각자의 품에 친히 안겨주었다.

 

  “이게 남는 거지?”

 

  사에키가 시라유키의 품에 들려 있는 꽃다발을 빤히 보며 말했다.

 

  “넵…….”

  “저, 츠바사, 난 진짜 괜찮으니까 이거 갖고 싶으면…….”

  “됐다니까. 텟페, 나 이거 가지면 되지?”

 

  사에키는 제비 통에 든 제비를 뽑듯이 시라유키의 품에서 꽃다발을 가져갔다. 연분홍빛의 하늘하늘한 꽃잎이 겹겹이 쌓인 라넌큘러스를 중심으로, 얼핏 보면 보라색처럼 보이는 분홍빛 카네이션과 연노랑색 리시안셔스를 적절히 안배해 만든 꽃다발이었다.

 

  사에키가 꽃다발을 들고 있는 모습을 보며 시라유키는 속으로 조용히 감탄했다. 꽃다발을 만들어 준 점원에게 감사를 넘어서 경의마저 표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점원은 사에키의 얼굴이라고는 한번도 보지 못했을 텐데, 어쩌면 이렇게 그에게 꼭 어울리는 꽃다발을 만들 생각을 다했을까. 꽃다발은 정말이지 사에키와 끔찍할 정도로 잘 어울렸다. 

 

  “그나저나 텟페, 사실 난 꽃 별로 안 좋아하는데.”

 

  꽃다발의 꽃을 무심히 건드리다 말고 사에키가 중얼거렸다. 시노노메가 바늘에 찔린 사람처럼 튀어 오르더니 다급하게 말을 쏟아냈다.

 

  “잠깐만, 츠바사……! 텟페이가 생각해서 챙겨줬는데…….”

 

  사에키가 시노노메를 일별했다가 무심하게 대꾸했다.

 

  “별로, 챙겨달라고 한 적은…….”

  “츠바사!”

 

  마키가 츠바사의 말을 잘랐다. 음악 외적인 부분에서 마키가 화를 내는 건 드문 일이었다. 사에키가 입술을 몇 번 더 움직였다가 별다른 말은 않고 이내 입술을 다물었다.

 

  “텟페이에게 그런 말은 좀 심했잖냐. 너.”

 

  사에키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시라유키에게 미안하다며 사과하는 일도 없었다. 넷을 둘러싸고 있던 온난한 분위기가 빠르게 냉각되고 있었다. 말이 빈 자리에 침묵이 살얼음처럼 올라붙었다.

 

  “……미안함다, 선배. 선배가 꽃 싫어하는 줄 미처 몰랐슴다.”

 

  침묵을 깬 건 시라유키였다. 시노노메와 마키가 시라유키를 돌아보았다. 누가 보더라도 엉뚱한 사람이 사과를 하는 광경에 둘은 할말을 잃은 듯 했다. 사과라면 시라유키가 아니라 사에키가 해야 옳았다. 엄연히 잘못한 쪽은 사에키다. 조금 전의 발언은 준비해온 사람의 성의를 봐서라도 면전에 대고 해서는 안 되었다. 엄격한 가정교육을 받고(사에키의 말에 따르면 그랬다)처세술에 뛰어난 사에키가 그걸 모른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럼에도 사에키는 시라유키에게 미안해하기는커녕 자신의 손에 들린 꽃다발을 노려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것도 엄청난 적개심을 담아서.

 

  “저, 꽃다발……. 맘에 안 드시면 버리셔도 괜찮슴다. 억지로 갖고 있지 않아도 됨다. 진짜임다.”

  “텟페!”

 

  시노노메가 무슨 그런 말이 다 있냐는 듯이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시라유키는 시노노메를 향해 고개를 모로 저었다. 사에키와 정말 잘 어울리는 꽃다발이었지만, 어쩔 수 없다. 당사자가 원하지 않는 선물이란 원래 버려질 수밖에 없는 운명인 것이다. 대체로 누군가 원치 않게 갖게 된 것들은 짐덩이에 불과하니까.

 

  사에키가 시라유키를 힐끔 쳐다보았다가 한숨을 쉬었다.

 

  “……뭘 또 사과하는 건데.”

  “……”

  “됐어.”

 

  ……내가 미안. 사에키가 시선을 비스듬히 떨구었다. 

 

 

 

 

  시라유키는 식이 시작하기 전에 교문을 나섰다. 졸업 식순이 다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얼굴이나 한 번 더 보고 헤어질까 했으나 그러면 아쉬움만 더 커질 것 같아서였다. 그러나 제법 단호하게 결정했음에도 미련은 분명 남았다. 시라유키는 아직 교문이 보이는 거리에서 뒤를 돌았다. 저 멀리 아득하게, 축 졸 업 이라고 쓰인 현수막이 바람에 나부끼는 게 보였다. 

 

  사에키는, 여기를 떠나 다른 곳으로 간다고 했다.

 

  처음 듣는 얘기였다. 그동안 셋 모두 사에키가 대학교에 간다는 것만 알았지 거주지를 옮긴다는 것까진 몰랐다. 말을 들은 즉시 세 명은 부조상처럼 굳었다. 충격이 상당했다. 사에키가 한번도 그렇게 말한 적이 없음에도 모두들 은연중에 당연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대학교에 가더라도, 밴드를 그만 두더라도, 사에키는 여기에 남을 것이라고. 

 

  셋은 한동안 충격에 휩싸인 채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사에키는 누구에게도 어디로 이사가는지 말해주지 않았다. 누군가 “그래서 어디로 가는 건데?”라고 묻기도 전에 “가서, 가끔 연락할게.”라고 선수를 쳤을 따름이었다. 그건 모든 대화를 종결시키는 한마디였다. 더는 묻지 말라는 암묵적인 의사표시였다. “전화번호는 그대로 둘 거지?” 시노노메가 물었고 사에키는 대답했다. 

 

  아마도.

 

  시라유키는 등을 돌리고 몇 발자국을 더 내디뎠다. 이제 교문은 보이지 않는 거리였다. 시라유키는 엄마 손에 이끌려 억지로 학원에 가는 아이처럼 마지못해 걸음을 옮겼다. 집까지 가는 걸음이 늘어진 테이프처럼 죽죽 늘어졌다. 한여름, 아지렁이가 일렁이는 아스팔트처럼 도로의 선이 무한대로 뻗어나가고 있었다. 

 

  미적미적 현관문 앞에 도착했을 때 시라유키는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열쇠를 꺼내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분명 주머니에 있어야 할 열쇠가 손에 집히지 않았다. 시라유키는 몇 번 더 주머니를 쑤셔 보았다가 허겁지겁 겉옷을 벗었다. 큰일이었다. 시라유키는 주머니를 까뒤집고 겉옷의 먼지를 탈탈 털었다. 바닥으로 뭔가 떨어지는 소리가 나서 기뻐했지만 언제 넣어놨는지도 모르는 동전이 안주머니에서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였다.

 

  열쇠는 없었다.

 

  시라유키는 낭패감이 가득한 얼굴로 굳게 닫힌 문을 쳐다보았다. 수리공을 부를까 했다가 핸드폰이 꺼진 게 뒤늦게 생각났다. 조심한다고 하는데도 바닥에 자주 떨어트리다보니 어딘가 크게 고장나기라도 한 건지, 최근 들어 핸드폰은 배터리가 한참 남아 있는데도 제멋대로 픽픽 꺼지곤 했다. 시라유키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전원 버튼을 눌러 보았지만 액정은 죽은 것처럼 잠잠했다. 군데군데 칠이 벗겨진 문 앞에서 시라유키는 초대받지 않은 이방인처럼 막막한 심정이었다. 왜 진작 도어락으로 바꾸지 않았나 하는 후회가 물밀 듯이 몰려왔다. 

 

  그러나 일이 벌어진 마당에 이제 와서 후회한들 시간낭비일 뿐이었다. 열쇠를 찾아야 했다. 시라유키는 걸어온 길을 차근차근 되짚어 걸으며 꼼꼼하게 바닥을 뒤졌다. 인적이 드문 길로 걸어와서 찾기 쉬울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만도 않았는지 열쇠는 보이지 않았다. 하다못해 길 위에서 뭔가 반짝거리는 일조차 없었다. 실망을 한가득 안고 2차원 선분 위의 사람처럼 바닥만 보고 걷다 보니 도착한 곳이 교문이었다. 멍한 얼굴로 교문을 바라보다가, 길 위에는 없었으니 아무래도 교내에서 잃어버린 게 분명하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사람을 피해 돌아다녔으니 학교에서 잃어버렸다면 금방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시라유키는 교문 안으로 발을 들였다. 가장 먼저 자신이 앉아 있던 근방부터 이 잡듯이 샅샅이 뒤지다가 모래 속에서 반짝이는 기척이 있으면 운동화 앞 축으로 운동장의 모래를 팠다. 하지만 그때마다 나오는 건 녹슨 동전이나 마모된 유리조각이나 누군가 잃어버린 머리핀 따위였고 열쇠는 아니었다. 열쇠는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그런 물건은 처음부터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것처럼.

 

  시라유키는 좌절하지 않고 수색의 반경을 넓혔다. 이번에는 아예 교내를 돌아다니기로 했다. 식이 끝나기가 무섭게 대다수의 사람들은 차를 타고 그들만의 시간을 즐기러 갔으므로 교내는 무척 한산했다. 열쇠를 찾으러 돌아다니느라 누군가와 부딪칠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았다.

 

  휴일의 적막이 교내를 고르게 덮고 있었다. 시라유키는 교내를 시선으로만 둘러보며 어디서부터 뒤질까, 하다가 자전거를 보관해두는 곳으로 갔다. 누군가 자신의 열쇠를 그 사람이 잃어버린 자전거 열쇠와 착각하고 가져갔다가 안 맞는 걸 알고는 바닥에 버려두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보관소에는 빠진 이처럼 자전거들이 듬성듬성 놓여 있었다. 그늘진 곳이라 발을 디디니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시라유키는 어깨를 한번 움츠렸다. 불현듯 종말을 앞둔 세계에 자신 혼자만 덩그러니 남겨진 기분이 들었다.

 

  목소리가 들려온 건 그 순간이었다.

 

  “어라, 텟페. 여기서 뭐해?”

 

  시라유키는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몸을 돌렸다.

 

  “……츠바사 선배? 선배야 말로 여기서 뭐하심까……?”

  “응, 멀리서 보는데 굉장히 텟페 같은 사람이 있길래 왔는데 진짜 텟페지 뭐야!”

 

  실은 시노노메가 사에키로 변장한 건 아닌가 착각할 정도로 활기찬 음성이었다. 그게 아니라 이전에는 뭘 하고 있었냐고 물은 거였지만 말임다. 식도 끝났고, 선배는 집에 안 가도 되는 검까? 하고 물으려다가 시라유키는 말을 꿀꺽 삼켰다.

 

  “그래서 여기서 뭐 하는데? 텟페이.”

 

  사에키는 시라유키에게 다가가 호기심이 가득 어린 눈을 했다.

  

  “보물찾기라도 해?”

  “그, 열쇠를 찾고 있었슴다.”

  “열쇠?”

 

  사에키가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네. 잃어버려서 말임다. 그게, 집에 딱 도착했는데 주머니에 없다는 걸 그때 알아서……. 저 그거 없으면 곤란하지 말임다. 하나뿐인 열쇠라서요.”

  “뭐야. 하나뿐이라니……. 여벌 열쇠 정도는 만들어두라고.”

 

  사에키가 헛웃음을 웃으며 가볍게 핀잔을 주었다. 내심 황당해하는 눈치였다. 그야 요즘 같은 세상에 무슨 일이 일어날 줄 알고 설마하니 여벌 열쇠도 없이 다니는 놈이 다 있나, 하고 생각하면 어이가 없다 못해 황당할 만도 했다.

 

  시라유키는 시무룩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래야겠슴다…….”

  “그래서 설마 여길 다 뒤지려고?”

  “그게 말임다……. 아마 그래야 할 거 같지만…….”

 

  시라유키는 어물어물 말꼬리를 흐렸다. 사에키가 한숨을 쉬었다.

 

  “……텟페, 혹시 장래 희망이 사막에서 바늘 찾기야? 아니면 모래사장에서 동전 찾기?”

  “……저도 무모한 짓이라는 건 알고 있으니 놀리는 건 그만둬 주십쇼, 선배. 일단은, 모 아니면 도라는 심정으로 여기부터 뒤져보려고 했지 말임다…….”

 

  시라유키는 뒷목을 긁적였다. 해명을 하면서도 스스로가 어처구니없었다. 사에키가 흐음, 하더니 보관소를 돌아보며 말했다.

 

  “오래 걸리겠지?”

  “그렇……. 겠죠.”

  “차라리 수……. 아니다.”

 

  내가 도와줄게. 사에키는 비밀스러운 장난을 꾸미는 악동처럼 속삭였다. 시라유키는 대답을 망설였다. 그가 도와준다면야 혼자 찾는 것보다는야 나을 테지만, 사에키의 말마따나 사막에서 바늘찾기나 다름 없는 일이었다.

 

  시라유키가 대답을 않자 사에키가 고개만 돌려 시라유키를 돌아보았다. 보관소에 드리워진 그늘이 사에키의 얼굴을 사선으로 덮고 있었다.

 

  “텟페이, 실은 내 도움이 엄청 간절하지? 뒤통수만 봐도 알겠던데. 텟페, 무지 내 도움이 필요한 듯한 뒤통수를 보이며 서 있었으니까.”

 

  그건 대체 어떤 뒤통수란 말임까……. 터무니없는 말에 태클을 걸려다가 시라유키는 그냥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도와준다? 응?”

 

  사에키는 벌써부터 팔까지 걷어붙이고 있었다. 시라유키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개미핥기처럼 열심히 바닥을 훑었다. 고요한 가운데 간간이 자신의 숨소리가 들리고, 아, 하는 상대방의 탄식이 들렸다가 누군가가 운동화를 끄는 소리가 날 때면 모든 소리가 일시에 사라지는 일이 반복되었다. 소득 없는 수색작업의 연속이었다. 

 

  “그러고 보니, 텟페.”

 

  열쇠를 찾다찾다 마지막 자전거가 놓인 곳까지 갔을 때였다. 내내 허리를 굽히고 있던 사에키가 몸을 펴며 입을 열었다.

 

  “혹시 집요정이 가져간 거 아냐?”

  “집요정이요?”

 

  오리걸음을 할 때처럼 바닥에 붙어서 엉금엉금 걷다 말고 시라유키는 몸을 일으켰다. 안 그래도 슬슬 다리가 저려와 일어서려던 참이었다. 다섯 걸음 뒤에서 사에키가 허리를 좌우로 크게 돌렸다가 늘어지게 기지개를 켜며 대답했다.

 

  “왜, 집집마다 존재하는 요정 있잖아. 텟페는 몰라?”

  “……선배 판타지 소설을 너무 많이 본 거 아님까?”

 

  과학 문명의 발달 어쩌구 하는 21C에 요정이라니. 황당함을 채 숨기지도 못한 물음에 사에키가 가만히 눈을 흘겼다.

 

  “텟페이, 집에서 물건 잃어버린 적 없어?”

  “……있슴다.”

  “그거 찾다 찾다 못 찾고 포기한 적은?”

 

  도대체 뜬금없이 이런 건 왜 묻는 걸까. 생각하면서도 시라유키는 착실하게 답변했다.

 

  “그것도 있슴다.”

  “그럼 찾는 걸 포기한 그 물건이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적은?”

  “……그것도 있슴다.”

  “그런데 집요정을 몰라?”

 

  시라유키는 휴, 하고 숨을 내쉬었다.

 

  “……뜬금없이 집 요정이랑 무슨 상관임까, 그게.”

  “텟페이, 그런 걸 두고 ‘집요정이 가져갔다’라고 하는 거라고.”

  “그러니까 선배 말은……. 지금 집요정이 제 열쇠를 가져갔단 뜻임까?”

  “응.”

 

  사에키가 의기양양한 표정을 했다. 그는 정말로 이 세상에는 집요정이 실재하며 그 실재하는 집요정이 열쇠를 가져갔다고 철썩 같이 믿는 듯했다. 눈동자가 아주 반짝반짝 빛났다. 어디서 봤더라, 저런 눈. 길거리에서 도를 믿습니까, 하며 난데없이 소매를 붙잡곤 하는 사람들이 종종 저런 눈을 보여주곤 했던 것 같은데.

  

  예고도 없이 별 희한한 소리를 듣다 보니 잠깐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시라유키는 다소 넋이 나간 얼굴로 말없이 사에키를 응시했다. 여기는 밖인데 뜬금없이 집요정 운운이 웬 말이냐며 받아칠 정신은 <21C에도 집요정은 실재하는가?>에 관한 서론을 듣고 안드로메다로 날아간 지 오래였다. 

 

  “텟페, 너 왜 눈에 초점이 없어. 지금 내 말 무시하는 거?”

  “……그건 아님다.”

  “그럼?”

  “그냥, 정말 집요정이 가져간 거면 어쩌나 하고……. 아!”

 

  시라유키는 작게 탄성을 뱉었다. 불쑥 생각난 게 있었다.

  

  “츠바사 선배.”

  “응?”

  “혹시 핸드폰 좀 빌려주실 수 있슴까?”

 

  왜 진작 그 생각을 못 했을까. 시라유키는 자책했다. 사에키의 핸드폰을 빌려서 수리공을 부르면 깔끔하게 해결 될 일이었는데. 처음부터 핸드폰만 빌렸다면, 사에키가 자신과 함께 열쇠를 찾는 수고로운 짓을 하는 일도 없었을 테다.

 

  선배에게 안 해도 되는 고생을 사서 시키다니. 시라유키는 자신의 머리를 쥐어박고 싶은 심정이었다.

 

  “핸드…….”

 

  사에키의 주머니에서 벨소리가 울린 건 그 순간이었다. 

 

  “앗, 선배. 전화 왔슴다.”

 

  시라유키는 주머니를 가리켰다. 사에키가 주머니를 힐끗 내려다보며 “그러네.”라고 했다간 입을 꾹 다물었다. 

 

  “선배, 안 받아도 됨까?”

  “…….

 

  사에키가 받을 때까지 전화를 끊지 않을 심산인지 벨소리(사에키가 좋아하는 밴드의 음악이었다)가 계속 반복되었다. 시라유키는 자신이 다 초조한 얼굴로 주머니를 쳐다보았다. 이윽고 사에키가 한숨을 내쉬며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네, 엄마.”

 

  ……네, 네. 끝났어요. 네. 방금 끝났어요. 사에키의 입에서 조근조근한 대답이 흘러나왔다. 그건 아주 부드럽고 온수처럼 흐르는 것이었는데, 그러나 깊은 유대감과 친밀함을 가진 자를 향한 애정 어린 대답이라기보다는 흡사 취조 당하는 사람 같은 대답이었다. 사에키가 대답을 하는 내내 시라유키는 그의 표정이 시시각각으로 굳어가는 걸 지켜보았다. 

 

  “네, 알겠……. 아, 핸드폰 꺼졌다.” 

  “헉, 그거 정말임까?”

 

  사에키가 친히 핸드폰을 꺼내서 까맣게 죽은 액정을 보여주었다. 시라유키는 약 1분 15초 전까지만 해도 존재했던 희망이 산산조각 나다 못해 가루로 변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런데 핸드폰은 왜?”

 

  사에키가 핸드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으며 물었다.

 

  “그게……. 수리공을 부르는 게 나을 거 같아서 말임다. 제 핸드폰은 배터리가 나갔거든요. 선배에게 핸드폰을 빌려서 전화해야겠다는 생각이 이제야 들었지 말임다.”

  “……저런, 그거 참 아쉽게 됐네. 내 핸드폰이 죽어서.”

  “아님다……. 선배 말대로 열쇠를 찾는 게 무모한 짓이었슴다. 다른 사람에게 빌려보기라도 해야겠지 말임다.”

  “텟페이가 빌리려고 들면 삥 뜯는 것처럼 보일걸?”

  “…….”

  “그냥 오늘은 집에 들어가지 말고 나랑 어디 가서 같이 잘래?”

 

  사에키가 태연자약하게 제안했다. 시라유키는 사에키의 말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네?” 하며 되물었다가 뒤늦게 사색이 되어 소리를 질렀다.

 

  “그, 그그그, 그게 무슨 말임까 선배! 아니, 잠, 아니, 무슨 말, 말임까?!”

 

  지진계에 기록되는 그래프처럼 목소리가 마구 흔들렸다. 사에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텟페이, 왜 그렇게 놀라? 순수한 의도로 물어본 건데.”

 

  시라유키의 반응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양 사에키가 고개를 갸웃했다. 시라유키는 제 정수리 위에서 김이 뿜어져 나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사에키의 말 한마디에 순식간에 A-Z까지의 과정을 머릿속에서 제멋대로 진행시킨 결과였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시라유키는 죄를 저지른 사람처럼 고개를 푹 떨구었다. 사에키와 시선을 마주할 수가 없었다. 이대로 가까운 강으로 달려가서 자진입수나 하며 제 안의 어둠을 정화하지 않으면…….

 

  “텟페?”

 

  시라유키는 용수철처럼 펄쩍 튀어 올랐다.

 

  “그, 아, 네! 알고 있슴다. 물론, 순, 순수한! 뜻이라는 것쯤은 저도 암다! 그치만 아직 밤도 아니고, 그쵸. 그렇지 않슴까, 선배.”

  “어차피 집에도 못 가잖아. 아직 열쇠도 못 찾았고, 수리공도 못 부르고…….”

 

  사에키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니까 어디론가 가버리자. 사에키는 아까부터 농담인지 진담인지 도통 알 수 없는 말만 하고 있었다. 시라유키는 쭈뼛대며 대답했다. 

 

  “……저, 그런데 선배는 집에 안 가 봐도 검까. 방금 전화도 왔는데…….”

 

  사에키가 말을 잘랐다.

 

  “놀러 간다는 전화야.”

  “네?”

  “뭐, 다 그런 거지. 이를 테면 어른의 사정이랄까. 출국 수속 밟기 전에 전화했대. 대단히 눈물 나는 사랑이지 않아?”

  “…….”

  “텟페, 방금 한 말은 농담. 맛있는 거 해놓을 테니 적당히 놀고 들어오래. 자, 열쇠나 찾자. 우리 텟페는 열쇠 없으면 출국 수속도 못 밟고 꼼짝없이 밖에서 자야 하니까 말이야.”

 

 

 

 

 

  이게 차라리 보물찾기 게임이라도 하는 거라면 좀 나을 텐데. 둘이 다음으로 선택한 장소는 실내였다. 만약 실내에서 잃어버린 거라면, 들어가는 문이 닫히기 전에 들어가서 찾아봐야 한다고 사에키가 주장했기 때문이다.

 

  둘은 엄중한 수사를 나온 형사처럼 구석구석 꼼꼼하게 살피며 복도를 걸었다. 복도의 창틀 위로 폭약 같은 햇빛이 튀어올랐다.

 

  “선배 가면, 무지 허전할 거 같슴다.”

  “베이스 자리는 비워두고 셋이 활동해, 그럼. 거기에 투명인간인 내가 있다고 생각하고.”

  “진짜 그럴까요…….”

 

  시라유키는 침울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바보야. 농담을 왜 진지하게 받고 있어?”

  “……베이스.”

  “응?”

  “팔 겁니까?”

 

  발소리가 멎었다. 

 

  이윽고 사에키가 왜 그런 것을 질문 하냐는 듯한 눈으로 시라유키를 보았다. 서늘한 얼굴이었다. 사에키의 입에서 흘러나올 대답이 두려워졌다. 시라유키는 쫓기듯이 입을 열었다.

 

  “사실 말임다, 선배가 아닌 베이스는 상상이 안 감다. 왜냐면, 제가 아는 베이스는 선배밖에 없으니까요. 그러니까, 어, 선배 거, 펜더죠. 비싸지 않슴까. 좋은 거 아님까. 그 소리, 좋아했슴다. 커뮤니티에 올리면, 왜, 누구나 탐내기도 하고, 사겠다는 사람도 많고…….”

 

  시라유키는 두서없이 말을 이어 붙였다. 사에키는 어차피 밴드를 그만 둘 것이다. 그는 진학반 시험을 쳤고 대학교에 가서 평범한 수학을 하겠다고 했다. 그럭저럭 공부를 잘해도 그럭저럭 먹고 사는 데는 지장 없으니까. 예전부터 사에키에게는 남들보다 조금 더 현실적인 면모가 있었다. 

  

  블레이스트는 오늘로 끝이다. 될 수 있는 한 오래 부정하고 싶었던 문장이 선명하게, 박을 입힌 것처럼 떠올랐다. 

 

  “……그러니까, 아님다. 안 파셨음 좋겠슴다. 아니, 아님다……. 아무것도.” 

 

  시라유키는 어영부영 말을 맺었다. 타지에 가서도 그가 베이스를 볼 때마다 이곳을 기억해주었으면 했다. 블레이스트를 기억해주었으면 했다. 그리고 자신을……. 하지만 시라유키는 구체적인 형체로 남은 기억들이 때때로 사람을 얼마나 괴롭게 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는 쓰일 일 없는 베이스가 먼지를 뒤집어 쓴 모습을 볼 때마다 괴로워할지도 몰랐다. 애매한 추측이었다. 그러나 심증이 있는 추측이기도 했다. 시라유키는 블레이스트를 그만두고 타지로 간다고 했을 때의 사에키가 어떤 얼굴을 했는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쁨과 착잡함이 마블링처럼 섞인 얼굴이었다. 

 

  사에키는 말이 없었다. 입술은 여전히 꾹 다물린 채였다. 시라유키는 선고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초조하게 속으로 1분을 셌다. 사에키는 1분이 넘어가도록 묵묵부답이었다. 사람이 없는 복도는 무척 조용했고, 모든 소리를 거세한 것만 같은 고요함은 이내 불안함을 불러 일으켰다. 시라유키는 문득 덜커덕 가슴이 내려앉아 입을 열었다.

 

  “……꽃다발, 진짜 버리셔도 됨다.”

  “…….”

  “……화나신 거 같아서 말임다.”

 

  사에키가 크게 심호흡을 했다.

 

  ……안 버려. 그냥, 꽃다발은……. 결혼기념일 따위가 생각나서 기분 나빴던 거뿐이야.

 

  그때 시라유키는 뒷목을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느꼈다. 그것뿐이라고. 사에키가 스스로에게 변명하듯이 같은 말을 덧붙였다. 목소리가, 먼지처럼 부유했다가 기도를 타고 들어와 숨이 막혔다.  

 

  시라유키는 얼어붙은 것처럼 서 있다가 간신히 한마디를 뱉었다.

 

  열쇠는……. 천천히, 찾을까요.

  ……마음대로 해.

 

  그래서 시라유키는 열쇠를 천천히 찾기로 했다. 

 

 

 

 

 

  ……선배들이 갑자기 다 가니, 기분이 되게 이상함다.

  이상하긴 뭐가.

  그냥, 막 울렁거리고, 토할 거 같고……. 멀미가 남다.

  뭐야 그게, 차멀미도 아니고.

  실은, 선배가 베이스를 칠 때마다 꼭 그런 기분이 들었슴다.

  …….

  ……막, 허전한데.

  텟페.

  어쩐지, 선배가 계속 생각날 것만 같은 그런 기분이 들지 말임다.

  그거, 그러면 안 돼. 텟페.

  

  착잡한 목소리가 발치로 뚝뚝 떨어졌다. 시라유키는 사에키를 돌아보았다. 

 

  왜 안 되는 검까?

 

 사에키가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네 세계가 이게 전부가 아니잖아.

 

  “…….”

  “……텟페, 손 줘.”

  “네?”

  “손.”

 

  시라유키는 다소 벙찐 얼굴로 있다가 순순히 손을 내밀었다. 사에키가 이게 어딨더라, 하면서 주머니를 뒤지다가 “아!” 하며 뭔가를 꺼내들었다.

 

  “여기.”

  “…….”

 

  열쇠였다.

 

  “……자. 실은 아까……. 화단에 있는 거, 주웠어.”

 

  사에키가 손바닥 위에 열쇠를 올려놓았다. 툭하고 손바닥 위로 떨어지는 쇳덩이가 외형에 비해 무겁게만 느껴졌다. 시라유키는 그런 열쇠는 생전 처음 본다는 것처럼, 혹은 아, 이런 열쇠가 있었지, 하는 것처럼, 집요정이 가져갔다고 믿어지는 물건이 어느 날 먼지덩이와 함께 구석에서 튀어나올 때 사람들이 아, 그런 물건도 있었지, 하는 것처럼 사에키가 손바닥 위에 올려놓은 열쇠를 보았다. 열쇠는 흙먼지 속에서 뒹군 적은 한 번도 없다는 것처럼 말끔한 모양새였다. 은빛의 열쇠가 손바닥 위에서 빛나고 있었다. 시라유키는 홀린 듯이 열쇠를 보았다. 

 

  “선배.”

  “왜. 찾았는데도 안 줬다고 욕할 거냐?”

  “…….”

 

  사에키는 전화를 내켜하지 않았다. 꽃다발을 받고는 결혼기념일이 생각나서 기분이 나빴다고 했다. 베이스를 팔 거냐는 물음에 화를 냈다. 그럭저럭 먹고 살 수 있으니 진학 한다는 말을 대수롭잖게 하면서도 마냥 기뻐하지만은 않았다. 열쇠는 무척 말끔했고, 사에키는,

 

  같이 있지, 않겠냐고……. 어디론가, 가버리자고…….

 

  “……그, 괜찮으시면 집에서 자고 가도 되지 말임다.”

 

  ……선배랑 헤어지고 싶지 않아요. 사에키가 눈을 가늘게 떴다.

 

  “야, 아까부터 무슨 꿍꿍이냐?”

 

  설마 고백? 사에키가 호들갑을 떨며 깔깔거렸다간 농담이라며 호탕하게 웃었다. 시라유키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헤어지고 싶지 않은 건 사실이었고…….

 

  “……야?”

  “…….”

  “…….”

  “맘대로 생각하십쇼…….”

 

 사에키가 입을 합 다물었다. 얼굴이 불그스름했다. 

 

 

 

 

 

  대학교에 가면, 독립해도 좋다고 했어. 

 

  돌아가는 길에, 사에키는 담담하게 말했다. 

 

  웃기는 일이지. 내가 어떻게 되건 아무런 상관도 없는 주제에, 신경도 안 쓰는 주제에……. 이제 와서 독립을 허락하고 말고 할 게 어디 있단 말이야. 그래도 난 나오고 싶었어. 거기에 있으면 숨이 막혔거든. 그래서, 나오고 싶어서……. 뭐, 그랬다는 얘기.

  ……어디로 이사 가는지는 안 알려주실 검까?

  응. ……너네가 시도때도 없이 찾아오면 귀찮다구. ……그리고 나, 여기에 계속 있을 마음은 없으니까. 알려주면, 계속 있어야 할 것만 같잖아.

  

  말하며 사에키는 몸을 움츠렸다.

 

  집요정 말임다.

  응.

  우리집의 집요정은 내가 아니었을까 하고.

  그게 무슨 말이야?

  부모님이 말임다, 결혼반지를 두고 가셨거든요.

 

  길게 잠을 자고 일어났더니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허둥대며 집안 구석구석을 돌아보다가 안방을 살폈을 때였다. 안방은 어수선하게 어질러져 있었는데 어디로 보나 급하게 세간을 챙겨 나간 흔적이 역력했다. 어린 나이에도 상황을 이해하고 현실을 깨닫는 건 순식간이었다. 눈이 퉁퉁 부을 정도로 울다가 세수를 하기 위해 화장실로 갔더니 세면대 위에 여자의 손에 딱 맞춘 듯한 결혼반지가 있었다. 손을 씻느라 잠깐 빼둔 것을 챙기는 일도 잊고 급하게 도망친 모양이었다. 100m 달리기를 했을 때처럼 가슴이 쿵쿵 뛰었다.

 

  엄마는 늘 결혼반지를 애지중지하며 그걸 항상 약지에 끼고 다녔다. 어쩌다 실수로 잃어버린 날에는 반지를 찾아 사방을 헤맸다. 잃어버렸으리라고 여겨지는 장소로 돌아왔다가, 한동안 떠나지 않고 그 주변만 뱅뱅 맴돌았다. 그걸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 부모님 몰래 지갑에서 돈을 빼내는 아이처럼 반지를 집어 들고 왔다. 이제는 뭔가를 몰래 들고 온다고 해도 뭐라 할 사람도 없는데, 그런 사실조차 잊고……. 

 

  방으로 돌아온 뒤에도 가슴은 계속 뛰었다. 심장이 고막을 뚫고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문을 꼭 닫고 문에 기대 서서 심호흡을 했다. 그 짧은 거리를 이동하는 새에 혹시라도 반지가 손에서 빠져 나갈까봐 꼭 쥐고 있었던 주먹을 천천히 폈다. 엄마가 잃어버린 반지는 자신의 손바닥 위에 있었다. 기뻤다. 사라지지 않아서 진심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러고는 처음 반지를 집어 들었을 때 했던 생각을 따라 자신만이 아는 장소에 반지를 숨겼다. 책장, 정확히는 언젠가 사두곤 책장에 비스듬히 세워두었던 앨범의 옆자리였다.

 

  더는 찾는 사람도 없는 집에서, 사실은, 매일매일 눈을 감고 뜰 때마다 기대했다. 혹시나, 어쩌면……. 기적처럼, 결혼반지를 두고 갔다는 걸 기억해내고 다시 돌아오지 않을까 하고……. 

 

  선배도 그러고 싶었던 거겠죠.

 

  사에키로부터의 대답은 없다. 그래도 시라유키는 괜찮았다. 묘하게 시선을 피하는 듯한 얼굴을 보며 그저 생각할 뿐이었다. 역시 돌아가면 여벌 열쇠를 하나 만들자. 그리고 하나는 츠바사 선배에게 줘야겠다고……. 

 

 

 

Aimer - Even Heaven

music2020. 9. 12. 17:30

 

개인적으로 겨울에 듣기 좋은 곡이라고 생각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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